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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11,12월호] 하나의 길 하.나의 행 (1) / 이원익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30|조회수27 목록 댓글 0

< 부루나 칼럼 >

 

 

 



하나의 길 하.나의 행 (1)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올해 초, 세계의 양심을 울리던 불교계의 큰 별이 하나 사라졌다. 베트남 출신의 큰 스승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釋一行 1926 ~ 2022) 스님이 입적하신 것이다. 사실 그를 모르는 불자는 드물 것 같지만 일반 한국 사람들보다는 보통의 서양인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을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이고 하니 그는 종교와 문화, 인종과 국적의 장벽을 넘어 부처님의 알맹이 가르침을 거부감 없이 전달했는데 특히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Right Mindfulness, 바른 마음씀씀이, 바른 기억)이란 기법으로 동서양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진 마음의 병이 치유되도록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틱낫한 스님이 누구인가?
   그의 이름에는 으례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상한 영문 철자의 이름만 봐도 베트남 사람임은 짐작하겠고 선불교 스님이니 선사(禪師)라고 해야 맞겠다. 게다가 보통스님답지 않게 평생을 평화운동에 바친 활동가인 데다가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 스승이다. ‘자두 마을(Plum Village)’이라는 불교 전통을 시작한 창시자인 데다가 인터비잉(interbeing)이란 말을 지어낸 것은 확실하고, 어쩌면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란 말도 처음 사용한 인물일 것이다. 

 

