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멕시코에서 포교한
성현스님
글 | 전현자 (취재기자)
기자; 스님, 비가 쏟아짐에도 마중까지 나와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스님; 우중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기자; 탄자니아에서 불법을 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어떻게 포교하셨는지요?
스님; 포교라고 하기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제가 출가해서 걸망을 메고 선방을 다니면서 얻어 먹고 대궐같은 절간에 앉아 하는 일 없이 삼 십여 년을 보냈습니다. 여태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거 하면서 지냈는데 나이가 드니 그 동안 밥값이라도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탄자니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기자;포교로는 탄자니아가 처음이셨나요
스님; 아닙니다.
기자; 다른 곳은 어디인지요?
스님; 2010년에 세도나에서 스님들 몇 분이 모여서 하안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에 하안거를 마치고 귀국하려는데 멕시코에 포교당이 있는데 스님이 아무도 없다고 저한테 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걸망 하나 달랑 메고 바로 멕시코로 가서 살게 되었죠.
기자; 그래서 멕시코 교민들의 절에서 활동을 하셨나요?
스님; 네
기자; 매우 궁금합니다. 어떻게 포교하셨는지요?
스님; 해외에 있는 포교당들이 거의 건물을 임대해서 사는 것처럼 멕시코도 아파트를 임대해서 절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시고 대여섯 가족이 신도의 전부였어요. 그러다보니 때로는 렌트비도 못내는 열악한 환경이다보니 스님들이 오래 있지 못하고 늘 떠나버리는 상황이더라고요. 교민들이 살아가는 환경도 열악하기 그지 없었어요. 거의 모든 교민들이 시장에서 옷가게, 가방, 신발 장사를 하는데 강도가 들끓고 일하는 직원들도 주인의 눈을 피해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지경이었어요. 그 분들이 생활하는 걸 보고는 도저히 돌아올 수가 없어 1년 2년 살다보니 4년을 살게 되었죠. 그러면서 신도들이 조금씩 늘어 절 생활도 조금 나아지니 신도님들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저도 이왕 해외에 나온 김에 좀더 뜻있는 일을 해볼까 하고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한글 학교 교사를 지원한다고 하니 신도분들께서 '스님은 안되요' 그러시는 거예요. 왜 안되냐고 물으니 다 기독교인들이라 스님은 탈락될거라는 거예요. 그 소릴 들으니 더 간절한 마음이 생겨 지원을 했는데 한참 후에야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뒷얘기가 교사들끼리 시비가 있었다하더라고요.
학교에 가보니 열 여섯 명 교사 모두가 기독교인이고 심지어 선교사도 있더라고요.
암튼 그러든말든 스님을 처음 본 아이들은호기심으로 신기해했고 저의 적극적인 가르침과 활동으로 학부모들한테 긍정적인 평을 받았지요. 사실 한국인 2세들은 한국말도 잘 못할 뿐더러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더라구요. 그 아이들은 한국 문화를 직접 접하지 않았기에 책에 나온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그래서 우리 민속 음식이나 놀이를 가르칠 때는 직접 송편도 만들고 윷도 만들어 선물하기도하고 했습니다. 한글 학교는 불교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지만 함께 한다는 것이 이론으로 불교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진실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스님! 훌륭하십니다. 탄자니아를 멕시코보다 먼저 가신 건가요?
스님; 아닙니다. 2010년부터 2014년 까지 멕시코에서 살다가 귀국하여 다시 선원에 가서 그 동안 혼자 지내면서 해이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탄자니아에 조계종에서 설립한 보리가람 농업 대학이 있어요. 저는 그 학교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가게 되었지요. 어른들께서 말이 씨가 된다며 함부로 말하는 것을 삼가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오래 전에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로 생을 살아가는 이 태석 신부님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스님들도 깨달음을 얻고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왜 저리 헌신적으로 살지는 못할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함께 돕고 싶은 마음으로 그 곳의 주소를 수첩에 간직하고 살았는데 얼마 후 신부님이 돌아가셔서 꿈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런 저의 마음을 아시는 스님께서 탄자니아에 가는 걸 추천해 주셔서 이제 때가 되었나보다하고 흔쾌히 가게 되었죠.
