< 부루나 칼럼 >
비유의 힘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우리 옛말에 ‘가을ᄒᆞ다’라는 동사가 있다. 가을이 되어 가을걷이[秋收]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에 견준다, 비유(譬喩)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고유어가 언제부턴가 일상생활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우리네 삶이 차츰 거칠고 메말라진 결과, 우리의 말글살이에서 멋들어지고 정곡을 찌르는 견줌이나 비유 대신 살벌하고 거친 막말이나 욕설, 아니면 배배 꼬인 빈정거림이나 자기과시의 현학적(玄學的)인 겉멋부림이 더 흔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예술이나 교육, 그리고 종교에 있어서 표현이나 전달이 잘 되고 잘못됨은 적절한 비유를 제대로 했느냐에서 판가름날 때가 많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는 얼마만치 빼어난 비유를 적재적소에 잘 가져다 썼는가가 그 작품의 가치를 크게 결정한다.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며 심지어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 남을 웃게 만들거나 설득하여 내 편으로 만드는 처세술에 있어서도 비유는 그 쓰임새가 크다. 그런데 우리가 대화를 하면서 알맞은 비유를 잘 섞어 넣으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거짓말같이 매듭이 풀리기도 하지만 격에 맞지 않은 생뚱한 비유를 썼다가는 자칫 동네 아재 썰렁 개그로 전락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낭패를 보고 만다. 하물며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일, 그저 밥만 먹고 먹은 대로 싸기만 하는 살덩이를 데려다가 깨우치고 가르쳐 일머리를 챙겨 주고 마음머리를 열어 주고 생각머리에 갈피를 잡아 주는 교육에 있어서랴! 낯설고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는 비유를 써서 잘 일러 줘야 금방 알아먹는다.
그러니 어둠에 싸인 중생을 깨우쳐 밝음의 세계로 이끄는 종교에 있어서(종교야말로 이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는 대규모 장기교육 프로그램이 아닌가!) 이러한 비유의 기법이 쓰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우리가 알기에 기독교의 경전인 바이블[聖經]에는 널리 알려진 뛰어나고 많은 비유의 설교가 있다. 그 말씀들의 본뜻은 일단 두고라도 얼핏 보기에 그 대부분이 얼마나 무릎을 칠 만치 적절하고 알아듣기 쉬운 비유들인가! 정말 그런 말씀을 예수가 했다면, 딴 것은 두고라도 그는 언변의 천재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불경은 어떠한가?
물론이다. 어찌 보면 경전 곳곳이 비유요 빗댐이요 견줌이다. 그 가운데서 특히나 뛰어나고 유명한 비유들을 많이 품고 있는 법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Lotus Sūtra]에 대해 알아보자. 법화경이 무엇인가?
옛날 인도에서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수행승단과는 별도로 재가신도들이 중심이 된 보살승단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진보적인 세력들이 나타나 기원전부터 자기들의 새로운 종교적 비전을 담은 새 경전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서북 인도에서 생겨난 경전이 28품으로 엮어진 작지 않은 분량의 법화경이다.
아시다시피 불경에는 크게 대승불교 경전과 소승불교(근본불교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경전이 있고 이를 달리 분류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장(經藏), 교단의 규칙에 관한 율장(律藏), 그리고 이 경과 율을 연구하고 논한 논장(論藏)으로 나뉘며 이 셋[三藏 tripitaka]을 통틀어 모아 놓은 것을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 고대 인도에서는 진리에 다가가는 데 있어서 두 가지의 상반된 태도가 있었음을 말해야겠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진리[참, truth]를 인격체[神]로 여기는 박띠(Bhakti)의 태도이다. 이들은 신앙과 기도 등을 통하여 절대자나 신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인격신을 모시는 거의 모든 종교가 박띠 신앙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비인격체인 어떤 법칙[Dharma]으로 파악하여 명상과 논리로 다가가는 마야바디(Mayavadi)의 태도이다.
불교는 처음에는 철저한 마야바디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따라왔다 눌러앉은 그리스 사람들이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박띠 신앙으로 기울더니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부터는 우매한 중생을 일단 건지는 방편으로 더욱 박띠 신앙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보듯이 박띠와 마야바디가 별 충돌 없이 일종의 조화를 이루며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불교 본래의 목표에 나름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 현재 동아시아 불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승불교의 경전 중에서 이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대표하는 것이 금강경과 법화경이다. 일례로 불상의 숭배에 대한 두 경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극과 극이다. 먼저 금강경의 구절이다.
형상을 통해 나를 보거나 목소리를 통해 나를 구하는 자는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런가 하면 법화경의 방편품에는 같은 주제를 두고 이렇게 되어 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꽃 한 송이를 불상 앞에 바치면 수많은 부처님을 보리라.
