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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11,12월호] [나의 금강경 공부 26] 삶이 짧기에 정신 차려 좋은 업을 짓는다 (하) / 조성내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30|조회수41 목록 댓글 0

부루나 칼럼

 

 

[나의 금강경 공부 26]


삶이 짧기에 정신 차려 좋은 업을 짓는다 (하)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부처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덧없다는 생각을 닦아 행하고 덧없다는 생각을 널리 펴라. 그러면 곧 욕심 세계의 욕망을 끊고,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욕망을 끊고, 또 교만과 무명을 아주 끊어 남음이 없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증일아함경 제23권)

경봉스님의 말씀; 다음에 태어날 곳은?
이 법회에 스님과 신도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토록 많은 대중이 백 년만 지나면 서로가 다 어디에 가 있는지 행방조차도 알 수 없고 얼굴 또한 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덧없는 우리의 일상에 늘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몸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풀끝에 이슬과도 같고 번갯불과 같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허망한 가운데 허망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 허망하지 않은 물건인가? 경봉스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여러분들도, 내 앞에 생생하게 앉아 있지만, 화장(火葬)을 하면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매장(埋葬)을 하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진다. 다음에 태어날 곳은 천상인가, 인간인가, 아수라인가, 축생인가, 아귀인가, 지옥인가? (경봉 스님; ‘야반 3경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
 

 

 

세 명의 천사
다음은 <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때 부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어떤 중생은 몸(身)으로 선(善)을 행하고 입과 뜻(口·意)으로 선을 행하여 성현(聖賢)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소견의 법을 행하다가, 죽은 후에는, 천상의 좋은 곳에 태어난다. 반대로 신·구·의(身·口·意)로 악을 행하고, 성현을 비방하며 사된 소견으로 살다가 죽으면, 죽은 후 동물이나 지옥에 태어난다.” 
사악하고 못된 짓을 하다가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옥졸이 염라대왕께 데려왔다. 염라대왕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보낸 세 천사를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너는 더럽고 앓고 있는 첫 번째 천사, 노인을 본 적이 있었느냐? 
네, 노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는 똥오줌 위에 누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든 사람, 두 번째 천사를 본적이 있느냐? 
네, 병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너는 죽어있는 시신, 세 번째 천사를 본 적이 있느냐?
네, 시신을 본 적은 있습니다.
너 스스로 알았어야 할 것이다. 즉 너도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너도 알고있어야 했다,
그러하나이다. 대왕이여, 그 때에는 실로 그것을 믿지 않았나이다.
너는 몸과 입과 뜻의 착한 행을 짓지 않았다. 이제 네 죄를 다스려 다시 범하지 않게 하리라. 네가 지은 악은 부모가 지은 것도 아니요, 국왕이나 대신이나 백성들이 지은 것도 아니다. 네가 스스로 그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그 갚음을 받아야 한다.

염라대왕은 그에 상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곳, 지옥으로 보냈다.
여기서 보면, 3명의 천사는 늙음, 병듦, 그리고 죽음을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는 늙어지고, 병들고 그리고 언젠가는 꼭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인과응보라고 해서, 악을 지으면 그에 상응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선을 행하면 그에 상응한 대접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좋은 복을 갖고 다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고 싶으면,  죽기 전에, 선한 행실을 해놓아야 한다. 선한 행동이란, 남을 해치지 않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실을 말한다. 

임종 때, 자기가 지은 업을 회상해본다
죽을 때가 되면, 내가 좋은 업을 지어놓았는가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10선을 행하면서 살았는가? 이다. 몸으로 짓는 행위, 즉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는 것이다. 입으로 짓는 행위는 거짓말하지 않고, 남을 헐뜯는 말을 하지 않고, 이간하는 말이나 이치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뜻으로 짓는 행위는 탐욕을 부리지 않고, 성내는 일을 하지 않고 사뙨 소견을 갖지 않는 것이다. 10선을 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고,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좋은 복을 갖고서 태어날 것이다. 여기서 10악을 행했다면, 참회해야 한다. 참회하면 어느 정도 죄가 면제된다고 부처는 말했다.

