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 전통의 간화선 수행에 나타난
염처법의 희미한 자취를 찾아서
알아차림의 화두 시심마,
‘사띠-시심마’
글 주현 박사 │ 번역 최종일
이 글은 2018년 11월 3일, The Journal, Religions에서 출판된 논문(저자, 주 현)을 저자의 허락을 얻어 최범산 불
자가 미주현대불교 독자를 위하여 저자와 수정 보완하여 번역한 글이다. 각 주와 참고 문헌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
니 필요한 분은 원문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원제목 출처와 저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Author: Choo, B. Hyun, Ph. D. bhyun.choo@stonybrook.edu
Translator: Jay J. Choi, MD, doctorjaychoi@yahoo.com
Title: Tracing the Satipaṭṭhānain the Korean Ganhwa Seon Tradition: Its Periscopic Visibility in the Mindful
hwadu Sisimma, ‘Sati-Sisimma’
www.mdpi.com/journal/religions. Religions 2018, 9, 341: 1-16, doi.org/10.3390/rel10120645
초록
붓다는 염처(satipaṭṭhāna) 수행을 통해서 존재의 실체를 깨닫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알
려져 있다. 이 수행은 분별심 없는 관찰을 통한 ‘청정념(bare attention)’과 ‘명확한 이해(clear comprehension)’로
특징 지어지는 수행으로, 몸과 마음의 작용에서 생기는 감각에 주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독특한 종교적 체험으로 변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염처 수행이 동아시아의 국가들로 전파되었을 때, 저자는 특히 선 전통에서 염처경의 핵심은 변모되었지만, 수행의 강력한 집중이라는 주제가 청정념의 연장선에 상응하는 “회광 반조(廻光返照)”라는 형태로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 당시 인도 수행 전통의 어떠한 양상들
이 구체적으로 동아시아 선종 학파에 전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의 간화선 수행안에서 이른바 “이 무엇인가(시심 마)?”라고 불리는 화두는 염처 정신이 압축되어 일부 암시적 표적이 드러나 있는 알아차림 화두(mindful hwadu)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지속적인 집중의 역할을 하는 “사띠(sati)”를 공명하여 상기시킨다. 이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어떻게 서로 다르게 보이는 두 종류의 수행이 한국 불교의 선 전통 안에서 함께 연계되어 나타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현대 명상 수행에서 차분한 집중 양식(calm-at tentive mode)의 방식을 권하는 염처법과 반사적 집중 양식(reflective-attentive mode)의 방식을 권하는 “사띠-시심마”의 두 가지 방법이 어떻게 나란히 수행될 수 있을까를 제시하고 있다.
이 번역문에서 사띠(Sati)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가능한 한
한글 번역을 하는 대신 사띠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빠알리어 사띠(Sati)의 ‘정확한’ 한글 번역어에 관하여:
이 제목에서 “정확한” 번역어보다는‘적절한’ 번역어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띠의 원래 의미는 주의, 기억, 억념 등 여러 의미가 있지만, 마음의 기능으로 이해할 경우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되어 혼란을 빚어서 정확한 번역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역으로 Sati는 염(念)으로 번역되었고, 영역으로는 mindfulness (Rhys-Davies, 1899), awareness, wakefulness 등으로 번역되었다.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띠의 본래 의미는 결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고 (각묵, 2016),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나는 현상을 분명히 살피는 것”(Bodhi, “Lucid awareness of the present moment”, 2011)을 의미한다. 즉 사띠는 인식 대상이 마음의 거울에 상(象)으로 비칠 때, 그 반영된 상을 ‘알아차리는’ 기능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의 순간에 집중해서 알아차리는 것이므로 다른 마음이 시간/공간을 넘어 대상을 새롭게 따로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에서 붓다는 들숨
날숨에 대한 사띠를 닦고 거듭거듭 행하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고 가르치면서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닦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띠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사띠하면서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 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MN 118-17). 네 가지 자세에 관해서는 “갈 때는 ‘가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MN 119~5) 여기에서 사띠는 기억이나 마음챙김보다는 알아차림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맛지마 니까야와 디가 니까야에 서술되어 있는 염처경(MN 10, pp. 145~155, DN 22, pp. 335~350)을 근거로 보면 염처법은 있는 현상을 그대로 보아 제법은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라는 진리를 깨달아 탐진치를 버리는 반
야 지혜를 얻는, 즉 사띠-위빠사나-지혜-깨달음이라는 도식으로 요약되어 중심 개념인 무아로 수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염처법은 무아를 깨닫기 위한 포괄적인 이론이자 실질적인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 (Nyanaponika Thera, p. 75).
