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먼 이,
밤이 긴 자에게
글 법현 스님
부처님께서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전법활동하다 늦게 온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랬더니 그렇게 태우려 해도 좀처럼 불이 붙지않던 나무더미에 불이 붙고 다비가 진행되었다(가섭이 왔을 때 부처님의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왔다는 기
록도 있음).
다비를 마치니 부처님의 불탄 몸에서 아주 많은 양의 사리가 나왔다(여덟 섬 너 말 즉 16가마 너 말이라는 기록도 있음). 당시 16개국 중 8 큰 나라가 서로 가지려하는 바람에 전쟁위기로까지 갔으나 사이좋게 나눠 사리탑을 세워 봉안했다.
뒤에 아쇼카왕의 석주가 발굴되었을 때 부처님의 열반 몇 년 뒤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부처님이 역사 속의 인물이라는 것과 불기 연대를 기록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 해 왕사성 칠엽굴에서 500아라한이 모여서 부처님 가르침을 모았다. 마하가섭장로가 좌장이 되어 진행하고 천민으로 출가하여 계율 지키기에 으뜸이라고 칭찬 받은 우빨리장로가 계율을 먼저 송출하였다. 이러이러한 일에 이러이러한 설법을 하시고 이러이러한 행동은 열반을 얻는데 방해가 되니 하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읊으면 나머지 장로아라한들이 그렇다고 기억을 떠올려 다시 암송하는 방식이었다. 그 때의 말씀을 모은 것이 율(vinaya)이다. 그 말씀을 아난다장로가 따로 기억을 떠올려 암송하였다. 부처님께서 누구누구와 어디에 계실 때 누가 무엇을 물었고 이리저리 답하셨다...혼자 생각에 궁금해 하리라는 판단으로...말씀하셨다. 등의 말씀을 암송하면 나머지 499 아라한들 역시 기억을 떠올려 그렇다고 한 것을 모은것이 경(sutta=sutra)이다.
자세한 교학적 설명을 따로 모은 것이 법을 잘 설한 가르침 또는 법에 관한 말씀이라는 뜻의 아비담마(abhidhamma)이다. 이를 논(論)이라고 한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처님의 친어머니 마하마야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도리천(33천)의 하늘 사람들에게 일러 준 가르침을 제자들을 위해 사리불을 따로 상카시아에서 만나 전해주었다.
그것을 따로 기록한 것이 사리불아비담론이고 더 확장한 것이 7아비담마이다. 그래서 주로 제자들이 확장한 것으로 보고 논은 부처님 당시 직계제자들 더 나아가 인도의 장로들이 쓴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되어 부처님 삶,행동은 율(律), 부처님 가르침,말씀은 경(經), 제자들 논문은 논이라는 견해가 굳어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법에 관한 가르침도 부처님의 설법임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의 장로들이 지은 것은 논, 중국의 장로들이 지은 것은 소(疏), 그것을 요약한 것은 초(抄)...등으로 구분했는데 원효(元曉)스님이 지은 금강삼매경소를 본 중국 사람들이 이는 내용이 부처님 가르침에 버금가므로 인도의 대장로들이 지은 수준인 논이라고 불러야 한다해서 금강삼매경론이라 하였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선종의 제2 비조(鼻祖)라할 수 있는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법어집을 육조단경 또는 법보단경이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의 지위까지 부여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민족주의적 성향과 사대주의 경향일 것이다.
법어집을 경이라 하려니 더 유명한 분의 소를 논이라고 올려준 것이라는 추측이 무리한 것일까? 아무튼 그리하여 율장, 경장, 논장이 성립했다. 부처님의 가르침(sasana), 법(dhamma), 말씀(sutta), 주문(呪,mantra)이라는 말들이 모두 비슷한 뜻이다.
밀교에서 말하는 주문이라는 신기하고 묘한 것처럼 훌륭한 가르침이라는 말이 주문이다. 그 보다 힘이 더 센것은 무드라(mudra,文豆婁)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주문은 만트라(mantra)이고, 신라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은 무드라(mudra)다. 손동작으로 하는 수인(手印,結印)이다.
진리라는 것이 여럿이거나 둘이라면 좋겠는데 하나라서 문제가 되는 일이 일쑤다. 진리를 다루는 사람들은 그래서 다는 의견에 양보하기가 쉽지 않다. 둘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니 그러려니 해야 한다. 하지만 사
람들은 가리고 싶어 한다.
불교 경전에 길고 멀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어떤 것이 길고 먼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말씀하신 분이 바로 알려주면 매우 좋다. 그 곁에서 보고 들은 사람이 풀어주면 아주 좋다. 그런 것을 풀이글(註釋書)라고 한다. 그래도 알고 가리기가 쉽지는 않다.
“잠 못 드는 이에게 밤은 길고
지친 이에게는 가까운 거리도 멀 듯이
바른 진리를 모르는 이에게
윤회는 매우 길다.”