기자; 그럼 거기서는 무슨 일을 하게 되었나요?
스님; 보리가람대학에 200여 명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지내요. 거기에 한국인은 행정을 보는 거사님과 제가 있었읍니다.학교를 지은 지가 겨우 5,6년인데 강한 태양과 인도양에 접해 있어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건물은 엉망이 되어가고 학교에 전기는 있지만 잦은 정전으로 인해 지하수마저 쓰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시골에서 온 학생들은 현대 문명을 접하지 못해 샤워기나 화장실 사용법을 몰라 모든 시설이 엉망 진창이더라고요. 게다가 위생관념이 부족하다보니 방이며 식당 쓰레기장에는 벌레가 우글거려도 아무도 치우는 사람이 없어요. 우선 환경정리를 하고 위생관리와 공공질서의식,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어요. 그리고 학교 주변의 초등학교가 열 군데가 넘는데 다 찾아다니며 실태 조사를 해보니 거의가 아침을 못 먹더라고요. 거긴 아침 식사 시간이 10시라서 아이들이 아침을 먹지 않고 등교해서 공부하다가 마을 아주머니들이 빵이며 감자, 옥수수 등을 요리해서 그 시간에 팔러 오면 돈있는 아이들은 사먹고 없는 아이들은 굶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모금한 돈으로 옥수수죽 한 컵씩을 나누어 주는 일을 했어요. 지금 약4500여명의 학생들이 날마다 옥수수죽으로 한끼를 해결하고 있어요.
학생수가 학교마다 다른데 백 여명부터 천 오백 명까지 다르기 때문에 돈을 잘 배분해주는 일도 중요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잘 만들어 주는지 날마다 학교에 나가서 점검을 하고 관리를 해주는 일을 했어요.
우리가 돈으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늘 몸소 가르쳐야 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며 아이들에게 학용품도 사주고 상처난 아이들 약도 발라주고.. 그랬더니 의사라고 소문이 나서 동네 아주머니가 발이 삐어 퉁퉁 부어서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말이 안통하니 무턱대고 발을 내미며 아프다는 시늉을 해요. 그래서 사혈을 하고 쑥뜸을 하고 약을 발라 줬어요. 그 다음날 가보니 다 나았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계란 3개를 주시더라고요.ㅎㅎㅎ
기자; 스님!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탄자니아에는 얼마나 계셨는지요?
스님; 올 4월에 나왔으니 2년 3개월 정도 지냈죠.
기자; 한국에 사실 때는 어떤 수행을 하셨습니까?
스님; 저는 출가 전에 인천 용화선원의 전강 큰스님 법문을 즐겨 들었습니다. 이미 열반에 드신 승님의 법문이지만 저는 듣고 또 듣고 하다보니 선지식으로 모시고 자연히 참선에 관심을 가졌고 주로 선원 생활을 하게 되었죠.
기자; 한국에서 사실 때도 그런 기회가 있으셨나요?
스님; 네에..사실은 제가 지병이 있어 좌선을 할때 졸음이 많이 와요. 그래서 행선을 하곤 하는데 그냥 걷는것보다 무어라도 하면서 화두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선원에서도 공양주나 채소를 가꾸는 원두 소임도 살고 해제가 되면 토굴이나 도반들 절에 가서 살곤 했죠.
기자; 선방 생활을 길게 하셨는데 화두는 무엇을 드시는지요?
스님; 출가 전에 송담 큰스님을 친견하고 '무'자 화두를 받았습니다. 어떤 화두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진실하게 믿고 정진을 하는 게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기자; 스님이 하시는 일은 매우 '유'적인 일을 하셨잖아요. 보통의 선객 스님들은 잘 안하시는, 그런데 '무'자 화두를 제대로 참구하셨기에 '유'를 창출해내실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떠신지요?
스님;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이라고 하잖아요. 아주 하찮은 일일지라도 거기에 몰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했을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부처님 경전마다 구구절절 말씀하셨듯이 유와 무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 유,무가 하나라는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ㅎ ㅎ 잡초들이 보면 끼어줄련지 모르지만 잡초처럼 살아가는 수행자입니다.(웃음)
인터뷰 날짜와 장소: 2022년 9월 5일 삼선교 전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