현재까지 알려진 Sati의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번역자, 존칭 생략): 마음 챙김 ( “고요한 소리”의 활성 스님이 1988년 처음으로 김재성 교수에게 제안하고, 그 후 대부분 후학이 채용하여 쓰이고 있다. 각묵, 대림, 미산, 김열권, 김정호, 김교헌, 장현갑 등), 알아차림 (인경, 마성, 자운), 그 외 새김 (전재성, 아미산 이덕호, 일창), 마음 집중 (거해), 주의 깊음 (송위지), 깨어 있음 (혜천), 수동적 주의 집중(조준호), 마음 지킴 (임승택), 기억 (담마다사 이병욱, 일묵), 순수한 주의 집중 (전현수)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번역은 어느 정도 사띠의 뜻을 반영하는 것은 사실이나 어느 쪽도 온전히 바른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사띠는 해석을 둘러싸고 매우 다의적인 사항을 수반하는 복합적인 개념으로 문헌마다 달리 해석할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역자는 염처경에서 붓다가 지적한 사띠의 본래 의미를 바로 이해하면, 붓다의 의도한 의미를 벗어나 수행인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는, 한글 번역어를 구태여 찾을 필요 없이 dharma/dhamma를 “달마/담마”로, sati를 “사띠”로 그대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1. 머리말
먼저, 이 글의 중심이 되는 ‘사념처(四念處 satipaṭṭhāna)’의 명확한 뜻을 알아보도록 한다. 베다어 전통에서 나온 ‘사띠빳타나’는 복합어로서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첫째는 알아차리기 위하여 사용되는 대상을 강조하는 목적에서 “염처(念處 The Foundation of Mindfulness)”로 번역되고, 두 번째는 알아차림과 함께 공존하는 마음의 기질을 강조하여 “알아차림의 각성 (arousing of mindfulness)”으로 번역된다. (Analayo 2003, 29~30). ‘사띠(sati)’는 “기억하다” 또는 “유념하다”는 의미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빠알리어 ‘sati’는 통찰 명상으로 번역되는 ‘위빳사나
(vipassanā)’ 에 더 가까운 의미로 사용하여 초기불전 연구원이 제시한 “마음 챙김”이란 용어보다는 “알아차림, 깨어있음, 즉시 자각” 등의 한국어 번역을 사용하기로 한다.
