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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2022년 11,12월호] 지은 대로 받는 삶 잘 살아야 한다 / 법현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29|조회수33 목록 댓글 0

< 이달의 명상 >

 

 

 

 

 

지은 대로 받는 삶
잘 살아야 한다

 

 

 

 

 

 

 

글 | 법현스님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
-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공중에도, 바다 속에도 
사람, 산속, 바위 속에 숨어도
하늘이나 땅 위 어느 곳에도 
업보 막을 수 있는 곳은 없다.”

함께 읽은 『십송률』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과보를 받음에 있어서 공간적으로 어느 곳을 가더라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가르침의 배경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죽기 싫어서 죽음의 사자가 찾아내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꽁꽁 숨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때가 되자 공중의 구름 속에서 시체가 떨어졌다. 바닷 속에서도 시체가 떠올랐다. 인파에 묻혀있으면 골라내지 못할 줄 알았지만 명근(命根)이 스러지니 저절로 숨이 멎고 길에 쓰러져서 주검으로 나타났다. 바위틈에서도,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중이나, 바다 속이나, 산속의 바위 틈새라도 지은 바 업은 반드시 받아야 하며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인과의 법칙이다. 인과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임금 밑에서 일하는 신하였다. 그 왕은 빠세나디라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대궐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퉜다. 빠세나디왕이 가만히 지키고 들어보았다. 한 사람은 임금님에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 업에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빠세나디왕이 누구의 말에 정이 갔겠는가? 당연히 임금에게 의지한다는 신하이겠지. 그래서 그에게 상을 주려고 당직자를 보내어 왕비에게 알리게 했다.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 사람에게 재물과 의복과 보석을 두둑이 주어 보내시오.” 왕비는 그렇게 준비해서 기다렸는데 왕에게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이 갑자기 코피가 콸콸 터져서 가지 못하게 되어서 업에 따라 산다는 신하가 가게 되었단다. 그것을 보고 빠세나디왕이 깨달아서 말했다.
“이제야 스스로 업을 지어 그 갚음을 받는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았다. 선악의 갚음은 그 행업이 불러 오는 것이지 하늘이나 왕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생각과 뱉은 말 그리고 행동에 의해 결과를 받게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분들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분들 가운데 조금 이치에 맞지 않는 비유를 들어 신앙을 고르고 나누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유일신을 믿는 나라는 잘 살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못 산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조금 잘 사는 나라는 유일신을 주로 믿는 나라다. 그럴듯한 말이다. 언뜻 행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은 동포불자들이 상당히 자신감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했던 스님이 동포들을 초청해서 조국인 대한민국의 여러 곳을 보여주었다. 강원도 신흥사, 낙산사, 경상도 불국사, 범어사, 통도사 그리고 서울의 명동성당, 영락교회 등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동포들이 “아니, 큰 교회와 큰 성당은 아주 자그마한데 사찰은 그 교회, 성당의 몇 십배 보다 더 크네요?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찾아오는 사람들도 엄청 많고요. 아주 크게 부자네요.” 하면서 어깨를 펴더란다. 
오랜 세월 지난다 해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으니
인연이 마주칠 때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된다

이 말씀은  『인과응보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비록 백 천겁이 지난다 해도 지은 업은 소멸되지 않는다. 인연이 마주칠 때에는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된다. 우리 한국의 1500여 년 전인 신라시대의 연꽃 씨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그 때 과학적인 작업을 거쳐서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연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모든 매체의 뉴스에 다 나왔었다. 그렇게 인연이 이루어지면 결과가 맺어진다. 천 5백 년 전 연꽃 씨가 꽃으로 다시 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 밝은 이는 알 수 있다. 수행하는 이는 알 수 있다. 지은 업은 반드시 과보가 있어 공간적으로 어느 곳이라도 피할 곳이 없다. 시간적으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해도 받지 않을 수 없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 중에는 운명을 신봉하고, 소위 팔자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의 팔자가 어떤가를 알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팔자를 타고난다면, 인간의 모든 미래사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어떠한 노력을 해도 타고난 숙명에 따라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불교도가 아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이 불교도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스스로도 그렇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본다. 나는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스님들을 믿고 따르는지. 이 셋을 세상의 빛나고 귀해서 값진 보석과도 같다고 해서 삼보라고 한다.
『십송률』과 『인과응보경』의 사구게는 사람이 지은 업은 피할 수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이 세계가 신에 의해서 지배되는 유신론도 아니고 인간이 운명을 타고났다는 숙명론도 아니다. 불교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고,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인과의 도리를 가르치는 종교다.
인간에서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삼라만상은 인과에 의해서 유지되고 진행된다. 이 같은 인과의 법칙을 설명함에 있어서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는 인과에 이어 업보(業報)의 관계로 설명된다. 인과는 단순한 자연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지만 인간과 같은 의지적 존재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업보로서 설명되는 것이다.
사람은 업(業)을 짓고 보(報)를 받는다. 업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된 인(因)이다. 사람은 어떠한 행위를 할 때, 먼저 의지가 결정하고 행위가 따라간다. 내가 어디를 가려면 먼저 가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가는 행동이 따라서 이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인간 행위가 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빠알리어 깜마(kamma)로서 ‘행위’, 또는 ‘짓’으로 번역한다. 인에는 과가 있듯이, 업에는 반드시 보(報)가 따른다. 이를 가리켜 인업과보(因業果報) 또는 인과업보(因果業報)라고 한다. 따라서 선업(善業)에는 선보(善報)가 악업(惡業)에는 악보(惡報)가 있게 된다.
인간의 모든 결과는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서 결정된 보(報)다. 신의 뜻도 타고난 숙명도 아니다. 지은 업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과보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어야 한다. 이 같은 인과업보의 도리를 알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불교도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출발점은 바로 지은대로 받는다는 업인과보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나쁜 업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입으로 짓는 나쁜 업은 거짓말, 이간하는 말, 아첨하는 말, 욕하는 말이다. 몸으로 짓는 나쁜 업은 남의 생명을 죽이는 일, 내 것이 아닌 물건을 내 맘대로 가지는 일, 남의 사랑을 취하는 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냥 착한 사람이라 해도 나쁜 생각, 나쁜 말,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베푸는 생각,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따스한 생각을 해야 한다. 성질 내지 않고 부드러운 생각을 해야 한다. 어리석지 않고 슬기로운 생각을 해야 한다. 입으로 참말을 하고, 화합시키는 말을 하고, 순수한 말을 하며,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몸으로 생명을 살려주는 일을 하고, 남에게 베푸는 일을 하고, 내 사랑 지키듯 남의사랑 넘보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삶이 인과의 법칙을 아는 삶이다. 지은대로 받는다는 것을 아는 슬기로운 삶이다. 착한 삶이다. 바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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