틱낫한


   그러면서 수많은 책을 써낸 다작의 작가이면서 시인인데 일평생 130권 이상의 책을 썼다. 물론 돈 벌자고 한 건 아니고 주로 자신의 깨달음이나 수행 방법론,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것들인데 월남말로도 썼지만 처음부터 영어로 쓴 것도 백 권이 넘고 마흔 가지 이상의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현재까지 합해서 오백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한국말로 번역된 것도 여러 권인데 ‘화(Anger)’라는 책이 가장 많이 팔렸단다. 역시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래저래 홧병 날 일이 많은가 보다.
   그런데 책 이야기는 그의 놀라운 일생사에 비하면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행적이 많기도 하거니와 하나하나가 대단하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느끼기에는 그의 바탕이 된 그의 고국, 즉 베트남이라는 나라나 그 엄혹했던 얼마 전의 시대상황, 당시의 세계정세, 그리고 거기에 얽혀들었던 수많은 생령의 고난과 운명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잘 모르고 나 몰라라 했었다는 반성이 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니 오늘은 이야기가 좀 길어지더라도 빚 갚는 심정으로라도 이 모든 일을 너무 흘려듣지는 말아 주셨으면 한다.
   사실 베트남(Vietnam 越南)을 좀 알면 알수록 우리[한국, 한국인]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닮은 점이 많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서로 친해져서 배우고 일깨우며 필요할 땐 도와주고 해야 마땅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아직도 좀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보다 경제발전이 좀 뒤처졌다고, 월남전 때 우리가 가서 총질 좀 했다고 이들을 좀 얕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껏 모셔온 농촌 신부가 파투가 났느니 가정폭력이 잦다느니 하는 뉴스도 마음에 매끄럽지만은 않다.
   그나저나 틱낫한 스님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그분이 자라난 베트남에 대해 기본 브리핑이 있어야 글읽음의 가성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베트남은 국토가 동남아의 인도지나 반도에 처해 있지만 불교는 한국처럼 북방불교에 속한다. 인도에서 남방불교도 좀 전해 받았지만 주류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선불교다. 게다가 우리처럼 유교의 영향도 커서 효도를 중시하고 교육열도 높다. 그래선지 미국의 각 학교에도 공부 잘하는 월남 학생들이 드물지 않다.
   말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어휘의 상당 부분이 우리처럼 한자어로 채워져 있다. 다만 중국어 같은 성조가 있고 한자를 읽는 발음이 상당히 달라서 우리 귀에는 중국 남방의 광동어(廣東語, Cantonese) 따위를 연상시킨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우리의 시옷(ㅅ) 소리 한자가 거기서는 티읕(ㅌ) 소리로 규칙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석일행(釋一行)’이 ‘틱낫한’이 되고 석가모니(釋迦牟尼)는 ‘틱카마우니”가 되는 것이다. ‘석(釋)’이라는 글자는 북방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한 스님들이 이제 속세를 버리고 승가의 한 식구가 되었다는 표시로 공통으로 붙이는 성바지다.
   틱낫한의 본래 이름은 ‘구엔슈안바오(Nguyễn Xuân Bảo 阮春寶)’이고 ‘틱낫한’은 제자들이나 일반인들이 그를 존중하여 부르는 법호(法號)다. 1926년 베트남 중부 후에(Huế, 化)에서 여섯 아이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의 작은 식민지 관리였고 직계조상 중에는 눈먼 소경이면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시인으로 유명한 구엔딘추(Nguyễn Đình Chiểu 阮廷炤 1822 ~ 1888)가 있었으니 아무래도 내림이 좀 있었던 것 같다. (베트남말은 특이하게도 이응 받침소리[ng]가 말의 첫머리에 올 수도 있어서 틱낫한의 본래 성을 한글로 옮길 때 보통 ‘구엔’이라고 하지만 실은 ‘응우옌’에 가깝다) 