무상한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의 염처 수행은 수행자를 궁극적인 종교 체험으로 이끌게 하는 모든 감각의 자료나 경험에 집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 경험에 따른 실증성을 예시한다. 이 과정은 분별없는 관찰과 인식을 통한 몸과 마음의 기능 과정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특징지어지는,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통해서 경험된 감각에 대한 의식적인 표명으로 시작한다. “분별없음(non-judgmental)”이란 흐트러지지 않은 깊은 주의 집중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감각을 느끼거나 또는 정신적 대상을 대할 때,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과 같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험의 특징을 체계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하여 고요하게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분별적 (judgmental)”인 마음은 뒤이어 감정적 혼란을 촉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흔히 대상을 보는 순간 곧이어 ‘좋거나 싫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염처 수행은 수행자가 어떠한 인식 상태에 직면할지라도 자유로운 통찰력을 발달시키는데 직접적인 길을 제공한다고 전한다. (Analayo 2013, p.19). 보디 (Bodhi) 스님은 ‘알아차림’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개발되는 품성이라고 지적하며, 그것은 해로운 품성으로부터 유익한 품성을, 나쁜 행위로부터 좋은 행위를, 해로운 상태로부터 이로운 마음 상태를 구별하는 도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염처 수행은 결국에는 통 찰 력 (vipassana)으 로 이 끌 어 가 는 고 요 함(samatha)이 우선 개발되어야 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고요함과 통찰, 둘 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직접적
지혜의 측면들이다. 이 수행은 이처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곧, 수행자들이 지각의 과정 자체를 미세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이 인도로부터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전파되면서, 이 수행의 가르침이 후에 대승의 선(禪) 전통으로 스며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이 대승 불교, 특히 선 전통 안에서 어떻게 지속되어 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만일 보존되어 왔다면, 염처 수행 구조의 어떤 면이 특히 후기 선 전통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난 것 일까? 이 논문은 선 전통 안에서, 염처 수행의 어떤 흔적이 남아있는지 또는, 특히 화두의 형태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는지를 찾아내기 위한 시도에서 나오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만일 염처 수행의 정신이 이미 나타나 있다면, 그것이 한국 간화선 수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가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이 명상 수행중에서 염처 수행을 물려받은 유일한 계승자라고 보거나, 또는 염처 수행을 전용으로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구에서는, 마음의 기능에 중점을 두는 염처 수행을 재검토하여, 서로 다른 것 같은 전통이 한국 불교 전통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될 수 있는지 모색하여, 그것이 하나의 ‘정제된 연결점(distilled meeting point)’ 에서 “알아차림 화두 시심마(mindful hwadu Sisimma),” 또 는 “사 띠 -시 심 마 (SatiSisimma)”로서 독특하게 인식되는 것을 밝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도-중국-한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시심마를 접할 때, 여러 초기 대승 경전과 중국 경전에서 활용되는 “회광반조(廻光返照 tracing back the radiance or counter illumination)”의
도입을 통한 하나의 연결 구조를 확인할 것 이다.
2. 염처 수행 (Satipaṭṭhāna, the Foundation of Mindfulness)
불교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염처경이 빠알리 경전에서 가장 널리 논평 된 경전 중의 하나이며, 현대의 위빳사나 활동에서도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데 이의가 없다. 이 경에서, 붓다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법규가 들어있는 “사념처(四念處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라고 불리는 설법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즉, 몸(身),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의 네 가지 각각에 대한 정념 또는 명상을 말한다. 염처 수행의 중심 주제는 그러한 네 가지 각각의 실체를 통찰하는 것인데, 이것은 수행자가 철저하게 집착을 떨구어 냄으로써 생긴 인식을 통하여 무상(anicca), 괴로움(dukkha), 그리고 무아(anatta)의 세 가지 특징을 지
닌 존재의 실체 속에서 지혜가 생기게 하는 지속적인 분석을 지지한다.
