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명상 >
부족해서 필요한
쓰임새를 위해
하나 됨을
바라지 말자
글 | 법현스님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
-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다투지 않음이 좋다고 생각하다보니 하나이면 다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 이른바 하나 됨이라는 좋을 듯한 말이다. 그럴까? 생각해보기로 한다.
예전에는 서로 다른 민족(異民族)들이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틀린(誤) 사람들이 모였다는 잘못된 표현을 하였다. 살갗의 색깔이 다르고, 눈동자의 빛깔이 다르며, 코의 높이가 다르게 생긴 것을 틀리게 생겼다고 보았다. 보는 자인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서 형성된 의식이며 그 의식의 표현이었다. 틀린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 보니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틀린(誤) 사람이 아니라 다른(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깨달음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라는 뜻에서 같은(同)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과학적으로는 105종 원소의 유기적 결합을 나름대로 한 모습이 각각의 존재이므로 구성요소가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正)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각자의 처지와 시각에서 다르게 보였던 것이 틀리게 느껴졌었으나 이제는 맞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어떤 것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다름의 존재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평화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주의 가장 작은 물질 또는 최초의 원인을 원(元)이라 한다. 당연히 가장 작고, 최초 원인이므로 그것을 하나라고 보는 것이 일원론(一元論)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가 아닌 두 개가 아닌가 하는 사고가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二元論)이다. 예를 들면 물질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불일불이론(不一不二論)이 나타났다. 이는 줄여서 불이론(不二論=non-dualism)이라 하기도 한다.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쓰임도 많다. 하지만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둘은 아니어도 셋이나 넷 또는 그 이상이라는 추론도 가능한 것이어서 단어 자체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불이(不二)라는 말도 불이(不異)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하나도 아니며 많은 것도 아니다’ 또는 ‘하나로 같지도 않고 많아서 다르지도 않다’는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다양한 근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이를 다원론(多元論)이라 한다. 이는 다민족, 다종교, 다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는 효용성이 큰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원(元) 자체를 가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주장한 바 있다. 어떤 근원을 가정하면 근본주의에 빠져서 다른 사상들과 다투기 쉽고 근원이 없다고 하는 무원(無元)이라야 평화로운 생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무원론(無元論)에 입각한 무원주의(無元主義)-amonism(無元主義) based on amonitheory(無元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무엇인가 쓰임새가 있다는 말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필요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부족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목이 마렵다면 몸 안에 수분이 모자라다는 것을 감각기관이 느껴서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화가 쓰임새가 있다면 화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화합이 필요하다면 이 사회에, 종교단체들 간에도 화합이 부족하다는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부족한 것들을 메워서 필요한 것을 없애고 충만해 넘치는 상태가 되겠는가?
화합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이 참 많으니 아마도 불교교단에도 화합이 필요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도 살펴보게 된다. 불교교단만이 아니라 조직을 이룬 곳은 어디나 그럴 것이다. 불교교단의 조직인 승가(samgha)는 1천 5백여 년 뒤 유럽의 이익분배조직인 길드(guild)와 비슷한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승가를 유지하는 좋은 원칙 가운데 하나가 육화경(六和敬)이라는 말이다.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를 화합시켜야 하는데 1)몸을 화합하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야 하고(身和同住) 2)입을 화합하기 위해서는 다투지 말아야 하고(口和無諍) 3)뜻을 화합하기 위해는 함께 기뻐해야 하고(意和同悅) 4)계를 화합하기 위해서는 같이 닦아야 하고(戒和同修),5)견해를 화합하기 위해서는 함께 이해해야 하며(見和同解),6)이익을 화합하기 위해서는 같이 나눠야 한다(利和同均)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마하박가(Mahavagga)』라는 불교 계율 서적에 꼬삼비 지역 비구들의 이견을 해소하는 과정이 나온다. 얼마나 사이가 갈라졌는지 부처님의 지도를 받고도 무려 2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다른 여러 가지 과정과 교훈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는 정황만을 전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의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 하는 말들 가운데서도 생각해볼 것들이 많다. 이런 저런 역사와 사회상황을 살피지 않고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피를 수혈하듯이 하는 경향들이 있다. 중국,티베트,일본 등 비슷한 대승불교권의 분위기와 방법론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남방 테라와다불교권의 분위기와 방법론을 받아들인다. 그 가운데서도 태국이나 스리랑카보다 미얀마의 수행경향을 받아들이려고들 한다. 미얀마에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는데 그 생각은 하지 못한다. 꽤 많은 이들이 수행하고 와서 묻는 말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왜 미얀마 다녀온 분들은 자기만 옳고 남들은 그르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이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이 잘못이다’라고 해주고 싶지만 나중에 깨닫도록 하기 위해 ‘진리가 여러 개라고 생각하면 그 쪽으로 가겠는가? 진리는 하나라고, 그 길만이 진리라고 생각해야 그 길로 가지 않겠는가?’라고 말해주곤 한다.
이는 비단 불교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각 종교교단 내에서도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전통과 신념과 교리체계가 다른 종교들 간의 대화와 화합이 어찌 쉬울 것인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 화합이요 평화라는 것을 생각하고 겸손하고 진지하게 작은 것이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종교 아닌 어느 종교라도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적인 종교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명과 무교의 영향일 것이다. 근본적 의미에서의 기독교(가톨릭),불교가 어디 있겠는가. 모두 한국화 된 기독교와 불교가 있을 뿐이다. 다른 표현으로 보면 습합(習合.acculturation)과 통섭(通涉.consilience)이라고 볼 수 있다. 습합은 ‘익숙해져 하나되다 ,익혀서 닮아가다, 익숙하고 하나되다’의 뜻이다. 통섭은 ‘통해서 건너다(사귀다), 통하고 건너다(사귀다)’의 뜻이다. 문화와 학문 또는 현상의 닮음과 교류를 나타내는 말이다.
한 종교의 근본사상에서 보면 문제일 수 있으나 종교간 대화와 사회통합 또는 평화유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자연스럽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다투지 않음이 좋다고 생각하다보니 하나이면 다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는 것이 있지만 이른바 하나 됨이라는 좋을 듯한 말 가운데 갈라지고 다투는 씨앗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름을 받아들일 때 끝에 가서는 같아지고 옳게 느껴지는 이치를 알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