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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3,4월호] 텅빈 배로 살아가기, 스텔라 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06.05|조회수36 목록 댓글 1

< 스텔라의 마음공부 >

 

 

 

 

텅 빈 배로 살아가기

 


글/ 스텔라 박

 

빈 배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 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텅빈 배로 만들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토마스 머튼 번역)-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나이다

 

 

살다 살다, 정말이지 그렇게 못돼 처먹은 X은 내 평생 처음 봤다. 

바이런 케이티의 <4가지 질문>이란 책에 보면 내가 바로 위에 적은 이런 문장, 또는 불평이 진실인지 하나 하나 해체해 알아보는 작업(Works)을 하기 위해, 현재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해 최대한 유치찬란하고 옹졸하게 적어볼 것을 권한다. 그래야 ‘작업’ 후, 겪게 될 카타르시스, 해방감이 꽉 막혔던 게 뻥 뚫리는 것 만큼이나 시원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렁설렁 했다 하더라도 수행의 길로 접어든 짠밥이 있는데, 뭔가 갈등이 있다고 무작정 대상에 대해 욕부터 하진 않을 터이다. 난 정말 머리 싸매고 고민하며 먼저 나부터 돌아봤다. 알아차림의 사각지대라는 것도 있으니까… 도대체 내게 무슨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런 경험이 펼쳐지는 것일까. 

매일 방석 위에 앉아서도 고민은 계속된다. 도대체 왜…? 왜냐고 묻지 말아야지, 하는 깨달음이 와서 왜 대신 무엇인가를 물어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그 문제를 안고 고민하다 보니, 통찰이 찾아온다. 

 

무의식의 상처를 인정하고 표면의식으로 가져와 봐주면 상처는 치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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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모습을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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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볼 수 없다. 그녀의 못돼 처먹은 면은 곧 나의 못돼 처먹은 면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도저히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다. 내가 얼마나 착한 줄 알아? 나는 여러 증거들을 가져와 이를 증명하려 한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너 뭐하니? 지금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해체 작업 중이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착하다는 것을 증명해서 뭘 하려고 그래? 그냥 인정해봐, 한 번… “나, 못돼 처먹었어.” 인정하자. 

하지만 에고가 그리 만만히 물러서진 않는다. 정말 바리새인들처럼 끈질기게 자신의 의로움(Self-Righteousness)을 내세운다. 그리고 분별한다. 그녀는 못됐고 나는 착하다고.

그러다가 딱 한 번만 해보자.. 하는 심산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못된 건 나야. 내가 못됐어. 그래서 그런 면을 본 거야. 난 못됐어. 인정….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하다 보니 나의 못된 점을 수긍하게 된다. 그래, 그녀가 못됐어도 그걸 못됐다고 판단했다면 너 역시 못된 거지. 그리고 끊임없이 분별하잖아. 이래서 못됐다, 저래서 못됐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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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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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돼 처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못된 것을 봐줄 수가 없었고, 나의 밖에서 못돼 처먹은 X을 창조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나. 그러니 나는 나를 그렇게도 싫어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러던 중, 난 나와 내가 인식하는 세계를 분리하고 있는 내 착각과 환영을 철견했다. 어느 순간, 내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내가 모든 것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나였다. 이를 깨닫는 순간,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가만히 있으면서도 충만하고 고요하고 눈물이 흐를 만큼 행복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전했다.   

내가 인식하는 대상을 미워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미워하고 판단하는 행위, 나는 내 눈 닿는 모든 것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낸다.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물건들 모두…. 다 나다. 그러니 매 순간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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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은 생각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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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깨달음이 든 순간, 나는 방석 위에서 그녀를 향해 삼배를 올렸다. 그녀 역시 나의 깨달음을 위해 현현한 역행보살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살면서 부딪힐 때엔 여전히 고통스럽다. 분노하진 않지만 작은 투정이 고개를 밀고 나온다. “저건 아니지 않아?” 

이럴 때, <4가지 질문>은 정말 유효하다. “그 생각이 진실인가?” 나는 묻는다. 아니… 내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다. 생각은 진실하지 않다. 그리고 생각은 변한다. 그러니 진실하지 않은 한 생각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있는가? 없다. 됐네, 끝…. 

진짜? 진짜 다 됐을까? 그럴 리가… ㅎㅎㅎ. 에고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나는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부린다. 나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다. 그녀를 정말 못돼 처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적어도 10명은 데려올 수 있다. 

그러다가 또 정신 차린다. 진짜, 네 고집, 엄청나다. 다시 원점이야,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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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 역시 상처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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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싫은 사람을 없애는 마법의 기도는 감사와 사랑이다. 그런데 도저히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을 하기 힘들 때, 나는 그녀의 과거를 방문해 그녀의 상처를 만난다. 

그렇게 못돼 처먹은 현재의 성격을 형성하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까.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지 못하고 어린 그녀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상처는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좋은 재료이기도 하지만, 어떤 존재들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더욱 단단한 갑옷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한다. 즉,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도망가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적용된다. 그렇게 입은 상처는 없었던 듯 도망간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한 채, 밖의 대상에게 상처를 입힘으로써 자신이 받은 상처를 투사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상처를 받는다. 

나는 방석 위에 앉아 그녀의 성장기에 분명히 있었을 상처를 헤아린다. 내가 남들의 어린 시절을 보는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가 그녀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상처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그녀의 아픔을 헤아리다 보니 그녀의 아픔과 상처가 이해된다.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로 인해 눈물 흘리던 날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상처입은 영혼인 그녀가 안쓰럽다. 그래서 꼭 그녀를 안아주고 도닥여준다. 

이제 그녀가 못된 짓을 해도 내 눈앞에서 보이는 못된 짓만 보고 판단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래, 또 상처받은 영혼이 투정을 부리는 거구나… 내가 이해하고 사랑해줄께. 그리고 그렇게 투정을 부림으로써 내 마음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해주어 고마워… 

 

텅 빈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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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그녀의 삶을 살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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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정말 뻥 뚫리는 경험을 했다. 새벽 3시에 못을 박으며 큰 소리의 힙합 음악을 틀어대는 그녀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녀는 그녀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 반응하지 말고, 나 역시 내 삶을 살자.”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내 잠을 깨운 그녀에 대해 화가 났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내 삶을 살자. 소리에 대해 마음챙김해본다. 소리가 일어서 화가 나는가? 소리는 나를 화나게 할 수 없다. 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 그것은 소음이 아니다. 소음이라는 단어에는 듣는 이의 미묘한 저항이 숨어 있다. 새벽 3시에 힙합 음악을 크게 틀면 안 되는가? 안 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모든 것일 수 있게 허용한다고 매일 방석에 앉아서 반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 그 깨달음을 수행할 좋은 기회가 왔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일 수 있게 허용한다…. 

와!!!. 진정으로 새벽 3시에 울리는 커다란 음악이 나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음악을 튼 사람에 대해서도 밉다는 생각이 일지 않는다. 더불어 보너스 하나 더… May you be happy and peaceful.. 메따도 보낸다. 보내는 내가 더욱 평온하고 행복하다. 

 

못된 여성의 상징, 이라이자. 캔디 라는 만화영화에서 주인공 캔디를 못살게 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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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의 빈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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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빈 배>라는 시를 접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내가 빈 배가 되면 내가 편하고 다른 사람들도 화를 내지 않는다. 수행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가 인식하는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그렇게 행복은 점점 늘어 우주를 웃게 한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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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파란연꽃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21 텅빈배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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