염처경에서, 몸의 관한 사띠(sati)는 다음의 여섯 가지 방법으로 설명되어 있다: 1) 호흡에 대한 염 (安般念), 2) 네 가지 몸의 자세 (걷기, 서있기, 앉아있기, 누워있기)에 대한 염, 3) 몸의 모든 활동에 대한 분명한 인식, 4) 몸의 혐오스러운 부분에 대한 숙고, 5) 몸을 이루는 네가지 요소들 (지, 수, 화, 풍)에 대한 분석, 6) 묘지에 대한 염을 말한다 (Nanamoli and Bodhi 1995, pp. 145~155). 첫째로, 수행자가 몸에 대한 명상에 머무는 동안, 온전한 지혜와 인식이 생길 때까지 ‘생성되고 소멸하는’ 요소들에 대한 사띠를 통해서 최고의 통찰력을 얻게 된다. 둘째는, 느낌에 관한 알아차림으로, ‘즐거움’, ‘불쾌함’,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과 같은 세종류의 느낌을 인지하고, 그 느낌들
의 덧없는 성질을 아는것이다. 이 경우, 최고의 통찰이 몸을 명상할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발달된다. 셋째, 마음에 관한 명상 수행은 마음이 탐진치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지 없는지 모든 의식 상태에 대한 사띠에 머무는 것이다. 최고의 통찰이 몸과 느낌의 명상과 비슷하게 발달한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수행자가 마음을 대상으로 명상에 머물게 되는가? 그것은 오개(五蓋, 다섯 장애), 오취온(五取蓋), 육근 (六根)과 육경(六境),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의 다섯가지 영역에 관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Nyanaponika 1988, pp. 123~135). 이 경우에도 최고의 통찰이 앞의 세 가지 명상들과 비슷하게 발달한다. 염처법의 체계적인 수행은 결국에는 통찰(vipassana)로 이어
지는 고요함(samatha)이 우선으로 계발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여기에서, 마음의 현상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모든 연기법의 세 가지 특징이 있는 관점에서 분석되어 나타난다. 올바르게 수행할 때, 염처경에서 개발된 방법은 깊이 몰입된 명상 단계(jhāna state; attainment of single-pointed concentration)를 통해서 열반의 실현으로까지 이끌어 간다고 한다. 심리학적인 표현으로는, 염처 수행은 사실상 자아 형성을 녹이는 구조의 한 형태로서, 말하자면, 꿰뚫어 보는 통찰력의 개발을 통한 자아 소멸로 나타난다.
달라이 라마가 설명한 것처럼, 무아의 본성은 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아는 애초부터 존재한 적이 없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3. 회광반조의 형태로 화두 시심마 수행과 함께 쓰이는 청정념
붓다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전 중의 하나인 중부 아함경(Majjhima Nikaya)에 “몸을 몸으로 관조하고, 느낌을 느낌으로 관조하고…등등”과 같은 구절이 반복되는 것은 수행자에게 한가지 선택된 대상을 향하여 지속적인 집중을 유지함으로써 계속 의식하고 있다는 중요성을 명심하게 하는 의도이다 (Nanamoli and Bodhi 1995, p.145). 이 경은 붓다가 마음을 훈련하고 발달시키는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정념(samma sati)의 체계적인 계발을 가르친 것으로 전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념의 대상은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경험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이와 비슷하게 동아시아의 선(禪Chan/Seon/Zen) 수행도 강한 집중(samadhi) 방법으로 구별되지만,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답을 구하는 방법으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수행은 마음의 인지적 이해인 통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선 수행에서 잘 알려진 화두 중에, 시심마(Sisimma) 화두는 수행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지속할 것을 권고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를 들면, “무엇이 보고 있는가?
무엇이 듣고 있는가? 무엇이 냄새 맡고 있는가? 무엇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인간의 본성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다른 공안이나 화두와는 달리, 화두 시심마에는 특히 몸, 감각, 마음, 그리고 마음의 대상들에 유념한다는 발상을 비롯한 염처 수행과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
이처럼, 청정념 (불교에서 ‘청정하다’라는 말은 다섯가지 감각 기관이나 여섯 번째 감각 대상을 통하여 지각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활용은 염처 수행과 시심마 수행안에서 하나의 수정된 대
응체(modified equivalent)로서 독특한 핵심적인 집중 방법을 제공한다.
염처 수행의 가르침에서, 알아차림(sati)과 분명한 이해(sampajanna)는 명상의 실제 수행을 위해 꼭 필
요한 것이다. 분명한 이해는 일체 현상이 생기고 없어지는 직접적인 이해로서의 무상을 통찰하게 한다.
