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이야기의 샘터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릴 때 곧잘 어른들께 이바구, 곧 이야기를 졸랐다. 호롱불 밑에서 양말을 깁는 엄마에게도 졸랐고 한 아름 콩대를 안고 와 멍석 위에서 콩깍지를 까는 외할매에게도, 자전거를 타고 무슨 일로 다니러 온 동네 아재에게도 졸랐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 시간에 조금 기합(?)이 빠지면 교실에서 수업 중에 담임 샘에게도 얘기 해 달라고 졸랐는데 이렇듯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누가 처음 듣는 듯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내보이기만 하면 귀가 쫑긋해서 나머지 뒷얘기를 마저 해 달라고 졸라댔다. 돌이켜보니 내가 요만큼이라도 소견이 든 것은 성가시다 귀찮다 하며 끝까지 마다하지를 않고 지긋하게 귀동냥을 베풀어 주신 이분들의 공덕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어릴 때 들은 얘기의 태반은 도깨비나 귀신 얘기 아니면 범(호랑이라는 말은 나중 배웠다)이 나오는 온갖 얘기거나 여우 얘기였는가 싶다. 좀 더 자라 가면서는 그 밖에도 우렁각시 얘기라든지 한석봉이 엄마가 떡 써는 얘기라든지 여러 가지를 여기저기서 얻어들었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에밀레종 얘기처럼 불교스런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신통한 꿈에 얽힌 이야기도 많았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게 스님이 어느 처녀를 못 잊어 상사병에 걸렸다가 깨어나니 그게 다 허황한 꿈이더란 얘기인데 엄마한테서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귀 호사를 누릴 틈도 여유도 없이 학원으로 과외로 어디로 종일 뺑뺑이를 돌든지 기껏 틈이 좀 난다고 하더라도 스마트폰이나 게임기 들여다본다고 무아지경에 빠진다지만 옛날 아이들과 비교해서 누가 결국 더 똑똑해지고 슬기로워질지는 지나 봐야 알 것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의 샘, 다른 말로 설화(說話)의 샘터에서 놀면서 그런 향기로운 샘물을 제대로 마셔 보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이나 청소년, 청년들은 뭔가 정신의 자양소에 모자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게 내 노파심이다.
그런데 이런 점은 어른도 마찬가지이고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사실 통틀어 종교라고는 하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종교든 그 가르침의 대개가 다 설화요 이야기로 채워지는 것이 아닌가! 경전이라는 것도 달리 보면 어떤 특별한 이야기들의 묶음, 곧 설화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다 속된 말로 ‘구라’로 들린다. 그래선지 설교든 설법이든 사람들 모아 놓고 ‘썰 풀며(?)’ 사시는 분들은 싸잡아 ‘구라쟁이’ 취급을 당하기도 하는 게 요즘 세태다.
그런데 그리 욕하는 사람들도 실은 그 ‘구라’ 속에 진실이 있고 진리가 있으며 세상의 참모습이 있음은 잘 눈치채지 못한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불교에도 설화가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한국불교에도 설화가 많은데 그 오래되고 중요한 소스 가운데 으뜸은 고려 시대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1281년에 지으신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커서 알고 보니 내가 들은 상사병 스님 얘기도 원전이 이 <삼국유사>였다.
