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진정한 삼귀의
글 | 스텔라 박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잡고 자주 절에 다녔다고 해서,
부처님 전에 온갖 공양물을 올려놓고 빌거나,
조상님을 위해 염불 잘하는 스님을 모셔놓고 재를 화려하게
지낸다고 해서 진정한 불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삼귀의’는 일반 재가불자는 물론 출가자들에게 있어서도
부처님 제자로서의 첫 번째 필수요건이 됩니다.
어린 자식이 부모님을 의지하듯,
학생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듯,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믿고 따르듯,
부처님의 제자들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 빤냐완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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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에 절 하는 것에 대한 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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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종교적 삶의 시작이 기독교였다는 것은 지난 호의 마음 공부에서도 밝혔었다. 한 가지 빠졌던 것은 중학교 시절, 중고등부 성가대 반주자이기도 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갔었던 게 기억난다. 어쩌면 그렇게도 그 시절의 기억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러다 보니 어느 틈에 내 내면에는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 즉 우상 숭배에 대해 극혐의 산냐(상)가 형성돼 있었고, 향 냄새며 목탁 소리에 대해서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커다란 불상을 앞에 두고 절을 하는 것을 볼 때면 불교가 정말 미개한 종교라는 어줍잖은 판단을 내리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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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에센스, 삼귀의(三歸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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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내가 이제 절에 가면 불상 앞에서 정성껏 삼배를 올리면서 마음 속 목소리로는 삼귀의(三歸依)를 되뇌인다.
한국 사찰에 가면 예불을 올릴 때 삼귀의를 노래로 하기도 한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렇게 번역된 가사로 삼귀의를 노래할 때 느꼈던 것은 변질된 기독교나 불교나 정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대신 부처님, 그리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 대신 가르침, 그리고 하나님의 몸 된 교회 대신 스님들께 귀의하겠다는 것이니 그게 뭔 차이인가,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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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歸依)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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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귀의라는 표현은 영 현실감이 떨어져, 대충은 알겠으나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가 다가오질 않았다. ‘귀의(歸依)’의 사전적 정의는 “돌아가 몸과 마음을 의지하여 구원을 청하다,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다” 이다.
히브리어로 읽는 구약, 그리고 그리스어로 보는 신약은 번역본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삼귀의(Tisaraṇa) 역시 팔리어로 읽어보면 확실히 체감온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팔리어의 영어 번역을 보면 피난처(Refuge)라는 표현이 나온다.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나는 붓다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나는 담마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Saṅghaṃ saraṇaṃ gacchāmi 나는 상가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피난처란 재난이나 위험을 피하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의미한다. 붓다, 담마, 상가가 아닌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나를 진정으로 보호할 수도 없는 것이란 얘기다. 그런데 나는 과연 진정 그렇게 여기고 있는가, 돌아본다. 혹시 집과 옷과 먹을 것(의식주)을 살 수 있는 돈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다른 인간 관계와 생각을 피난처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안전한 피난처에 있을 경우 우리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이완할 수 있게 된다. 저항도 없고, 반대 방향의 저항인 탐착도 사라진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나와 내가 인식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상에 대한 아무런 산냐 없이, 나라고 믿고 있던 것의 실상인 ‘공’의 상태가 세상이라 믿고 있던 ‘공’의 상태와 하나가 된다. 그야말로 대자유이다.
서너 곳의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나름대로 불법승(佛·法·僧) 삼보에의 귀의를 해석하여 세 번 절을 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고통을 벗어나 지속가능한 행복에 이르신 그 분, 붓다께 귀의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수행하는 공동체에 귀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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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삼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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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최근, 무엇이 불(佛)이고 무엇이 법(法)인지, 그리고 무엇이 승(僧)인지를 다시금 깊게 사유하게 되었다.
첫번째 보배인 불(佛)은 대부분 부처님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어느날 내게는 불(佛)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2500년 전 태어나 보리수 나무 아래서 해탈 열반에 든 인류의 스승, 그분 역사적 인물 붓다를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은 불교를 여느 종교와 별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불(佛, 붓다)이란 무지로부터 벗어난 상태 또는 존재(라고 할 것도 없는)를 의미하니, 모든 것이 가능하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공의 상태, 적멸에 다름 아닐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여러 칭호 가운데 하나는 타타가타 즉 여래이다. 생성된 모든 것이 머무는 바 없이 오고 가도록 허용하는 상태 또는 존재가 바로 불(佛)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즉 모든 산냐(상)는 형성된 것이니,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인연 조건이 맞으면 생성될 뿐, 실체는 없음이니 불은 아무 것도 없음이며 아무 것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즉 공이다.