‘사띠(sati)’라는 말은 ‘뚜렷한 현재 의식(lucid awareness of the present)’이라는 관점에서 “알아차
림 (mindfulness)”으로 가장 잘 특징지어지고 있는데, 보통은 냐나포니카 테라(Nyanaponika Thera)에
의해 처음으로 쓰여진 “청정념(bare attention)”이라는 용어로도 묘사되고 있다 (Bodhi 2011, p. 28). 비
구 보디는 그의 스승인 냐나포니카가 “청정념”을 비 개념적이거나, 비언어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초기 수행자가 염처 수행을 확립할 때, 실증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청정
념”이라는 표현을 도입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Bodhi 2011, p. 30). 흥미롭게도, 염처 수행에서 ‘청
정념’의 역할이 강조되지만, 선 수행 과정에서는 ‘분명한 이해(clear comprehension)’를 막을 뿐만 아니
라 적극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청정념’이 고요함 (samatha)에 적합한 수행에 영향을 미쳤을까? 냐나 포니카는 염처 수행에서 ‘청정념’의 근저를 이루는 일반적인 원리를 압축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청정념은 우리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고, 분별이 없는 의식이며…그렇
게 관찰된 사실들에 대해 반응 없이 의식된 그대로 다만 등록할 뿐…우리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견해라도, 거부하지도 또는 쫓아가지도 않고, 짧은 주목 후에, 그냥 떨쳐버리는 것이다” (Nyanaponika 1988, p. 30).
그러나, “떨쳐버림(dismiss)”이라는 말이 ‘청정념’의 방법을 서술하는 데는 그리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암시적으로는 적극적인 의미의 ‘거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인식된 사실을 적극적으로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고, 지그시 놓아버리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리를 쫓아버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날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놓아버림 (letting go)”이라는 말은 포기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면, 놓아버림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초기 불교에서는 이 말이 상당한 범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비구 아날라요는 그것이 어떠한 집착이라도 놓아버리는 시작부터 최종 완성까지 해탈로 가는 길에 기반이 되는 중심적 주제라고 주장한다 (Analayo 2012, p. 266). 더 깊은 의미에서의 놓아버려야 하는것은 “억제 또는 통제”를 의미한다. 아날라요는 억제하려는 욕망은 단순히 자아에 집착하는 현상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한다. ‘나’라는 생각에 집착한다는 것은 물건과 소유에 대한 주인 의식과 연관성이 있다. 이러한 주인 의식을 서서히 약화하기 위하여, 초기 경전에서는 ‘놓아버림’이 반복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놓아버림으로부터 얻는 혜택은, 자의식이 정지상태로 들어감에 따라,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이 어우러지는 주관적 경험을 하게 되어 생기는 깊은 집중력의 달성이라고 아날라요는 설명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화두 시심마 수행은 몸과 마음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각에 대해 ‘회광반조’의 방법으로 지속적인 의문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청
정념과 연장선상에서 상응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일체감(Oneness)’ 또는 ‘불성(Buddha-nature)’
과 같은 독특한 종교 체험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주는 역할을 한다. 화두 시심마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자
세히 설명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놓아버림’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여기서, 염처 수행을 하는 동안 어떻게 ‘청정념’이 수행되는가에 대한 가상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면, 우선, 호흡으로 사띠 수행을 하면서 달리기를 하는 한 수행자를 상상해 본다(身 kaya). 바로 그때, 그 수행자가 가시 많
은 장미 덩굴에 넘어져 가시가 얼굴을 찌르고, 피가 나서, 심한 통증이 몰려온다(受 vedana). 그때, 그 수행
자는 화나고, 욕도 나오고, 후회도 생기고, 등등의 여러가지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心 citta). 이때, 마음의 대상에 대한 사띠를 통해서(法 dhamma), 수행자는 그것 자체가 영속하는 실체가 없는, 덧없는 속성임을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그것이생겨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요인에 유념한다. 이렇게 명상하는
동안, 수행자의 마음은 안정되어 고요하고 초연해져서, 몸의 감각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와같이, 연기
적 발생에 대한 최상의 지혜, 즉, 모든 현상의 상호 의존성이 자아의 결핍과 실체의 부재라는 무아의 두가
지 면에 대한 통찰을 일깨워줄 수 있다.