(若人散亂心 乃至一華 供養於畵像 漸見無數佛)
그런데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금강경도 외고 법화경도 읊는다. 이를 모순이라 해도 좋고 무심이라 해도 좋지만 이리 가든 저리 가든 번갈아 조금씩이나마 진리에 다가갈 수만 있다면 중간의 방편이 어떤들 그게 무슨 대수랴! 같은 자리에 앉아 왼다리 조금 움직여 발톱끝만치 나아가고 오른 무릎 조금 뻗대어 손톱끝만큼이라도 숨 쉴 틈서리를 벌리는 것이니 이리 몸을 틀고 계속 애를 쓰다 보면 오욕의 밧줄로 동여진 이 몸이 마침내 속박을 풀고 벗어나 자유의 저 언덕으로 못 달아날 것도 없지 않은가!
불상 이야기로 좀 빗나갔다만 다시 법화경으로 돌아가 그 비유들을 훑어보자. 법화경에 있는 대략 열 두 개쯤의 비유 가운데 잘 알려진 일곱 가지의 이야기[法華七喩]가 있다.
첫째로 불난 집 이야기[火宅喩: 第3 譬喩品]가 있다.
어느 장자[長子, 재벌]가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자기의 큰 저택이 불에 타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 집 방 속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밖으로 나올 현관문은 하나뿐이다. 아이들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 불난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아무리 나오라고 소리쳐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평소에 갖고 싶어했던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를 주겠다고 소리치자 그제야 애들이 솔깃해서 뛰쳐나온다. 애들이 바깥으로 나오자 아버지는 약속했던 이런 수레들 대신 희고 큰 소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난 집이란 우리 중생들이 삼독(三毒: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불길에 싸여 타죽어 가고 있는 사바세계다.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고 깨침],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 홀로 이치를 따져 깨침],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菩薩乘, 깨침으로 육바라밀을 행함]이라는 방편을 가리키며 희고 큰 소의 수레[大白牛車]는 이 셋을 아우르는 일불승(一佛乘)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야말로 눈앞의 재미에 끄달려 곧 불에 타 죽을 줄도 모르고 탐닉하는 우리 자신들이다.
대승불교가 생겨났을 즈음 성문승이나 연각승을 소승이라 매도하여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이를 벗어나 각각의 입장을 한 방편이라 보고 이를 껴안아 대승의 보살과 마찬가지로 성불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일승묘법(一乘妙法)의 사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르신다. “삼계는 편안함이 없다. 오히려 불난 집과 같다. 온갖 고통이 넘치므로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의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이며 그 중의 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비유가 쓰인 그 다음의 이야기로는 돌아온 아들[窮子喩: 第4 信解品]이 있다.
어느 장자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며 날품팔이로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 갔다. 아버지는 사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세월만 쉰 해가 흘렀다. 그러다 아들은 일자리를 구하여 흘러 다니던 끝에 우연히 아버지의 집에 이르렀는데 그 위풍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가 버린다.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보았지만 한 눈에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사람을 보내 붙잡으려 하니 아들은 놀라 까무라쳐 버린다. 아버지는 지혜 방편을 써서 아들과 비슷하게 허름한 사람을 보내 자기 저택의 변소 청소부 일을 하도록 아들에게 권하게 한다. 좀 지나 아버지도 허름한 옷을 입고 아들에게 다가가 다른 데 가지 말고 자기 집에서 일하도록 안심시켜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키고 서로 친해진다. 이후 장자는 차차 벽을 허물며 자기는 아들처럼 대할 테니까 자기를 아버지처럼 대하라고 한다. 그러다 차츰 중요한 일을 시키는데 마지막에는 보석 창고를 지키는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리고 드디어 임종의 자리에서 자기 아들임을 선언하고 많은 재산과 지위를 그에게 물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장자는 부처님을, 빈털털이 아들은 성문제자와 일체중생을 비유하며 뒷간 거름을 치우는 청소부 일은 삼독을 닦는 수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신약성서에 나오는 탕자(蕩子)의 비유와 아주 닮았다. 마치 콩쥐팥쥐 이야기와 서양의 신데렐라 이야기의 줄거리가 서로 빼다박았듯이 말이다. 어느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전해졌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아니면 아주 오랜 옛날 인도나 중동 지역에 퍼져 있던 이런 이야기가 차례로 각 종교의 경전들에 채택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물가에서 물을 얻어 먹는 이야기라든지, 물위를 걷는 이야기라든지, 법화경에 있는 이야기가 신약성서에도 비슷하게 실려 있는 것이 여러 가지이니 아마도 먼저 생긴 법화경에서 나중 생긴 신약성서로 이야기들이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른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다. 이런 이야기와 더불어 예수가 인도와 티베트에서 불교를 배워 갔다는 얘기도 떠도는데 너무 곁가지를 치니 이쯤 해 두는 것이 좋겠다.
법화경의 세 번째 비유로는 풀과 나무의 이야기[藥草喩: 第5 藥草喩品]가 있는데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여러 초목이 있어 모양과 이름이 다 다르다. 구름은 이런 초목에 비를 뿌리는데 모두에게 고루 뿌려 주지만 초목은 그 종류와 성질에 따라 제각각 나름대로 비를 받고 자라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차별과 평등의 이치에 대한 비유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진리의 가르침이 갖가지 중생들에게 고루 미치지만 중생들은 자신의 능력[근기]에 따라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일시에 내리는 큰 비는 평등하게 베푸시는 부처님의 교법이며 큰 약초, 중간 약초, 작은 약초는 삼승(三乘)을 뜻하고 큰 나무와 작은 나무는 대승과 소승을 비유함이다. 미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어울려 숲을 이루는 우리는 어떤 나무들일까? 부처님의 법비를 맞아 제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 번째로는 환상의 성[化城喩: 第7 化城喩品] 이야기가 있다.
