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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7월호] 무원(無元)의 원융선사 닮아보자 1 / 법현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1.14|조회수47 목록 댓글 0

< 이달의 명상 >

 

 

 

무원(無元)의
원융선사 닮아보자 1

 

 

 

 

 

 

 

글 | 법현스님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
-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태고스님은 태고종의 종조요 한국불교의 종조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고스님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다. 특히 조계종과의 분규 속에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느라 법맥에 관한 연구가 많다. 
태고스님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태고스님은 한국불교의 중흥조이고 조계종의 시조가 된다는 견해가 있다. 법통은 중국 5가7종선의 하나인 임제종의 법맥을 이었다. 이 견해는 광해군 때 서산(西山:1520~1604)대사의 제자 편양언기(鞭羊彦機:),중관해안(中觀海眼) 등에 의해 제기되어 불교계의 공식견해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태고보우는 중흥조이지만 중국에 가서 석옥청공스님의 지도를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한국고려에서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법계를 중국 임제종에 댈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한국 가지산문의 도의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다른 견해로는 중흥조가 태고보우가 아니라 간화선을 도입하여 선종을 확실하게 자리잡게 한 보조국사를 중흥조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당연히 종조 또한 보조지눌국사를 종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대한불교조계종 건설초기의 이론이다. 이 재열,이 종익 등이 주장했다.
아주 다른 견해로는 고려말의 타락한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산속에 숨어 수행만 한 것이 아니라 왕궁에도 나아가고 각종 종무행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편조신돈과의 다툼에도 물고물리는 접전을 벌인 인물로 정치적인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의 두 가지는 긍정적인 평가이고 뒤의 두 가지는 부정적인 평가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객관적인 평가를 하려면 자료와 방법을 바로 해야 평가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다.태고에 관한 자료는 제자들이 편집한 법어집(어록), 행장, 탑비명이 1차 사료이다. 그리고 2차사료는 사후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이 남긴 사료들인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있다. 그들은 비판적인 견해가 많지만 보정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3차 사료는 생애 전반에 걸친 정치사회적 상황과 당시 불교계 승려들의 자료들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된다. 4차 사료는 중국 원나라 불교계의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오조법연(五祖法演)과 그 계통 승려 특히 석옥청공의 선사상을 검토해야 한다. 5차 사료는 서산의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들인데 태고보우에 법맥을 잇고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자료가 대부분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자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태고의 선사상은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개인적인 수행체험을 통해서 이뤄졌다. 26세에 화엄선에 합격하고 원각경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었으며 무자화두를 통해 의심덩어리를 해결하고 38세에 진정한 견성을 하고 간화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둘째, 석옥청공의 선사상 정확히 말하면 임제의 선사상을 받아들였다. 셋째, 스스로의 선수행 체험과 석옥청공을 통해 임제의 선사상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 당시 불교계의 흐름이 나옹혜근, 무학자초(1327~1405),백운경한, 지천 등의 경우를 보아도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원 불교계의 시대적 흐름이 임제선의 경향을 띄고 있었다. 고려 중기의 보조지눌과 진각혜심의 영향으로 임제선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이한 것은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을 건립하는데 협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조계종의 움직일 수 없는 지위를 확보한 종정으로 이름난 성철(性喆)스님을 비롯한 다수의 종정과 수행자 및 학승들이 조계종을 건설하는 신앙적 주축이었던 보조스님의 법맥을 부정하고 태고스님으로 회귀하였다는 사실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종조라는 이름을 붙이면서도 가지산문을 개창한 도의국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고려 말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모시는 태고종과 여러 종단들이 있고, 태고종과의 종조논쟁을 벌였던 고려 중기 불일보조국사를 중천조로 하고 종조는 도의국사를 모시는 것으로 결론 내린 조계종의 경우를 보면 상황논리상의 필요와 함께 의아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원융선사