요약하면, 우리가 주변과의 감각적 접촉으로 느낌이 일어날때, 체험적인 방법을 기본 설정으로 관찰하는 염처 수행은 수행자의 평범한 일상적인 지각 능력을 깨달음의 경지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명상 수행자인 아이야 케마(Ayya Khema)가 서술한 것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는 끊임없이 반응하지만, 의도적으로는 행위자가 된다.”
4. 대승 전통에서의 염처 수행
대부분의 대승 문헌은 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vipassana) 사이에 조화를 인정하지만, 여기서는 위빳사나 측면이 인도 불교의 염처 수행에서 만큼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비구 수자토가 지적한 대로, 무아의 강조는 인도의 염처 수행의 맥락에서보다는 후기 대승 경전에서 더 흔히 나타난다. 초기 경전은 염처 수행안에서 매력적인 측면, 즉, 호흡, 즐거운 느낌, 깨끗한 마음 등과 같이 마음을 끄는 체험의 측면과 좋지 않고 매력적이지 못한 측면, 즉, 무덤, 고통스러운 느낌, 오염된 마음 등과 같이 기피하게 되는 체험의 측면 양쪽을 다 포함하여 더 균형된 접근을 하고 있다 (Sujato 2012, p. 356). 후기 대승 불교, 특히 선 전통에서는 염처 수행에 대한 전형적
인 인도식 서술은 약간 수정되고 압축된 형태로 표현 되기 시작하였다 즉, 몸, 느낌, 마음 그리고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空)하다고 인식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한 체험적인 방법과 그 결과 일어나는 궁극적인 종교 체험으로 이끌어지는 변화는 덜 강조된다.
선사들은 염처 수행의 정교하고, 실용적이며, 실질적인 가르침을 건너뛰어서, 가장 핵심적인 중심적 역할은 가볍게 여기면서 염처 수행의 본질을 대강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이 현존하는 많은 해설서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염처 수행경의 중요한 메시지가 초기 대승 문헌, 특히 후기 선종에 전파되었지만, 그 가르침의 핵심은 종종 제거되고, 단지 소위 ‘소승(Hinayana)’으로 지칭되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는 수행으로 분류되었다. 선종의 전통 안에서, 무엇이 이 염처 수행에 대한 ‘암시적’ (나중에는 ‘명백한’) 방관 내지 홀대에 이르는 동기를 부여 하였을까? 이 문제는 붓다와 선(禪)의 궁극적 관심에 관하여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검토되어야 한다.
초기 불교에서 서술된 붓다의 진리 탐구에 대한 주된 목적과 선 수행의 목적을 비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붓다의 근본적인 관심은 단지 육체적 또는 감정적인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이 니카야 경전에 서술된 붓다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불교 교리와 명상의 중국화 과정 동안, 특히 선 전통으로 전해졌을 때, 인도식의 명상 개념들에 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의문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방대한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설명 정도로 대신할 것이다. 요약하면, 선 전통에서 수행에 관한 기본적인 관심은, 모든 중생이 본래 타고 날 때부터 진여/자성을 갖추고 있다는 이해를 수반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여러 곳에서 자세히 논의되어 온 바 있는 깨달음과 닦음으로 접근하는 두가지 측면, 즉,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관한 논쟁으로 대비된다. 선 전통에서 그러한 궁극적 깨달음 자체가 우선 순위에 있다는 것은 일단 깨달음을 성취하면 모든 괴로움이 즉시 그리고 동시 (instantaneously and simultaneously) 에 해소된다는 암묵적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괴로움과 그것에 대한 처방을 제시한 붓다의 근원적인 관심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고 성철 대종사는 “구름이 걷히면 동시에 태양이 비친다. 그것은 한 번에 즉시 일어나는 것이지 두 단계가 아니다” 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태양과 구름의 상호 관계를 연장 추정하여 암묵적 전제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맥락에서, 성철스님은 그의 불후의 저서인 선문 정로에서 표명하기를, “선문은 견성이 근본이니 자신의 본래 깨달은 마음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것은 진여/자성을 철견함이다” (성철, 선문정로, 1981, p. 2). 이것이 아마도 선종의 수행자들 사이에서 도덕적 수행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암묵적으로 허용되어 온 한가지 이유처럼 보인다. 버스웰 교수는 선종은 영적으로 더 수준 높은 수행 단계에 아직 미치지 못하여 깨치지 못 한 사람들을 위하여 임시적인 가치로 쓰이는 선정(samadhi)과 지혜(prajna) 두 가지 모두 결국에는 버릴 뿐만 아니라 배 격 한 다 고 주 장 한 다 (Buswell 1987, pp.324~25). 그렇다면 인도 불교의 가르침에서 선정과 지혜라는 이원론적 구조가, 선 수행의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깨달음이 참선 수행의 어떤 단계
에서도 효력이 있다고 하는 일원론적 형태로 몰입되었다고 주장될 수 있다.
