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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8월호] 무원(無元)의 원융선사 닮아보자 2 / 법현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27|조회수32 목록 댓글 0

< 이달의 명상 >

 

 

 


    무원(無元)의
    원융선사 닮아보자 2

 

 

 

 

 

 

 

 

글 | 법현스님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
-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푸른 뫼가 썩은 몸을 탐내지 않으니 
죽은 뒤 어찌 땅을 파 묻겠는가? 
살피건대 삼매의 불이 내겐 없으니 
앞을 비추고 뒤를 끊을 건 한 무더기의 땔감 뿐.“ 

태고선사에게 법을 내린 청공선사의 임종게(臨終偈)다. 그의 땔감으로 피워 올린 삼매의 불길은 온 하늘을 붉게 태우다가 서산으로 떨어졌다. 청공선사가 급암(及菴)선사의 법을 이으면서 받은 평가는 ‘법의 바다 속에서 그물을 뚫고 나오는 금물고기(金鱗)’라는 말이다. 본디 금물고기는 『벽암록(碧巖錄)』제49칙 삼성투망금린 (三聖透網金鱗)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임제록(臨濟錄)』을 편집한 삼성혜연((三聖慧然)스님이 설봉(雪峰)화상에게 묻고 스스로 송(頌)한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격(格)을 벗어난 대장부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청공선사가 태고선사를 인가하는 대목에서는 ‘금물고기가 곧은 낚시에 올라온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제자 잘 만난 스승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힘이 들 것이다. 곧은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것이 제자 태고인가, 스승 청공인가? 지도를 받았다는 느낌으로 보면 낚시에 걸려든 것은 제자인 태고이겠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 없다. 스승을 낚시로 잡아야만 제자 된 몫을 제대로 하고 스승도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와 삼계(三界)의 그물을 뚫고 힘차게 날아올랐던 태고선사가 푸른 눈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과 교감했던 이야기는 이제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석가노인이 평생을 살았던 히말라야의 작은 뫼(小雪)에는 이름표 없는 돌종과 흩어져 버린 돌비석만이 편린(片鱗)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실로 ‘청구(靑丘)의 사문으로서 태고선사의 문손이 아닌 자가 없다’는 서산(西山)대사의 지나칠 지라도 현금의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는 푸른 눈들의 시선을 이끄는 것은 금물고기라야 마땅한 것이리라. 
태고선사는 평생을 선사로서 살다가 갔지만 교법(敎法)에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화엄선(華嚴選)에도 합격하였고, 정토행(淨土行)에도 관심을 쏟았으며, 참선 수행뿐 아니라 기도정진에도 온몸을 다 바쳐 몰두했다. 선사의 사상을 살펴보는 일은 아무래도 선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알아볼 수밖에 없는데 선사와 관련된 자료는 『태고보우국사법어집』과 당시에 교류하였던 승려와 사림(士林)들 사이에 주고받았던 시문(詩文) 그리고 선사에 관한 전기 자료(傳記資料)와 금석문(金石文) 및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 등을 참고로 하여야 할 것이다. 『태고보우국사법어집』에는 상당법어(上堂法語)9편, 일반법어22편, 가음명(歌音銘)6편, 게송(偈頌)109편, 찬발문(讚跋文)14편과 서신(書信)이 있고, 행장과 사리탑비문이 1편이 있으며, 법어집에는 실리지 않은 자료들이 상당수 있다. 

 