사람이 악행을 지었더라도
허물을 뉘우치면 차츰 엷어지나니
날로 뉘우쳐 쉬지 않으면
죄의 뿌리는 아주 뽑히리(증일아함경 제39권)

혜능대사도, 10선을 행해야, 죽은 후, 부처가 마중을 나오지 않겠는가! (돈황본 단경)라고 말했다. 10선을 행하면서 살았다면,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혹은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10악을 행했다면, 지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 설령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부처는 “짧은 명을 갖고 태어나든가, 혹은 가난하게 살든가, 혹은 남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증일아함경 제51권)

편안하게 죽는 방법 두 가지 
어느 사람이 죽고 싶어 하겠는가? 모두들 영생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꼭 죽게끔 돼 있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죽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먼저 죽음을 받아들인다. 두려움 없이 죽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는 기독교식 죽음이다
내가 한국에서 미국에 이민 올 때다. 미국 의사 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미국에 갈 생각만 했었다. 한국 떠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며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하고의 이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냥 미국에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미국에 가면 자동차 한 대 사서 타고 다닐 거라는 꿈, 미국에 가면 미국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꿈, 미국에 가면 의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꿈, 등등 미국에 대한 생각만 하다가 미국에 왔다. 한국 떠남을 서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한국 떠남은, 한국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한국에서 ‘ 죽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죽었기에 나는 미국에 1967년에 왔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가족들은 내가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그 당시는, 미국에 오는 것이 아주 어려웠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내가 미국으로 가버리면, 더 이상 나를 만나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나의 한국 떠남을 슬퍼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 떠남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에 감을 영광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게 기독교식 죽음이다. 기독교인들은, 죽으면, 다들 천당에 간다고 믿고 있다. 천당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환영해준다,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좋은 자리도 마련해준다, 먹을 것도 다 장만해준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편안하게 산다,” 하는 강력한 종교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천당이 하도 좋은 곳이기에, 천당에 빨리 가고 싶다 하는 마음 때문에, 지상에서의 죽음을 전연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천국에 하루라도 더 빨리 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한국에서 미국에 올 때, 겉에서 보면  빈손으로 온 것 같지만, 실은 빈손으로 온 게 아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올 때, 두뇌(업, karma), 즉 실력이며 기술, 건강, 등을 가지고 왔다. 내 생각으로는 천국에 갈 때도, 겉에서 보면, 빈손으로 간 것 같아도, 업(karma)을 가지고 갈 것이다. 예수는 지금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계신다.(사도생전7:56, 에베소서 1;20). 그렇다면, 왼편에는 누가 앉아계실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하느님의 가까운 곁에 앉아있게 할까? 한번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천국에 갔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느님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누구는 좀 가까이, 누구는 좀 멀리 떨어져 앉아있게 될 것이다. 아마 하늘나라에도 인간 차별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는 불교식 죽음이다
 사람도 늙으면 다음 단계는 죽음이다.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난다. 떠날 때는, 어떤 사람도 데리고 가지 못한다. 어떤 물건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빈손으로 떠나야 한다. 빈손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늙으면, 하나둘씩, 주위사람들에게 애착을 끊어야 한다. 우선 친구들이며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애착심을 줄인다. 종국에 가서는 사랑했었던 아내·남편에 대한 애착도 줄인다. 차근차근  모든 애착을 끊는다. 여기서 애착을 끊어야 한다는 말은, 애착뿐만 아니라, 미움도 끊는다.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도 가져서는 안 된다. 미련뿐만 아니라 어떤 원한도 버린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원한이 없으면.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도, 가족을 떠나도, 아내·남편을 떠나도 애석해하거나 슬퍼지지 않는다. 생에 대한 애착도 끊는다. 그렇게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죽어도 슬퍼해야 할 미련이 없다. 편안하게 죽는다.