알다시피 우리의 살아남은 역사서 가운데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한발 앞서 1145년에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쌍벽을 이루는 것이 <삼국유사>다. 이름 그대로 <세 나라에서 남겨진 일들>, 곧 이야깃거리다. 여기에는 삼국시대와 그 이전의 한국 역사에 관한 아주 독특하고도 귀중하며 거의 유일한 기록들이 담겨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비록 모화사상에 젖은 나머지 우리 고대사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깎아 없애고 뒤틀어 버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사라진 많았던 우리의 역사서 가운데 이것만이 살아남았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그야말로 깜깜절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절실히, 만약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열네 수의 알토란 같은 향가와 더불어 우리는 귀중하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야기의 샘을 잃어버린 나머지 정신과 정서, 그리고 자존과 정체성의 결핍으로 일종의 미숙아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스님의 크나큰 은공을 잘 모르며 불자들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조금만 더 깊이 이 <삼국유사>의 내용을 한 번 듵어 보기로 하겠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되어 있는데 역사서의 체제상 분류로는 대체로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된 역사서 형식인 기전체(紀傳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맨 앞이 왕력(王曆) 1편인데 연대표이고 그 다음(2편부터 9편까지) 기이(紀異)편부터 마지막 효선(孝善)편까지 모조리 설화집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설화가 불교와 얽힌 이야기이거나 불교적으로 덧칠해진 이야기들이다.
제1권:
왕력(王曆) 제1: 중국의 전한 시대 이후, 그리고 신라, 고려(고구려), 백제, 가락국(가야)을 비롯하여 후삼국 각국 왕들의 연대표가 실려 있다.
기이(紀異) 제1: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삼국 통일 하기 전의 신라 때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단군신화 이야기가 나온다. 배달겨레의 밑뿌리 생각을 보여 준다.
제2권:
기이(紀異) 제2: 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이야기와 가락국의 이야기들이다. 세상의 거칠고 사나운 ‘온갖 물결 잠재우는 피리’인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3권:
흥법(興法) 제3: 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들인데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어떻게 사람들이 본래부터 하고 있던 생각들과 부딪치며 어떻게 녹아들고 있었던가를 보여 준다. 삼국에 불교를 전한 전법승들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탑상(塔像) 제4: 절터와 탑, 불상 등에 얽힌 전설과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들이다. 무속적인 본바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을 불교가 어떻게 바꾸어 가면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황룡사 구층탑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제4권:
의해(義解) 제5: 고승들의 행적들이 나오는데 불교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무르익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효 스님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제5권:
신주(神呪) 제6: 기적을 일으킨 스님들의 이야기다.
감통(感通) 제7: 불교의 기적, 영험록이다.
피은(避隱) 제8: 은둔한 스님들의 이야기
효선(孝善) 제9: 효행과 선행, 미담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보듯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은 목적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 뒤편에 흐르며 묻혀 버리기 쉬운 정신세계의 흐름을 간추림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교화하고 통합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삼국유사>는 전해 오는 불교 이야기들을 비롯한 구전 설화들을 모아 간추려 기록하였으며 그 결과 우리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소재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이런 이야기들을 실은 살아남은 최초의 기록이라는 데에 큰 값어치가 있다.
우리가 이 글의 첫머리에 이야기한 상사병 난 스님 - 신라의 조신(調信) 스님 - 이야기는 위에 보인 <삼국유사> 제3권 탑상편에 실린 꿈 이야기다. 우리 옛 문헌에서 일장춘몽(一場春夢) 속의 허무한 인생살이를 그린 작품으로는 원조 격이니, 중국에 <한단지몽(邯鄲之夢)>, <남가일몽(南柯一夢)> 이야기가 있다면 한국에는 <조신의 꿈> 이야기가 있다 하겠다. 뒷날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가 이 작품을 대단히 좋아해서 중편소설 <꿈>을 썼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어쩌면 춘원의 이 소설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이 <조신의 꿈> 이야기의 기본 얼개는 그 뒤에도 그림자를 남겼다. 국문학사상 전기체(傳奇體) 소설의 효시라 일컫는 작품인 조선 시대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이라든가 그 뒤를 이은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의 <구운몽(九雲夢)>에도 이러한 플롯이 얼마만큼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 조신 스님 이야기는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면서도 세속적 욕망에 매우 충실하여 그저 형식적 교훈만 드러내 보이는 것 같은 후대의 소설과는 달리 불교적인 주제를 잘 표현한 비극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럼 이제 뜸 그만 들이고 <조신의 꿈>이 어떤 이야기인지, 어릴 때 귀보시 받은 조그만 갚음으로 글보시를 베풀려 한다. 줄거리를 아시는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복습하시는 셈 치시기 바란다.