   그런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그는 이여덟 살 때 풀밭에 앉아 있는 평화로운 부처님 그림을 보고는 왠지 끌렸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소풍을 갔다가 산속에서 수행하는 스님을 보고 나서 근처의 샘물을 마셨는데 아주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고 그 후 줄곧 불교에 마음이 쏠렸다. 열두 살 때 출가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좀 더 있어 보라는 가족들의 말을 들었지만 열여섯 살에 고향의 투휴 절(Từ Hiếu Temple, 慈孝寺)로 출가할 수 있었다.
   이 절에서 한 세 해 동안 대승불교와 남방불교를 배우는 한편 중국어와 영어, 불어도 익혔다. 그러면서 바오쿽 불교대학(Báo Quốc Buddhist Academy 報國寺佛學院)에 다니다가 1950년에 그만두고 사이공의 안쾅 파고다(Ấn Quang Pagoda)에 가서 머물며 사이공 대학에 다녔다. 1951년에 구족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되었다. 사이공 대학에서는 과학을 전공했으며 책도 팔고 시도 팔아 학비에 보탰다.
   1955년, 후에로 돌아온 틱낫한은 월남불교통일회(Tổng Hội Phật Giáo Việt Nam 統會佛敎越南)의 기관지인 <월남불교(Phật Giáo Việt Nam 佛敎越南)>의 편집을 맡았다. 아, 여기서 하나 옆가지로 일러 드릴 것은 베트남말은 남아어족(南亞語族, Austroasiatic Languages)에 속하는데 한국말이나 중국말과는 달리 꾸미는 말이 늘 꾸밈 받는 말의 뒤에 놓인다. ‘푸른 바다’가 아니라 ‘바다 푸른’ 하는 식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이게 사실 중요한데 여기서부터 틱낫한의 길이 보통스님들의 길과 어긋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처럼 자꾸 옆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 바르고 벗어난 길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틱낫한의 하는 일이 자꾸 웃어른들, 즉 한 자리 차지하고 ‘에헴’ 하는 당시 베트남의 큰스님들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다고 적당히 알아서 모시고 대충 하면 될 텐데 이 젊은 비구는 누굴 망치려고 그러는지 하면 안 될(?) 법한 제 목소리를 <월남불교> 지에 시나브로 겁 없이 엮어 넣기 시작하는 것이다. 몇 번 눈치나 귀띔을 줘도 못 들은 척하기에 ‘될성 안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잘라낸다(?).’고, 틱낫한이 바깥에 강의 나간 사이에 그의 기록을 아예 안쾅 파고다에서 지우고 쫓아내어 버렸다. 1956년의 일이니 뒷날의 대선사요 천재적인 다작의 작가인 그를 못 알아본 우행(愚行)이었다.
   이에 틱낫한은 무슨 아옹다옹 법을 따지고 변호사를 사는 어리석고 성 마른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따른 명상수행, 곧 결제에 들어간다. 그리고 1957년, 다랏(Đà Lạt) 근처 다이라오(Đại Lao) 숲에서 더 큰 일을 벌이는데 ‘풩보이(Phương Bôi)란 이름의 승가 저항조직을 결성한다. 그러면서 고등학교에 가르치러 다니는가 하면 끊임없이 글을 쓰며 어떻게 하면 ‘인간답고 하나 된 불교’를 이룰 것인지 줄기차게 모색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하는 틱낫한식 수행이었다.
   그러다 1959년부터는 사이공의 몇몇 절에서 불교에 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못하고 쫓겨난다. 강의가 ‘영 아니올시다’라는 판정인데 재임용 탈락이 아니라 강의 중간에 쫓겨난다. 이를 보면 권력의 눈치를 어디보다 잘 보는 곳이 사람 가르치는 ‘배움터’인 것 같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승가든 그들에게서 훈도 받은 속가든 갈수록 사방은 태산이요 안팎 모두 벽창호였다. ‘여기가 정말로 네 말 대로 내일 다 함께 죽을 골짜기인지는 내일 돼 봐야 알겠고 제발 오늘만은 좀 조용히, 아쉬운 대로 다리 뻗고 쉴 테니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삿대질이었다. 뒷날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간의 화합을 이끌면서 그는 되돌아보길, 다른 종교인들에게 자기 종교를 이해시키고 서로간의 화합을 설득하는 것보다 자기 종교, 자기편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종종 훨씬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가 있다. 