금강경(5분)에 보면 “무릇 있는바 모든 현상은 다 이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라고 했다. '나'라고 하는 생각도, 실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상(我相)도 공(空)이다. 인상·중생상·수자상도 따지고 보면 다 공이다. 아내·남편도 공이다. 모든 현상은 공이다. 사랑하고 있는 아내·남편도,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가 없는 허상인 것이다. 허상인 줄을 알면, 아내·남편에 대한 애착도 끊을 수 있다. 애착이 없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 뒤
 자연현상을 보라. 과학자들은 ‘질량 불변의 원칙’이라고 해서, 이 우주에 서는 어떤 물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단지 형태만 변하고 있을 뿐이다. 가령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었다면, 우리 눈에는 물이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물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수증기가 모이면 구름이 된다.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온다. 이처럼 어떤 것도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단지 형태만 변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바로 질량불변의 법칙인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지구가 그만큼 무거워진 것은 아니다. 사람도 죽는다. 한 사람 죽었다고 해서 지구가 그만큼 가벼워진 것은 아니다. 단지 형태만 변했을 뿐, 지구는 그냥 그대로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죽음으로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봄이 가버렸다고 해서 봄이 다시 오지 않는다고 기대하면 오산(誤算)이다. 봄은 가버렸지만, 그래도 봄은 다시 찾아온다. 돌고 돌면서 인생은 늙어진다. 늙어지면서 죽는다.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생사가 윤회한다고 불교는 말한다.

태어나짐
아이가 태어난다고 말하는데, 아이는 수동적으로 태어진다. 기계에서 물건이 만들어져 나오는 식으로, 아이는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자궁에서 밀려나온다. 자발적으로 걸어 나오는 게 아니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것도, 남녀가 만나 교제 한 번 할 때마다, 일억이 넘는 정자가 뛰쳐나온다. 일억이 넘는 정자 중에서, 난자가 스스로 정자 한 마리를 고르는 게 아니다. 일억이 넘는 정자 중에서 정자 한 마리가 스스로 난자를 찾아가 만나는 게 아니다.  난자가 정자를 일부러 고르는 게 아니다. 정자가 일부러 난자를 독차지한 게 아니다. 우연이라고 해도 좋다. 하여튼 무언가에 의해서 정자하고 난자는 서로 만난다. 불교에서는 인연 따라 서로 만난다고 말한다. 둘이가 만나면 배아가 되고 태아가 된다. 갓난아이로 태어난다. 갓난아이가 성장해서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겉에서 보면, 성인이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래도 성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에 의해서, 혹은 인연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한강 상류에 떨어진 빗방울은, 운명적으로, 서해(西海)로 향하게끔 돼 있다. 물론 가는 도중에, 증발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빗방울이 능동적으로 서해를 향해서, 혹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빗방울은, 한강물의 물결에 휩쓸려서, 물결에 끌려서 수동적으로 서해로 끌리어져서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빗방울처럼, 끌리어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에 의해 끌리어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업이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이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면 실력이 만들어진다. 고등학생이 대학에 갈 때, 학생이 원해서가 아니라, 학생의 실력이 대학에 입학시킨다. 아무리 대학에 가고 싶어도 실력이 없으면 못 들어가는 것이다. 실력이 학생으로 하여금 대학에 들어가게 한다. 실력이 좋은 직장 혹은 나쁜 직장에 들어가게 한다. 실력이 있으면 승급한다. 실력이 없으면 승급하지 못한다. 물론 운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실력은 누가  만드는가. 바로 사람이 자기 실력을 만든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실력이 바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생활을 하도록 한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업을 만들고, 그리고 업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 좋은 업을 갖고 싶은가. 물론 좋은 업을 갖고 싶겠지. 간단하다 10선을 행하면 좋은 업이 만들어진다. 좋은 업은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금강경 32분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일체의 참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거품·그림자이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청담스님; 금강경 강좌)

인생은 꿈같고 번개처럼 빨리 지나가니, 게으름 피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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