신라 때에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조신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절은 고려 시대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불렸다고 한다. 후에 폐사가 되어 잊혔으나 2012년에 강원도 영월군에서 터를 발굴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 당시에 이 절은 지금의 강릉인 명주(溟洲)에 절의 재산인 장원(莊園), 곧 논밭을 갖고 있어서 조신이라는 이 젊은 스님을 보내 관리를 하게 하였다는데,
일에 동티가 나려고 그랬는지 조신 스님은 당시 명주의 태수(太守, 地方官)였던 김흔(金昕, 803-849 기록에 있는 인물이다)의 딸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스님이 그만 이 처녀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단 사연이다. 보통인 경우에는 한 쪽이 한 동안 가슴앓이를 하다 어찌어찌 수습이 되곤 하는데 그랬다면 삼국유사에 그런 이름이 오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조신 스님은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그 여인과 맺어지게 해 주십사 하고 남몰래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는 이야기다. 농장 관리는 어찌 돼 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한 결과가 왔는데 아뿔싸! 둘이 연분이 맺어지기는커녕 그 처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문이었다. 이에 조신은 밤중에 불당에 들어가 관세음보살 앞에 엎디어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는데…, 여기서부터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다름 아닌 그 낭자가, 그토록 애타게 사모하던 그 처녀가 제 발로 절에 나타나 불당 문을 열고 조신을 찾아와 눈앞에 서 있지를 않은가!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낭자 가라사대, 자기 또한 우연히 마주친 조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중 부모가 정한 혼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임을 찾아 집을 나왔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한 쌍은 농장이고 뭐고 다 내버려 두고는 그 길로 야반도주, 줄행랑을 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한 이불을 쓰는 신랑각시가 되었다는데…,
이 둘은 정분이 너무 좋아 그로부터 마흔 해를 찰떡궁합으로 붙어살면서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으나 문제는 살림살이가, 요새 말로 경제가 지독히도 안 받쳐 주었다는 말씀이다. 살림은 날이 갈수록 쪼들리고 쪼들리어 마지막 남은 오막살이마저 잃고 끼니를 잘 잇지 못하더니 마침내 길거리로 나가 빌어먹으며 떠돌아 다닌 지가 열 해가 다 되었단다.
그러다 어느 날 밥을 빌으러 게고개[蟹峴嶺]를 넘어가는데 열다섯 살 먹은 큰아이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자 부부는 대성통곡을 하며 아이 주검을 길옆에 묻었것다. 그 뒤 남은 식솔을 이끌고 우곡현(羽曲縣)으로 들어가 풀을 엮어 집으로 삼고 끼니는 날마다 구걸로 겨우겨우 때웠다. 이제 영감할멈은 늙어서 제 몸 움직이기도 힘이 드는데 어느 날 열 살 된 딸이 마을에서 밥을 빌다가 개에게 발목이 물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는 이 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며 눈물을 흘리는데 이윽고 아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단다. 말인즉슨,
"이 몸이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아름답고 젊었으며 입성도 깨끗했지요. 콩 한 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살아온 세월이 벌써 쉰 해이니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하지만 병은 깊어 가는데 굶주리며 추위에 떨기를 피할 수가 없으니 이제는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제대로 빌어먹지도 못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꼴을 당해도 돌보지도 못하는데 언제 우리가 부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얼굴이며 밝은 웃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언약도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가지처럼 지나갔어요. 이제 와 돌이키니 예전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뿌리였네요. 다 함께 굶어죽기보다는 서로 헤어져 상대방을 그리워함만 못할 거에요. 좋다고 취하고 나쁘다고 버림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지만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도 명이 따르는 것이지요. 바라건대, 이제 그만 헤어져요, 우리."
