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23]
부처: “모양으로 나를 보려하지 말라"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세 번째 사구게 (금강경 제26분)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는 곧 삿된 도를 행하는 자라
여래를 길이 볼 수 없으니라.
다음은 <금강경>에서 이에 대해 써진 것을 골라서 적어보았다.
제5분; “무릇 있는바 모든 현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 여기서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다고 말했다. 부처의 몸뚱이도 허망하다. 부처의 몸뚱이도 공(空)이다. 부처의 육신을 공으로 보아야 하지 여래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제10분;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맞부딪침과 어떤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라.”
= 부처의 몸매에 머물지 말아야 마음이 나온다는 말이다.
제13분; 수보리가 말씀하셨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서른 두 가지의 거룩한 상호는 곧 상호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서른 두 가지의 거룩한 상호일 뿐입니다.”
= 32상은 고정 불변하는 상호가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거룩한 상호라는 말이다.
제20분; 수보리가 말씀하신다. “세존이시여,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으로서 반드시 여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은 곧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뿐이기 때문입니다.”
=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으로서 여래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이름이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또한 여래를 불 수 가 있는 것이다.
제26분; 수보리가 사뢰었다. “서른 두 가지 거룩함 몸매로서 여래를 뵈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수보리는 다시 아뢰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서른 두 가지 거룩한 몸매로써 여래를 뵈올 수 없사옵니다.”
= 중도사상은, 32상이 부처이건 혹은 아니건,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몸매로서 부처를 보려 하려는 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자’이지만, 또한 몸매로서 부처를 보려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삿된 도를 행하는 자’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의 업에서 얻어진 것들;
청담스님은 <금강경 강좌>(277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는 32상 80종호가 있다. 부처님은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보살만행(萬行)을 닦으실 적에 오직 중생만을 위하여 나(부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었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부처)가 가진 돈이 없을 때는 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약도 사 주고 먹을 것도 마련해 주곤 했다. 누가 당신(부처) 팔이나 눈을 약으로 쓰겠다고 하면 조금도 주저 없이 팔도 잘라 주고 눈을 빼주었다.”
여기서 청담스님은 부처가 그냥 쉽게 32상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전생에, 눈을 달라면 눈을 빼주었고, 팔을 달라면 팔을 빼서 주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생을 위해서 보시했었기에, 그 결과로 오늘날 32상을 갖고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첨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생김새, 우리의 마음가짐, 우리의 건강, 우리의 총명, 우리의 수명, 우리의 운명 등은, 우리가 전생에 살았을 때 우리 스스로가 쌓아놓은 업(karma)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야훼)이 나를, 그리고 모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다르다. ‘나’를 만든 사람은 바로 ‘나’인 것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업을 짓는다. ‘내’가 지은 업이 다음 세상에 ‘나’ 자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음 세상에 총명하고 건강하고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나고 싶으면, 제일 먼저 행해야 할 것은 5계를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나’를 만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기에, 내가 바로 ‘나의 하느님’인 것이다.
불상을 붙태우다; 천연(단하)스님
다음은 <달마에서 경허까지>(박영규 지음)에서 따온 글이다.
겨울이었다. 추운 날이었다.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천연은 몸을 기댈 곳을 찾아가 마침내 절을 발견했다. 혜림사라는 절이었다. 절 안은 조용했다. 천연은 땔감을 찾았다. 좀처럼 땔감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법당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법당은 텅 비었다. 법당 한 가운데에 모셔놓은 목불을 안고 나왔다. 도끼로 탁탁 쪼개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몇 명의 중이 모닥불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다가 한 명이 질겁하면서 소리쳤다
“아니, 이 미친놈이 부처님을 쪼개서 불을 피워!”
갑자가 절간이 소란스러워졌다.
법당에 있어야 할 목불이 없어진 것을 알고 부랴부랴 쫓아온 노승 한 분이 소리쳤다.
그러자 천연은 태연하게 재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보면 모르겠소? 지금 사리를 찾는 중이오.”
뭐? 노승의 얼굴에 핏기가 번져갔다.
“야, 미친놈아, 나무토막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더냐?”
천연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됐잖습니까?”
어허!
노승은 말문이 탁 막혔다. 그 옆에서 천연은 여전히 천연덕스런 얼굴로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리고 몰려온 대중 역시 모닥불 주위에 둘러서서 히히닥거리며 군불에 몸을 녹였다. 오랜 만에 조용한 절간에 웃음꽃이 피고 있었다.