조계종은 이 재열, 이 종익 등의 보조국사가 종조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불교분규(태고종 법란,조계종 정화)를 일으키더니 종권을 확실하게 잡은 뒤에는 성철, 서옹, 서암, 혜암선사 등 종정을 지낸 이들이나 지관스님, 종범스님 등 학승들이 종조는 태고스님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그러나 1994년 조계종 개혁불사 때 종조를 보조국사에서 도의국사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지관스님 총무원장 재직 시부터 도의국사의 다례를 “조계종조도의국사다례재(曹溪宗祖道義國師茶禮齋)”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다. 도의국사는 중국에서 법을 받고 돌아와 선법을 펴고자 했으나 알아듣는 이가 없어 강원도 설악으로 들어가 진전사를 일구었다. 진전사는 국보 122호인 삼층석탑과 함께 보물 439호인 도의국사의 부도가 있는 성지이다. 조계종에서는 진전사를 2005년 6월26일에 복원해서 주지를 파견하고 있다. 도의국사다례재는 2004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조계사에서 지내고 있다. 행사의 편의를 도모하는 차원이겠지만 태고사였던 조계사에서 도의국사다례를 지내는 것은 총무원이 있고 서울에 있어서 인원동원상의 편리성이 있다 할지라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음력 5월 2일에 지내는데 1941년에 일제가 제정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태고사법 제9장 법식 제81조의 항례법회 및 기일에 도의국사 기일은 음력5월 2일이라고 한 규정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한 생몰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행사 표지에 “조계종조 도의국사 다례재”라고 하는 내용 외에는 어떤 것도 표기하지 않는 독특한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몇 년도에 지내는지 ,몇 회 째인지,열반 몇 주년인지...등의 정황을 알리는 내용이 없는 것이다.
태고스님을 종조로 모시는 태고종의 경우 소의경전이 금강경과 화엄경이지만 소의경전을 공부하는 곳이 강원, 종립학교에서의 겉핥기식 공부하는 것 외에 따로 있지 않다. 종단이나 강원이 있는 총림이나 종립학교에서 소의경전을 연구하거나 선양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고 있다. 또, 종조를 태고보우스님으로 모시고 1년에 한 번 종조다례를 사리탑이 모셔진 북한산 태고사에서 100여명도 안되는 종도들이 모여 지낸다. 그것도 동방불교대학이나 법륜승가대학 학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종조다례는 1914년부터 북한산 태고사에서 지냈다. 그런데 그 때는 음력 3월16일에 지냈으나 현재는 음력 9월21일에 지내고 있다. 대륜불교문화연구원, 태고학회를 중심으로 몇 년에 한 번 정도 태고사상 세미나를 개최했었다. 하지만 태고스님이 수행과 전법의 과정에서 행했던 경전을 보면서 참선을 하거나 무자화두 등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수행하는 수행자가 아주 드물다.
조계종에서는 그런대로 소의경전을 익히고 연구하며 수행하고 선양하는 일들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다. 또 선종이라는 표의성을 가지고 간화선을 사회화하고 국제화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근래에는 간화선국제화세미나, 각종 선학회나 무차선회, 위빠사나와의 비교 등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쉽지 않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한숨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간화선 수행자나 지도자들의 전통인 입실면수(入室面首), 거량(擧梁), 조참석취(朝參夕趣)등의 과정을 통해 행해졌던 수행자에 대한 지도와 점검 및 인가(認可)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남방 미얀마중심의 위빠사나 수행 전통이 소개되면서 그들 위빠사나 수행지도자들의 개인지도방식인 인터뷰가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것으로 인식되고 인터뷰를 하는 지도자가 불교교학과 수행지도를 팔리어로 된 니까야와 논문인 청정도론에 의해 정확하게 지도한다고 알려지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화선 지도자들은 선원에서 결제중이거나 해제하고 선원 밖에서 모두 제대로 지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안팎의 비판적 시각에 놓여있다. 
이러한 비판과 아쉬움 속에서 안국선원 원장 수불스님이 전통과의 조화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통해 간화선 대중화가 가능하다고 주창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그는 범어사 출신의 중진 수행자로 조사선의 수행방법을 통해 일정한 체험을 한 뒤 조실인 지유스님의 점검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과 부산에 안국선원이라는 수행센터를 열고 있는데 재가자를 중심으로 한 도량에서 천여 명이 선 수행 안거를 나기도 하고 동국대에 간화선수행센터를 건립하도록 지원하는 일이 출세간과 세간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또, 간화선 집중수행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1주일간 간화선을 체험하고 그가 직접 법문과 점검을 해주며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전통 조사들의 간화선 체험방식의 법문과 집중수련을 통해 일정정도의 화두 집중 상태에 이른 수행자의 의정(疑情)을 의단(疑團)화 해서 드러나게(獨露)하고 점검해서 수행을 점증하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것으로 알려진다. 1차 체험을 하고난 뒤에는 황벽선사의 전심법요를 읽으며 수행의 깊이를 더한다고 한다.
‘법왕아(法王兒)’라는 기대 어린 칭송을 받고 자란 이가 뭇삶(衆生)을 살려내는 부처가 되는 꿈을 꾸고 머리 깎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경전을 읽어 마음을 추슬러서 대승불교의 최고경전이라는 화엄까지 알고 있는 바를 시험하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원각경(圓覺經)』을 보다가 마음에 깨달음이 있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여 스스로 경지(境地)를 체득하였으면서도 객관적인 검증절차를 거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서 선(禪)의 본 고장에 찾아 가서 오도(悟道)를 인정받고 돌아온 이가 있었다. 그는 당시 대국에 볼모로 끌려가 있으면서 가진 서러움을 겪었던 공민왕(恭愍王)에게 서러움의 근원인 대국 사람들을 오히려 제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한줄기 희망처럼 솟아나는 믿음이 있었으니 그를 제대로 모시면 작디작은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것이었다.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 다 행복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쉽지 않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을 요즘 말로 나타내면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가 바른 것인지 어느 것이 그른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중생들에게 맑은 바람으로 다가오는 이가 바로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올곧게 지닌 태고보우선사(太古普愚禪師)다. 우리 민족 누구나가 맛있게 먹는 비빔밥처럼 ‘내 안에 너 있다’는 저자의 어린 아이들이 읊어대는 사랑 이야기처럼 가슴을 울리는 깨달음의 노래를 부른 이가 바로 그다. 다른 것(異,別)은 틀린 것(誤,謬)이 아니라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거울이요,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는 이웃이라는 생각에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일찍이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선사는 “호랑이가 알록달록한 짐승을 잡지 않는다. 그 이유는 동족을 헤칠까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속정 깊게 경계의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삼발라에서 출판된 태고 스님에 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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