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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9,10월호] 매실이 익었구나! / 종화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28|조회수52 목록 댓글 0

< 이달의 법문 >

 


매실이 익었구나!

 

 

글 | 종화 스님
아리조나 감로사 주지

 

 

 

안녕하세요. 아리조나 감로사의 종화스님입니다. 미국에 온지 1년 반 정도 된 미국살이 새내기입니다. 한참 미국사회에 열심히 적응하고 있습니다. 미국 살이에 대해 여러분의 많은 조언 기다리겠습니다. 
이 글이 나갈 때와는 달리 지금의 아리조나의 날씨는 남다른 더위를 뽐내며 그 기세를 자랑합니다. 건조하고 따끔한 여름을 이 곳 사람들은 ‘깔끔한 여름’이라고 하며 여름 석 달을 세 번만 나면 아리조나 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을 거라고 아리조나 날씨를 자랑합니다. 좀 우스운가요? 전 올해가 두 번째 여름이지만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그 더운 곳에 어떻게 삽니까?”하며 우려 섞인 질문을 듣곤 하는데, ‘살아보니 그렇게 못 살 것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하고 아이러니한 말이 저의 입에서도 종종 나오곤 합니다. 참 사람이란 정말 환경에 잘 적응하는 동물인 것 같습니다. 

몇 주 전 문득 현대불교 사장님께서 전화가 와서 ‘이 달의 법문’을 부탁하시는데, 미국에 계시는 많은 선배 어른 스님들을 모시고 어린 중이 원고를 올리는 것이 여간 송구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옛 스님들의 짧은 일화와 선시를 소개함으로써 법문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함께 읽으면서 참구해 봅시다.

郞心葉薄妾氷淸     
사내 맘 나뭇잎처럼 얇은데 여인은 얼음같이 맑다.
郞說黃金妾不譍     
황금으로 꼬득여 보지만 여인은 응답이 없다.
假使偶然通一笑     
어쩌다 미소라도 흘렸더라면
半生誰信守孤燈     
외로운 등불 반평생 지켰다한들 누가 믿을까?

이 시는 송대 양기파 간옹경 스님의 시입니다. 얼핏 보면 염정시(艷情詩)처럼 보이지만 대매법상 스님과 마조도일 스님의 법거량을 절묘하게 표현한 시입니다. 도일스님을 짓궂은 사내로 비유했다면 법상스님을 절개를 굳게 지키는 열녀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상스님과 도일스님의 다음 일화를 보면 간옹경 선사의 의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대매산 법상스님이 도일스님을 처음 참례하고 스님께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바로 부처다(卽心卽佛)." 
법상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는 그때부터 대매산에 머물렀습니다. 스님은 법상스님이 산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도일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도일스님께서 나에게 '마음이 바로 부처다' 하였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다네." 
"도일스님 법문은 요즘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시키는구나. 너는 네 맘대로 비심비불(非心非佛)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매실이 익었구나."

간옹경 선사의 시는 도일스님을 여인을 유혹하는 사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황금으로 여인을 유혹하듯 비심비불로 법상스님을 꾹~~ 찔러봅니다. 그러나 법상은 이미 간파했습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미소 한 번 흘리지 않는 도도한 여인네처럼 일갈을 합니다. 이에 도일스님은 법상스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비심비불은 아니고 즉심즉불만이 법입니까? 비심비불이 아니라면 즉심즉불도 어림없는 소리일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가름침도 결국은 모두 말일 뿐이고 방편일 뿐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것을 손으로 하든 피캣으로 하든 달을 본 사람에게는 손도 피캣도 달을 가리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말에 현혹되지 말 것을 강조하며 자신이 말한 즉심즉불도 다음과 같이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께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이라는 말을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그러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비심비불이지.", "이 둘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지도하시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그 가운데서 홀연히 누군가 찾아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보다도 큰 도를 체득하게 해주겠다." 
 
그런데 이렇게 심오한 진리 앞에서만 말에 현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말에 많이 현혹됩니다. 상대의 생각이나 의도를 알지도 못 한 체 당장 귀에 들리는 달콤한 속삭임에 찰싹 달라붙고 혹은 작은 쓴 소리에도 원수가 되곤 합니다. 말이 우리의 생각이나 의도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말만 듣고 함부로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늘 들리는 대로 듣고 습관대로 판단하지 말고 한 번씩이라도 판단을 멈추어 보세요. 그리고 그냥 ‘그렇게 말하는 구나.’, ‘그렇게 행동하는 구나.’ 정도로만 인지하는 연습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판단하기에 앞서 한 발짝 물러나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의외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우물이 얕으면 돌을 던졌을 때 돌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바로 들립니다. 우물이 깊으면 돌을 던져도 한 참 있다가 돌이 빠지는 소리가 나죠. 우리의 마음도 깊은 우물처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내게 한 소리 했다고 말에 속아 바로 반응을 하기 보다는 반응속도를 늦추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응속도를 늦추면 상대방이 보이고 자신이 보이며, 그 상황과 말의 내용,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큰 스님들처럼 속속들이 간파하지는 못해도 오해를 넘어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살찌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지만, 코로나 재확산에 경제위기설까지 참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고국을 떠나온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함께 나아갈 수 있다면 고난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요?



종화스님은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해인사 승가대학, 동국대 대학원, 해인사 율원에서 수학했고, 대구 도림사에서 포교국장을 거쳐 지난 2020년 12월 부터 아리조나 감로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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