껍데기에 현혹되지 말라. 껍데기는 모두 자기 우상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본질을 바로 보는 데에 있다. 천연은 그렇게 항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껍데기에 절하기를 좋아한다. 상징은 단지 상징으로 머물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인데, 상징을 전부로 생각하고 그것을 맹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상이 있어야 절이다:
위의 천연 스님 이야기는, 물론 사실 이야기이지만, 궤변 같은 이야기이다. 천연 스님은 워낙 추워서, 땔감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법당에 모셔진 목불을 모닥불로 태웠다. 그런데 노승이 화가 나서 달라대 드니까, 사리를 찾는 시늉을 하면서, 사리가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땔감에 불과하다고 변명을 하고 있던 것이다. 노승이 힘이 약해서, 젊은 천연을 때려 줄 수가 없었겠지만, 만약 노승이 힘이 센 스님이었다면 천연스님을 치고 때려주었을 것이다.
절에는 석불이든 목불이든, 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이 있어야 절인 것이다. 불상이 없으면 절이 아니 된다. 불상은 부처를 상징한다. 절에 모셔진 불상은 부처이다. 우리가 절에 가서 불상에 큰 절을 하면서 불상에 예배를 하고 있다. 불상이 여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춥다고, 깡패나 산도둑도 아니면서, 단하스님은 스님으로서 목불을 조각조각 잘라서 불을 피웠던 것이다.
목불을 모닥불로 태우고 있었을 때, 그 절, 혜림사의 주지는 얼마나 마음 아파했었을까? 주지는 다시 목불을 구입해서 절에다 모셔놓아야 하는 것이다. 불상 없는 절은 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절에 오는 이유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상에 절하러 오는 것이다.
목불은 그냥 목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래를 상징하는 목불로서 여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목불이 여래가 아닐 수도 있지만, 또한 여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중도사상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임제록>(선림고경총서 12)
임제스님(?-867)은 “진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나는 모든 법의 빈 모습을 보기 때문이니, 변화하여 나타나면 있고 변화하여 나타나니 않으면 없다.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며 만법은 다 식(識)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꿈같고 허깨비 같은 허공 꽃을 하필 애써 붙들려 하는가’”라고 말하였다.
계속해서, 임제스님은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 한다면 남에게 끄달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 자유자재해 진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임제스님은 부처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부처의 몸뚱이는 법(法)이 아니다. 부처의 육신은 텅 빈 공이다. 부처의 육신을 보고서 부처라고 믿어버리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안 되는 것이다. 부처에 집착하면 “머무름 없이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다. 마음에 아무런 집착이 없어야 도를 깨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법은 뗏목과 같은 것:
제6분 “‘너희들 비구는 내가 말한바 법이 뗏목과 같은 줄을 알라.’ 하였으니 진리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라.”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피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결코 뗏목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뗏목은 우리가 물을 건너 저편으로 갈 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피안에 도착하기 전에 뗏목을 버리면 영영 피안에 도착할 수는 없다. 도를 다 깨치고 난 후, 견성(見性)을 한 후에 뗏목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견성을 한 사람들은 저절로 뗏목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위에서 임제스님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라고 말했는데, 물론 부처나 나한데 집착하지 말고, 자기 자신 스스로가 도를 닦아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견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견성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부처와 조사와 나한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분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부처는 도를 깨친 후, 45년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설법을 하셨다. 그런데 부처는 “나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는 말로 표현해 낼 수가 없다. 45년 동안 설법을 했었지만, 말로 설법을 했었기에, 말로서 진리를 표현해 낼 수가 없으니까, 부처는 지난 45년 동안 설법을 한 것은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한 마디 말도 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통한 일은, 한 마디의 진리도 말하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부처의 설법을 듣고서, 사리불, 목련, 가섭, 등 수많은 스님들이 다 견성 대오(大悟)했었다는 점이다. 진리 아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수많은 스님들이 크게 깨쳤다는 점이다. 그러니 부처의 몸매를 보고 깨칠 수도 있고, 혹은 깨치지 못할 수도 있다.
태어날 때 32상을 갖고 태어나다:
싯달타가 태어났을 때 슛도다나는 기쁨에 넘쳤다. 제일 먼저 나라에서 이름 높은 예언자 아시타 선인을 찾았다. 아시타는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그 골상을 살펴보았다. “이 아이는 ‘서른두 가지 몸매’와 ‘여든 가지 미묘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세속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어 온 천하를 통치할 것입니다. 세속을 떠나 도를 닦으면 반드시 큰 도를 깨달아 ‘부처’가 되어 널리 중생을 건질 것입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볼 게 있다. 싣달타의 갓 태어난 얼굴에서 32상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상이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얼굴의 모양새는 살짝 변해가고, 32상은 변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얼굴이나 몸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싣달타가 20세가 되었어도 그 32상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36세 도를 깨쳐서 부처가 되셨다. 부처가 된 그 얼굴에도 32상은 그대로 갖고 있었다. 부처가 70 그리고 80이 되었어도, 얼굴에 주름이 많이 끼었어도, 그래도 그 32상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갓 태어났을 때도, 늙은 후에도, 그리고 열반에 들기 바로 전 까지도 부처는 32상을 항상 몸에 지니고 계셨다는 점이다.