 

                                프린스턴 대                                                                                               틱트리꽝


   이때 바깥에서 손길이 뻗쳐왔다. 1960년, 틱낫한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할 풀브라이트 장학생(Fulbright Fellowship) 지정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미국에 온 그는 1961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다음 해에는 콜롬비아 대학의 불교학 강사가 되었으며 코넬 대학교에서도 가르쳤다. 그러자니 자연스레 영어를 확실히 따라잡았고 불어와 고전 중국어, 범어, 빨리어 등에도 해박해졌다.
   보통사람에게 이 정도로 경력이 쌓인다면 어떻게 편안한 대국에서 어느 정도 지위 누리며 한 번 눌러살아나 볼까 하고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나 송곳은 어디서나 송곳이었다. 시대 상황이 한 번 그에게 손짓을 하자 그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고딘디엠(Ngô Ðình Diệm 吳廷琰 1901 ~ 1963)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저명한 스님, 틱트리쾅(Thích Trí Quang 釋智光 1923 ~ 2019)이 그를 부른 것이다. 
   나이 좀 지긋하신 분이라면 고딘디엠이니 틱트리쾅 하는 이름이 낯설지는 않고 기억의 어느 한구석에 아스라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이 불려간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자니 할 수 없이 묻히다 만 기억의 그 시치미를 잡아당겨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오는 역사적, 문화적 줄거리들을 대충이라도 추슬러 늘어놓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베트남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엔 썩 달갑지 않을 수도 있으련만, 세계 최강국인 이 나라를 싸워 이긴 그들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베트남의 어느 구석이 우리 한국과 닮았다는 말인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양자강 하류쯤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어 오월동주(吳越同舟)란 숙어도 생겼는데 이 ‘월(越)’이라는 한자의 발음이 베트남에서는 비에트(Viet)다. 그러니 월나라가 본래 베트남의 시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한족들이 이 글자를 처음에는 자기들 서북쪽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가 나중에 남방민족을 가리키게 됐으니 글자 하나 가지고 단정을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당시에 양자강 이남은 중국화가 안 되어 갖가지 어족의 여러 민족이 뒤엉켜 살고 있었던 것 같고 이후 한나라 때쯤 와서는 북쪽의 한족이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와 토착민들을 도륙하거나 내쫓거나 동화시켰다. 이러한 사정이 일단 우리 조상과 관련 있어 보이는 동이족의 경우와 비슷하다. 
   중국 남부의 종족들은 대부분은 땅을 잃고 사라졌지만 끝까지 한족에 동화 안 되고 산속으로 들어간 장족(壯族), 묘족(苗族) 등 소수민족들이 지금도 상당수 남아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직접적인 조상 일부는 지금의 북베트남뿐만 아니라 적어도 중국의 광동성이나 광서성 지역에는 확실히 퍼져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베트남의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2879년에 이 지역에 홍방(Hồng Bàng 鴻龐)이라는 선조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 왕조는 기원전 258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툭판(Thục Phán)이 왕조의 마지막 왕을 쳐부쉈는데 이때부터는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되는 것 같다.
   아무튼 이후로 지금의 북베트남을 중심으로 여러 왕조가 뒤를 이으며 때로는 중국에 정복되거나 지배되며 중국 문명을 상당히 받아들였다가 뒤집어엎고 독립을 쟁취하는 등 여러 곡절이 있어 온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이고 그럼에도 유독 이 두 민족만은 끝까지 중국에 안 휩쓸려 들어가고 독자성을 유지하여 지금껏 독립국으로 살아남은 점이 서로 닮았다. 
   베트남의 트란(Trần 陳) 왕조 때는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리고 11세기부터는 지금의 월남 중부지역에 있던 참파(Champa 占婆)를 멸망시키며 베트남 사람들은 그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 급속히 퍼져 내려갔다. 한때 번성하던 참파는 본래 베트남과는 완전히 계통이 다른 남양어족(南洋語族 Austronesian Languages)을 쓰는 사람들로서 보르네오가 기원인 것 같다. 지금은 거의 잊힌 민족 대학살의 비극을 겪으며 이제는 몇 사람 안 남았는데 틱낫한의 고향인 후에가 그 본거지여서 지금도 황폐한 옛 궁궐이나 사원들이 그곳에 남아있다. 크메르의 땅이던 메콩강 하구의 사이공(Sài Gòn 西貢)은 1802년에 베트남 차지가 되었다.
   그러다 16세기에 와서는 당시의 레(Lê黎) 왕조는 실권을 잃었고 실제적인 통치권력은 트린(Trịnh 鄭) 씨족과 구엔(Nguyễn 阮) 씨족이 나눠 가졌다. 이것을 타이손(Tây Sơn 西山) 형제가 진압하였는데 구엔씨의 남은 세력이 외세인 프랑스와 손잡고 이를 거꾸러뜨린 후 구엔 왕조(Nguyễn Dynasty 阮朝)가 시작된 것이 1802년이다.

 

참파의 유적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으로 베트남에 발을 디디고 네델란드와 영국도 발을 들여놓았지만 1615년 이후 프랑스가 이곳에 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들은 인도에서 영국과 식민지 경쟁을 하다 밀려서 절치부심하다 한 번 베트남을 먹잇감으로 점 찍자 집요하게 물어뜯어 왕조의 숨통을 조이고 영토와 주민들을 침탈해 갔는데 그 공식은 여느 제국주의 세력이나 대동소이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내는데 파리 외방선교회(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가 그것이다. 그다음엔 장사꾼이 들어오고 마지막엔 군대다. 먼저 남부 베트남인 코친차이나가 식민지로 떨어졌고 1887년에는 베트남 전역이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문화와 종교를 통째로 서구식으로 바꾸려 들었으며 칸붱 운동(Cần Vương Movement 勤王運動), 타이구엔 봉기(Thái Nguyên Uprising 太原兵變) 같은 토착민의 저항은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자라나지 않음은 도리어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일깨우고 부추기며 행동에 옮기는 여러 선각자, 혁명가들, 독립운동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는 우리 귀에 익은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 1890 ~ 1969)도 있었다. 이들은 1930년에 베트남국민당(Việt Nam Quốc Dân Đảng VNQDĐ 越南國民黨)을 결성했다가 프랑스에 깨지는데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은 도주하여 대개 공산주의자가 되어갔다.
   아무튼 프랑스는 2차대전이 터져 1940년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 베트남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철저히 착취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베트남의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프랑스 본국에 세워진 괴뢰 비시 (Vichy) 정권에 선을 대어 일본군의 베트남 진주를 허락받고는 자기들 군대에 필요한 천연자원과 농촌의 식량을 거리낌 없이 약탈한 결과 1945년에는 대기근으로 약 2백만의 베트남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호치민