법구경(法句經,Dhammapada) 제5 어리석은 사람 품 첫 게송 곧 제60 게송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여인의 남편은 농부였으나 군인이 되게 하였다. 당시 왕이었던 빠세나디가 그의 아내를 넘겨보고 나쁜 짓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 자는 제 애비인 꼬살라왕도 쿠데타로 죽인 놈이다. 군인이 되게 해 아내에게 가까이게 가지 못하게 하고 멀리 어려운 일 심부름을 빨리 마치고 오지 않으면 제가 가진다고 해서 온갖 힘을 다해 왕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남자의 길은 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누구의 밤이 길 것인가? 이런 나쁜 짓을 한 놈이니 밤에 잠이 잘 올 것인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하룻밤에도 꿈을 자주 꾸며 꿈마다 무서운 신이 나타나 도끼 같은 것으로 왕의 머리를 내리치니 무서워서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주석서에는 이것은 잘 설명하고 있으나 누구에게 밤이 길고 짧은지 명확하게 나눠 주지 않는다. 뒤의 버전인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이며 중국에서 번역한 출요경(出曜經) 무상품(無常品)에 비숫한 게송이 나온다.
“잠 못 드는 밤은 길고
피곤한 길은 멀다.
어리석은 삶의 죽음은 길고
바른 법을 모른다.
(不寐夜長 疲惓道長 愚生死長 莫知生死)
이 경은 뒤에 나와서 그런지 아주 자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네 가지 경우 밤에 잠자는 사람은 적고, 깨어있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첫째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경우다. 둘째 남자가 여자를 사모하는 경우다. 셋째 도둑질하는 경우다. 넷째 선정을 구하려 부지런히 바른 법을 닦는 경우다. 그런 밤에 잠자는 사람은 아주 적고 깨어있는 사람은 매우 많다. 세 가지는 깨어있는 밤이 길다. 나머지 하나 바른 법을 닦는 경우는 밤이 긴 것을 느끼지 못한다.“
선정을 구하려 부지런히 바른 법을 닦는 것은 참선 수행하는 것이다. 용맹정진하는 것이다. 보통수준으로서 삼매에 들기 전까지는 수행이 지루하고, 졸리고, 다리 저리거나 허리가 아프며 여러 가지 종잡을 수 없는 생각으로 밤이 길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이겨내서 삼매에 들면 곧 참선하는 맛이 들면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다, 성성적적(惺惺寂寂)하다는 상태가 되면 졸려서 힘 드는 일, 밤이 긴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다. 제대로 참선하는 이, 용맹 정진하는 이에게는 밤이 길지 않다.
이 경에서는 게송과 간단한 설명 뒤에 아주 자세하게 종류를 나누고 배경풀이까지 덧붙인다.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만나게 되어서 매우 기쁜 재가자가 이렇게 훌륭한 부처님이 얼마나 되는가가 궁금했다. 그래서 부처님께 미래의 부처님이 얼마나 많은가 여쭈었다.
부처님은 갠지스강 모레 숫자만큼 많다고 하였다. 너무 너무 기뻤다. 그런 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왜 나는 이제야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게 되었는가가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돌아가 과거의 부처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를 여쭈었다. 부처님은 역시 과거의 부처님도 갠지스강 모레 숫자만큼 많다고 하셨다. 그 재가자는 쓰러져 뒹굴면서 스스로 꾸짖으며 외쳤다. 이 미련한 놈은 오랫동안 생사에 얽매여 갠지스 모래 수 같이 많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 뵙지 못했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이것은 모두 나의 게으른 삶이 근본을 따르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범부에 머무르게 됐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이 가르침은 법구경 등 여러 곳에서 비슷하게 나온다. 초기의 경전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후대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출요경(出曜經)에서 정확하게 비교하고 분석해서 차이점을 밝혀 놓은 것이다. 자기가 몰랐다고 스스로 꾸짖으며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내용은 대승 간화선 시대의 크게 분한 마음을 가지는 것의 뿌
리라고 볼 수도 있다.
참선하는 이가 꼭 갖춰야 할 마음가짐 가운데 하나가 대분심(大忿心) 곧 크게 성내는 마음이다. 나는 왜 이렇게 쉬운데 뭐하고서 이렇게 깨닫지 못했는가? 못 하는가? 스스로에게 화내는 마음이 있어야 수행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다. 경전을 많이 읽어도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적용하지 못하면 소용 없다는 말도 아주 쓸모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떤 공개 토론방에서 자세히 알려주어 알게 된 일도 떠오른다. 서로가 도와야 할 것이다.
함께 알아야 즐겁기 때문이다. 많이 알아야 기쁘기 때문이다. 혼자 알면 기쁘더라도 외롭다. 붓다께서 전법하신 까닭도 그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