아이고 길게도 말했네. 한마디로 하자면 이혼하자는 것이요 덧붙이자면 예전의 기쁨이 지금의 괴로움의 뿌리라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것 좀 보소. 조신은 아내의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거나 까무러치고 기절한 게 아니라 오히려 환호작약, 두 손 쳐들어 기뻐하며 각자 아이들을 둘씩 공평하게 갈라서 데리고 헤어지기로 즉각 합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어려운 문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하였던가? 아니면 속된 말로 사랑보다 목숨보다 무섭고 강한 것이 것이 돈이요 쩐인가 보다. 요즘은 어떠한가? 일례로 얼마전인 아이엠에프 때, 이렇게 가슴 아팠지만 다른 한편 그만큼이나 더 홀가분했던(?) 갈라섬은 이 사바세상에 얼마나 많았을까?
떠나기 전에 아내가 또 한 말씀 하신다. 역시나 위기에는 여자가 오히려 더 결단력이 있고 현실적이다.
"저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그런데 잠깐! 이렇게 두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조신이 그만 꿈에서 깨어나 버린 거다. 그리고 희뿌옇게 밝아 오는 새벽 어스름 속에서 조신이 제 몸을 추슬러 보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죄다 새하얗게 세어 버렸지 않은가! 그야말로 ‘한바탕 봄꿈[一場春夢]’이었다. 이제 조신은 마치 한평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어 버린 듯 세상사에 뜻이 사라지고 재물에도 씻은듯이 관심이 없어졌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조신은 지난 꿈속에서 큰아이를 묻었던 곳을 찾아가 땅을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와 이를 물에 씻어 가까운 절에 모셔앉혔다. 그러고는 세달사로 돌아와 소임을 내려놓은 뒤 새로이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며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인데 춘원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에 의해 몇 번 각색이 되었다. TV 문학관에서는 시대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바꾸어 방송한 적도 있다. 그리고 영화감독 신상옥은 이광수의 소설 <꿈>을 아주 좋아해서 두 차례나 영화로 찍었는데 1954년에는 최은희와 황남이 주연을 했고 1967년에는 신영균과 김혜정이었다. 배창호 감독도 1990년에 이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안성기와 황신혜에게 주연을 맡겼다. 이 영화에서는 꿈속에서 김흔의 딸이 스스로 조신을 찾아온 것과 달리 조신이 처녀를 겁탈해 아내로 삼았고 약혼자인 화랑이 조신 부부를 계속 추적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게 더 박진감이 있어 보여서였을까?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명주 태수 김흔이 역사에 기록된 실물인 점이 좀 의아스럽다. 이를 보면 누군가가 <조신의 꿈> 이야기를 지어냈거나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꾸며내었을 수 있겠다. 그야 어찌됐건 일연 스님이 치열한 수행 중에도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모아 후세에 남기신 덕분에 우리는 여러 버전의 조신도 만나 보고 그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터에 둘러앉아 결코 가볍지 않은 즐거움도 깨달음도 맛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사랑이 끝내 밥그릇을 뛰어넘어 먹고삶을 이겨내지 못함이 가슴을 짓누르누나. 이 세상의 애틋하고 아리따운 남녀들이여, 그럴 언저리에 내가 어떻게 해 내고 도울 일이 이리도 없음에, 이 밤 너나 없는 객창의 한 나그네는 실없는 시 한 수를 던지고 만다.
조신의 꿈
관음의 보살핌인가 부처의 영험인가
엎드려 우는 바닥에 다가서는 두 발끝
낭자여 이리 오소라 즈려밟고 오소라
마흔 해 정분에도 쓰라린 인생살이
한 아이 굶어 죽고 또 한 아이 개에 물려
밥 빌어 목숨 이은 지 열 해가 더해지네
늙은 몸 이제 헤어져 남쪽으로 가세요
이윽고 살 가르듯 이승의 연 자르는 날
어느 결 깨어나 보니 백발노인 되었네
인정이 그러한가 세파 또한 그러한가
잠들이고 잠 깨우신 관음의 뜻 클지언정
일연이 아니었더면 이 밤 어이 아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