이는 서구의 영성가들이 일컫는 의식(Awareness)과도 결을 같이 한다. 모든 경험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배경이 되어주는 의식, 붙들고 있는 산냐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자각의 빛, 나의 참된 성품이 바로 불(佛)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법(法, 담마)은 붓다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연기되어 생성되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붓다의 가르침은 연기법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연기의 법칙으로 생겨났다 소멸하는 것이 바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 전체, 즉 법(法)인 것이다.
그래서 법(法)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드러나는 삶이라는 진실, 현존이다. 현재의 경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던 오래된 습관을 내려놓고 완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은 법(法), 즉 현재의 경험을 향한 탐진치의 소멸로 이어진다. 법(法)의 짝은 불(佛), 즉 산냐 없는 순수 의식을 배경으로 현재의 경험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공이면서 법이고, 색과 다르지 않다. 쓰고 보니 반야심경의 한구절 그대로이다.
그러니 세상은 있는 그대로 여여하다. 나 하나만 형성된 산냐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으면 만사 오케이다.
삼보의 마지막인 승(僧)은 상가, 즉 수행 공동체를 일컫는다고들 해석한다. 하지만 공동체는 개개인들로부터 시작되는 것, 즉 나 하나 하나가 바로 승(僧), 즉 상가인 것이다. 상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바로 수행자인 나 자신과 연결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당신은 당신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가. 정신줄 놓고 살던 시절 나는 나와 연결돼 있지 않았었다. 몸은 이곳에 있다만 마음은 천길 만길을 헤매이느라 몸과 단절돼 있기 일쑤였다.
수행자인 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보통 나를 실제의 나보다 과대평가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믿을 때, 현재의 나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서 나 자신을 들들 볶게 된다. 나를 실제의 나보다 과소평가할 때, 나는 늘 주눅들어 있었다. 둘다 고통을 결과한다.
그러니 진정으로 상가에 귀의하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게 돌아가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게는 산냐가 없다. 진정으로 아상이 타파되는 순간,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사라진다. 그럴 때만이 함께 수행하는 도반들로 이뤄진 상가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귀의할 수 있게 된다. 산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존재로서 인지하고 허용하는 경험은 사랑에 다름 아니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이 활짝 열리고 행복한 느낌이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미묘하게 떨리며 추는 춤이 보이는 것처럼 옆에 있는 도반이 어떤 감정 상태를 지나가고 있는지도 헤아려진다. 그리고 결국 그 역시 내 인식의 우주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다시금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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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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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삼귀의(三歸依)의 순서를 불, 법, 승(佛·法·僧) 으로 삼았을까. 어쩌면 보통 사람들의 삶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돌아가야 할 귀의처는 승(僧) 이 아닐까. 나 자신에게로 귀의하고, 내 주변 수행자들의 공동체에 귀의하는 순간 우리는 상을 타파한, 진정한 사랑과 허용의 상태, 즉 공의 상태가 되고, 그로 인해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존인 법(法)에 대해서도 저항 없는 공의 상태가 된다. 그렇게 양쪽 저울의 눈금이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한 평형을 이룰 때 우리는 불(佛), 즉 붓다의 상태에 이른다. 우리는 붓다 그 자체이다. 그렇게 우리는 순수의식 또는 자각의 상태에 머문다.
산스크리트어 만트라 가운데에도 불법승(佛·法·僧)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치트, 사트 아난다이다. 치트는 근원, 의식, 자각을 의미한다. 사트는 살아 있는 실상, 궁극적 진리와 실상을, 그리고 아난다는 사랑과 환희를 뜻한다. 치트, 사트, 아난다를 언어 음절에 집착하여 소리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진정 그 상태가 될 때 우리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있는 그대로 열반이다.
이제 삼귀의를 외울 때는 이러한 바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긴다.
나는 붓다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 산냐를 완전히 내려놓고 공성에 머뭅니다.
나는 담마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 지금 바로 여기에서 경험하는 삶에 완전히 항복합니다.
나는 상가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 나 자신과 수행 공동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합니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