32상은 부처가 갖고 계신 상(相)이다. 부처의 육신을 보면, 32상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부처는,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것은 바로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나무라신다. 그런데 도 깨침이란, 부처의 몸매를 봄으로 해서 깨쳐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수행 정진해야 깨쳐지는 것이다.
청담스님 강설
부처님이 “32상으로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수보리는 “볼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일체법이 다 불법인데 왜 32상으로 부처님을 보지 못하겠습니까? 32상을 껍질로만 보니까 부처님을 못 보는 것이지, 32상이 즉시 불법(佛法)인 도리로 보면 곧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천만억겁을 두고 겉으로만 보고 겉만 알기 때문에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부처께서 “전륜성왕도 32상을 갖추었는데, 그러면 그도 곧 여래이겠구나.”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때 수보리 존자는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뜻을 아는 것으로서는 32상으로 부처님을 뵐 수가 없사옵니다.”하고 대답했다. 수보리는, 앞에서 말한 말을 뒤집어서 수정합니다. 이때에 수보리존자님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란 곧 32상의 껍질만 보고서 부처를 볼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대로 얼른 받아서 먼저의 말을 수정했던 것입니다.
무비스님의 강설:
금강경제5분; “세존이시여, 육신으로써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육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육신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여래, 즉 진리에서 오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리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마치 오랜 세월 함께한 부부가 어느 날 “당신 내 얼굴 보고 결혼했어?” 라고 묻는 말처럼, “자네 내 얼굴 보고 부처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수보리가 아니라며 펄쩍 뜁니다. 그런데 사실 거룩한 32상 80종호를 지니신 부처님을 보고 부처로 여기지 말라고 하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몸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만일 모습으로 여래를 본다면 삿된 도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진정한 모습은 형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설법을 잘하는 음성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래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모습을 나타내고 설법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들도 얼굴 모습과 말솜씨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지혜가 뛰어나면서도 어눌한 사람이 있고, 말솜씨는 번지르르 한데 속이 텅 빈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부처님께서는 살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라고 하든지 부처님의 고귀한 인생이 무르녹아 있는 음성을 듣고 부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고 미신을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 역시 상(相)이기 때문입니다. 상을 걷어내고 상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상에 미혹되지 않아야 진짜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만 보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진아(眞我)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 지극한 행복, 무량대복, 한량없는 신통을 보는 것입니다. 상(相)을 떨치고 보면 이 모습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참으로 부처님과 금강경과의 인연은 큰 행복이고 큰 재산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금강경 설법 (양미성·김도원 옮김)
고단한 삶속에서 32상을 갖추신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해지며 안정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명상법을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에게 보다 깊은 수행을 할 것과 32상을 벗어나 부처님을 명상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무리하게 붙든다면 그분은 질식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는 32상으로 부처님을 떠올릴 수도, 심지어 꿈속에서 부처님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가 치유된 다음에는 이러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나 생로병사, 태어나고 병들고 늙어가고 죽는 것에서 부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해탈함은 집착함과 똑같은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며, 깨달음 역시 무지함과 똑같은 본질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공허한 허공 속이 아니라, 바로 이 대지 위에 깨달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움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납니다. 번뇌와 고통이 없이는 부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위의 경문은 32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32상을 갖춘 부처님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요함과 평화로움과 행복이라는 수행의 열매는 항상 존재하지만, 집착하는 마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경이로운 실체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끝맺음
여래의 몸매로서 혹은 음성으로서 여래를 찾으려하면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 되겠지만, 또한 여래의 몸매나 음성을 통해서 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몸매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견성하기 전까지는 뗏목을 버려서는 안 된다. 여래의 몸매나 음성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에, 손가락이 지지한 대로 수도정진을 해가면 된다. 견성하기 전까지는 그 손가락을 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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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금바위 작성시간 22.12.11 법을 밝히려면 공과 성과 상을 밝혀주어야 하는데
한띠끌을 바로 보면 부처=법신 보신 화신 삼보
법신불=보신불=화신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증득=불성 성취=삼취정계 실천
한띠끌을 바로 못 보면 중생=탐진치가 나온다=범부중생
공성을 통하여 무념에 이르고
무념에 이르러 광명세계 깨닫고
광명으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보리살타입니다
보리살타가 된후 일대인의 대자재경 만덕 보살-묘각후에 성불을
논 하여야 하는것 아닌가요?
견성은 시작이요=선오
신증심오=만덕보살=후수=광명신
만덕 보살님들은 부처님의 부촉때문에
성불하시지 않고 보살님으로 계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