   이러한 엄혹한 상황인 1941년, 호치민의 영도하에 공산주의 이념에 기반한 민족해방운동인 베트민(Việt Minh, 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越南獨立同盟)이 결성되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얻고 일본의 점령을 끝장낸다는 목표를 세운다.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여 물러나고 그들의 꼭두각시 바오다이(Bảo Đại 保大 1913 ~ 1997)를 앞세운 월남제국(Đế Quốc Việt Nam 帝国越南)이 무너지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임시 정부의 설립을 선포한다.
   하지만 1945년, 연합군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북위 16 도선을 경계로 북은 장개석(蔣介石 Chiang Kai-shek, Jiǎng Jièshí 1887 ~1975)의 군대가, 남은 영국군이 점령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도록 하는 한편 인도차이나는 아직도 프랑스령임을 선포한다. 호치민은 재진입하는 프랑스에 여러 유화적인 제안을 하며 독립의 길을 모색한다. 자기들은 프랑스의 우산 아래 한 독립국가로 남아 그들과 우호를 다질 테니 제발 언제까지 이 땅에서 완전히 물러나 주겠다는 약속만 해 달라고 빌다시피 하였다.

 

장개석과 모택동


   하지만 이를 비웃듯 프랑스는 일제에 빌붙었던 바오다이를 남베트남에 가져다 박아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는 한편 우수한 무기로 북베트남 저항세력의 목을 조여 갔다. 이에 호치민은 이전의 제안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노선을 재정립하여 제국주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하는 한편 북쪽의 모택동(毛澤東 Máo Zédōng 1893 ~ 1976) 정권과 소련의 원조를 받아들인다. 미국은 간접적으로 무기와 인원을 지원하며 프랑스 식민지배의 연장을 돕는다. 이것이 이후 8년이나 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 ~ 1954)의 서막이다. 
   처음엔 베트민과 미국과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았다. 프랑스는 미국의 도움과 개입을 갈구했지만 미국은 뜨악했고 호치민은 미국 대통령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 달라고 여러 번 답신 없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중국본토가 국공내전(1927 ~ 1936, 1945 ~ 1949)의 결과 모택동에게 장악되고 이어서 한국전쟁(1950 ~ 1953)이 터지자 미국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식민지배냐 독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붉은 악령이 전 아시아와 세계를 집어삼켜 버릴 것이라는 냉전의식의 도미노 이론이 하룻밤 새에 미국 사람들의 머리를 가득 채워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다가온 결과는, 1954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Điện Biên Phủ 奠邊府戰役)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마무리였다. 베트민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골머리를 앓던 프랑스는 라오스로 통하는 보급선을 휘어잡고 저항세력의 맥을 본거지에서부터 끊어 놓기 위하여 하노이(Hà Nội 河内)로부터 300킬로 떨어진 국경 근처, 서쪽 밀림의 분지 디엔비엔푸에 공중 보급으로 요새를 만들었다. 베트민의 군사책임자 보구엔지압(Võ Nguyên Giáp 武元甲 1911 ~ 2013)은 모택동의 전술에서 힌트를 얻은 은밀한 접근으로 이들을 둘러싸고 도륙을 내는데 이들이 함락되어 항복하는 날 본국의 프랑스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고 믿을 수 없어 식당은 문을 닫고 각종 행사는 취소되었다. 서구의 일류 문명국인 프랑스의 정규 군대가 미개한 동양의 게릴라군에게 항복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호되게 치욕을 당한 프랑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서둘러 제네바 협정을 맺고는 백 년 만에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짐 싸 들고 나간다. 약아빠진 프랑스는 이때껏 본국(Metropolitan France)의 여론 악화를 겁내어 본국인들은 뽑아오지 않고 주로 모로코 알제리 등 식민지 사람들을 싸움터로 내몰았으며 우월감에 들뜬 백인 지원자들도 다수 전투원으로 참가해 왔음이 알려졌다.