보물로 가득 찬 어느 큰 도시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도시로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리로 가는 길은 멀 뿐만 아니라 험하고 도적이 많아 위험했다. 그런데 안전하게 그리로 가는 길을 아는 인도자가 나타나 사람들은 그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가다 보니 지치고 겁이 나며 게을러져서 사람들은 중간 쯤에서 더 이상 가기를 포기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에 인도자는 신통력을 발휘해 눈앞에 환상의 성채를 만들어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여 사람들이 들어가 쉬도록 했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이 성채에 들어가 쉬고 피로가 가시자 인도자는 환상의 성을 없앤 다음 보물의 도시가 가까이 있다고 말하엿다. 사람들은 인도자를 믿고 힘을 내어 계속 나아가 큰 도시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모든 종교에서 보여 주는 비전이나 약속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화성(化城)이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으로서 임시방편으로 최종 목적지가 아니며 이를 아우르는 일불승(一佛乘)에 의해서만 참된 보처(寶處)에 이를 수 있다는 비유다.
다섯 번째는 옷 속에 숨긴 보석 이야기(衣珠喩: 第8五百弟子授記品)인데 계보주(繫寶珠)의 비유라고도 한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친구의 집에 찾아갔다가 환대를 받아 술에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는데 그 집 친구는 바깥에 볼일을 보러 나가면서 이 자고 있는 친구의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넣어 주었다. 나중 잠에서 깬 이 사람은 멀리 다른 나라로 나가 떠돌며 사느라고 고생을 하며 어렵게 지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옛친구를 만났다. 그 옛친구는 초라한 이 친구를 보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왜 옷 속의 보배 구슬부터 찾아 보지를 않나, 그것 만으로도 즐겁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보배 구슬을 준 집 주인은 부처님이고 가난한 친구는 우리 중생이다.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을 들어서 이미 부처의 씨앗이 심어져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헤매며 헛고생만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여섯 번째는 왕의 여의주 이야기[髻珠喩: 第14 安樂行品]인데 정주(頂珠)의 비유라고도 한다.
어느 전륜성왕이 있어 여러 나라를 복속시킨 다음 신하들에게 상을 주는데 논밭이며 보물이며 수레 등 여러가지를 나누어 주지만 자신의 상투 속에 감추어 둔 여의주[明珠]만은 나눠 주지 않고 있다가 신하 가운데 가장 공이 큰 한 사람에게만 주었다는 이야기다. 콘서트에서도 그 날의 주인공인 일류 가수는 마지막에 무대에 오르듯이 정말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그리고 꼭 줘야 할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에 나누어 준 상투 속의 여의주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뜻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비유로는 의사 이야기[醫子喩: 第16 如來壽量品]가 있다.
어느 지혜로운 의사에게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아들들이 죄다 잘못하여 독약을 먹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빛과 향기가 나는 해독제를 주자 그 중에 증세가 덜한 아들들은 본마음이 남아 있어 이를 받아먹고 나았으나 증세가 심한 아들들은 본마음이 흐려져 있어 의심하고 먹지를 않는 것이다. 이에 아버지는 해독제를 먹으라고 다시 당부를 한 후 먼 나라로 떠나 그곳에서 심부름꾼을 시켜 자신이 죽었다고 알였다. 이 소식을 듣고 아들들이 슬퍼하였고 증세가 심했던 아들들도 그제서야 본마음이 돌아와 해독제를 먹고 나았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이들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부처의 영원함과 보편성을 설함이다. 지혜 총명한 의사는 부처님을 의미하고 많은 아들들은 삼독에 찌들어 있는 중생이다. 이렇듯 마음이 흐려져 있으면 좋은 것을 줘도 좋은 줄을 모르고 자신을 살려 주려 해도 죽이는 줄 아는 게 우리 중생이다. 이런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삼계도사 사생자부(三界道師 四生慈父)요 불세출의 의왕(醫王)이신 부처님이 아니시면 병을 고쳐 주실 분이 없다.
이렇듯 비유로 설하신 일곱 이야기를 읽으시고 법화경의 가르침에 이전보다 새삼 눈이 뜨이시고 가슴이 트이셨다면 과연 비유는 힘이 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혹시라도 여태 전혀 그게 아니시라면 어찌 해 드려야 하나? 글머리에 나온 ‘가을ᄒᆞ다’라는 말의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전을 찾을라치면 조선시대 선조와 광해군 때의 선비인 조우인(曺友仁 1561 ~ 1625)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가 매호별곡(梅湖別曲)에서 읊었듯이 어디 호젓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강호한정(江湖閑情)으로 스스로를 좀 가라앉히신 다음 차분히 본마음부터 찾아보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