원융선사


선사의 사상 중에서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간화선(看話禪)사상이라 할 것이다. 선사는 「태고암가(太古庵歌)」에서 ‘떨어진 베옷 입고(着郤靑州破布杉)을 입고 맛없는 밥(無味食)을 먹으며 아침저녁으로 일없이 앉아(坐無事) 푸르뫼(靑山)만 바라보니 이는 소림의 풍규도 따르지 않고(少林風規亦不式) 팔만사천문을 다 부수는’ 자신만의 수행을 하는 풍격을 드러내고 있다. 푸른빛이 쪽에서 났으되 쪽빛보다 더 푸르러야 한다는 옛이야기처럼 청규(淸規)를 들여와 조사들이 제시했던 수행생활의 모범을 보이면서도 그에 안주하지 않는 대자유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것이다. 청규는 율사(律師)들의 사찰에 깃들어 살았던 선사(禪師)들이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도 하고, 율사(律寺)에 깃들어 사는 부채의식을 청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것이 청규다. 승려가 사찰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1월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과 집단적으로 해야 할 일을 엮어 놓은 것이다. 그중에서 선종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청규는 아무래도 보청(普請)이라 불리는 울력(運力)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백장 회해선사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승려의 노동을 금지했다. 왜냐하면 승려는 탁발(托鉢)로 걸식(乞食)하는 무소유, 무저축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수행자를 높이 여기는 초기 불교 또는 남방불교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종교가 성행하고 있는 중국의 상황에서는 놀고먹는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동을 필수조건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노동선(勞動禪) 도는 농선(農禪)으로 강조하는 덕목이 되었다. 그런 청규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도 그것에만 얽매이지는 않는 여유있는 수행태도가 태고의 것이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삶이 ‘삼세여래도 알 수 없으며(三世如來都不會) 역대조사가 감히 나갈 수 없는(歷代祖師出不得) 저 쪽 구름 밖 푸른 푸르뫼(那邊雲外靑山碧)여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誰人解)’고 하였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아라한이요, 붓다이지만 많은 것은 귀하지 않은 것이라 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의지가 선사들에게는 있었다. 그것이 이 세상 그 누구와도 짝하지 않는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고는 그것을 넘어서 삼세의 여래까지도 자신의 마음자리를 제대로 알 수 없으며,역대의 삽삼(三十三)조사도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극렬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본분종사의 삶 그것이었음을 내보인 것이다. 육조혜능으로부터 임제의현을 거쳐 석옥청공까지 이어지는 정통선의 향훈(香薰)을 짙게 쐰 그로서는 당연히 그와 같은 대자유인의 활발발(活鱍鱍)한 풍모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선은 항상 고뇌에 찬 중생들과 함께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 암자는 노승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티끌세상의 중생들과 부처와 조사가 같은 자격으로 노닐 수 있는 암자(此庵非但老僧居 塵沙佛祖同風格)라서 중생들을 적극적으로 교화하더라도 항상 고요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利物應然堂寂寂)’고한 게송에도 잘 드러나 있다. 부처의 자리나 깨달음을 얻은 조사의 자리가 어느 특정한 개인만의 소유처이거나 머무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즐겁게 함께하고 조사와 범부가 깔깔대고 일상을 살아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일상의 도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고가 살았던 암자인 태고암은 그렇게 바람이 와서 놀고 산새가 와서 노래하며 다람쥐가 드나드는 그런 자연의 한 귀퉁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대로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드나들지라도 항상 그 자리는 솔내음이 잔잔히 물처럼 흐르는 고요한 곳이었다. 여태 다 허물어져버린 옛 터를 일구고 지키며 신행해온 노승을 도와서 경기도의 힘을 빌어 성역화를 하는데 약간의 힘을 보탰으나 온전히 수행처로 만들지도 종립사찰로 만들지도 못해 안타까웠는데 시절인연이 다가와 종단에서 직영하는 사찰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와 환희용약하는 중이다.
수행을 할 때는 조주(趙州)선사의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를 권하였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설한 부처 이래의 설을 부정하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한 조주선사의 본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참구하는 것이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이다.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한다. 참구의 방법으로는 움직이거나 그치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자거나 깨거나 한 가지(動靜語黙寤寐一如)‘로서 정진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정진의 진전은 그야말로 계단식으로 차례차례 천천히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마음공부는 그렇지 않다. 수많은 세월을 수행에 쏟아도 바라밀(婆羅蜜)이 없으면 진전이 늦다. 진전이 늦을 지라도 수행에 쏟은 정렬만큼은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임계점에 이르면 모르는 이가 볼 때는 느닷없이 이뤄지는 것처럼 몰록 깨닫게(頓悟)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전이 있을 경우 반드시 본색종사(本色宗師)를 찾아서 제대로 끝을 보아 증명을 받으라(究竟事決擇)고 하였다. 무불시대에 태어난 싯타르타는 점검을 해 줄 스승이 없었지만 이제는 깨달음을 얻은 본색종사가 있으니 반드시 그를 찾아가 거량(擧量)을 하여 인가(認可)를 받아야 수행이 헛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수행을 강조한 태고였지만 모든 면에서 한 가지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사상과 방법을 원융 회통하여 주위의 모범이 되고 주변을 평안하게 하고 스스로의 평화를 이루었다. 선사의 사상은 매우 높고 다양하지만 요약해서 말하자면 무원주의(無元主義)의 포용성에 입각한 원융사상이라 할 것이다. 무원주의 또한 원융사상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태고선사는 수행과정에서의 다양한 교학적 체계의 체험과 수행의 이력 및 고려에서의 다양한 체험과 인적 교류 그리고 국제적인 지위가 상당하여 서양과도 활발히 교류하였던 원(元)의 불교와 참선 수행 체계 및 문물을 직접 경험하였다. 국내에서 자료만으로 외국의 사상을 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체험함으로써 다양한 마음을 지닌 다양한 사람과 존재들의 다양한 존재양태를 그대로 조화로운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화엄(華嚴)의 생태(生態)적 수용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사의 사상을 한마디로 일러 보라고 한다면 ‘다양성에 바탕을 둔 조화와 자유로움’이리라. 정보화시대의 21세기, 지속가능성이 화두로 등장한 이 시대에 다시 태고를 들먹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선사의 사상들이 이 시대에도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지금은 미국발 경제위기가 세계 전체를 들썩이고 민초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때이다. 이런 때가 태고가 다시 돌아온다면 나라와 단체 종교와 종파의 이익만을 위하는 편협한 장벽 세우기를 버리고 너와 내가 다로 없는 원융사상과 떨어진 옷,맛 없는 밥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정신이 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할 것이다.

 

삼발라에서 출판된 태고 스님에 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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