 

                           디엔비엔푸 프랑스군 포로                                               /                                    바오다이


   하지만 이 세상에서 지은 업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 불행하고 불결한 유산을 별생각 없이 넘겨받는다. 남쪽의 바오다이는 제 안위만 걱정하며 부패와 실정을 거듭한 끝에 미국이 뒷배를 보아준 총리 고딘디엠(Ngô Đình Diệm 吳廷琰 1901 ~ 1963)에게 쫓겨난다. 정권을 잡은 고딘디엠은 철저한 반공주의를 앞세우는 한편 바오다이를 뺨치는 무능과 부패 및 독선으로 마음껏 독재 권력을 휘두른다. 그와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도들이었는데 그는 일가친척을 요직에 앉히며 전횡하는 한편 대다수가 불교도인 베트남을 완전한 카톨릭 국가로 거듭나게 할 황당한 꿈을 실행에 옮긴다. 그리하여 친형인 고딘툭(Pierre Martin Ngô Đình Thục 吳廷俶 1897 ~ 1984)은 후에의 교구장이 되어 사람들이 부처님오신날 행사도 못 열게 하는 등 노골적으로 불교를 탄압한다. 그리고 집안 회의 끝에 독신인 자신을 보좌하고 의전용으로 내세울 퍼스트 레이디로 총통 고문인 친동생 고딘누(Ngô Đình Nhu 吴廷瑈 1910 ~ 1963)의 아내인 트란레슈안(Trần Lệ Xuân, Madame Nhu, 陳麗春 1924 ~ 2011)을 지명한다. 이 위대한 제수씨는 드라곤 레이디(Dragon Lady)라 불리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남베트남을 패망으로 이끄는 일등공신이 된다.

 

고딘툭                                                  /                                                        트루먼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나고 맺은 제네바 협정(1954)에 따라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은 베트민이, 남은 일제와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다가 지금은 미국이 뒤를 받치는 바오다이가 계속 정권을 유지하게 되었었다. 그 협정에서 1957년 6월 안으로 남북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보통선거를 치르기로 합의가 있었지만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에 끝내 서명하지 않는다. 지난 트루먼(Harry S. Truman 1884 ~ 1972) 정권이 공산당에 중국본토를 넘겼다고 비난하던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 ~ 1969)는 협정이야 어찌 됐건 반공 우선의 자세를 취한다. 고딘디엠은 통일을 위한 총선을 거부하였고 분단은 굳어진다.
   그런데 내 생각에 남베트남의 비극을 잉태한 진짜 씨앗은 고딘디엠의 농지개혁에서 싹이 텄다. 비록 거친 면이 있었지만 북베트남의 농지개혁은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면 고딘디엠의 농지개혁은 카톨릭 지주 보호를 우선으로 하는 바람에 거의 하나마나한 사기극으로 전락했다. 이에 불만이 켜켜이 쌓인 농촌의 소작농들은 마침내 연합하여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 Việt Nam 𩈘陣民族解放沔南越南)을 결성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반대진영에서 멸칭하던 베트콩(Việt Cộng 越共)이다. 이들이 다수 민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북베트남의 정규군과 손을 잡고 마지막 날까지 영내 곳곳에서 무장투쟁을 일삼았으니 남베트남의 궁극적인 실패와 패배는 일찌감치 운명지어진 셈이었다.


<하나의 길・하나의 행(II)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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