여기에서, 초기 불교의 “열반(Nibbana)” 또는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을 의미하는 ‘깨달음’이라는 용어가 선종에서의 진여/자성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타당한 질문일 것이다. 이 두 전통의 명백하게 다른 접근 방법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선 전통은 초기 불교에서 가르친대로 염처 수행의 정신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을까? 두 전통 사이의 포괄적인 비판적 비교는 더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타당성 있는 하나의 설명이 회광반조를 논의하는 6장에서 간략하게 소개된다.
5. 중국불교 전통에 나타난
초기 불교 명상 수행의 흔적
중국불교 체계 안에서 선종은 인도불교 전통과 동등한 의미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기는 어렵다. 비록 ‘선(禪)’이라는 단어를 채택했을지라도, 중국불교의 이론과 수행은 염처 수행에서 가르친 것과 같은 고전적인 인도 명상의 몰입(dhyana)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지혜(prajna)를 강조한다.
중국불교에서 명상의 여러 전통에 대한 연구는 많은 상세한 논의가 요구되는데, 이 논문은 염처 수행과 관련 있는 “호흡관(anapanasati)”과 “회광반조” (回光反照)에 주로 집중할 것이다.
대략, AD 1~4세기 동안, 중국어 번역본으로 보존된 ‘선경(禪經 Dhyana Sutras)’으로 알려진, 한 묶음의 초기 불교 명상 경전이 출현 되었다. 대체로, 이 선경은 중국불교 명상 수행의 발달과 특히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의 후기 저서들에 기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그의 저서중 하나인, 육묘법문(六妙法門 The Six Gates to the Sublime Dharma)에서 지의 선사는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의 수를 세고(數), 따르고(隨), 머물고 (止), 관찰하고(觀), 되돌아보며(還/反轉), 정화하는(淨) 여섯 겹의 수행 방법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되돌아 봄의 상태는 오온의 무상함에 집중하고, 또한 호흡의 들이쉼과 내쉼의 무상함을 비추어, 다섯 가지 장애와 여러 가지 오염을 제거하는 “되돌아 보는 명상” (shifting contemplation)으로 불린다(Yamabe and Sueki 2009, pp 29~30). 특히, 이 수행은 명상하는 대상의 영역과 지각의 기능 양쪽 다 제거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인으로서, “명상하는 마음으로 계속 되돌아감(反觀觀心)” 이라고 하는 과정을 계발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Dharmamitra 2009, p.43). 이것은 소위 “회광반조”라고 하는, 뒤에 나오게 될 개념을 연상시키는 수행으로, 정확하게 후기 선종의 수행방식을 상기시킨다. 이 개념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자신의 청정심이 깨달음의 근원으로 추정
되는 자신의 본성으로 되돌아가 비추는 수행을 의미한다. 회광반조의 과정은 자신의 본성, 또는 “밝게 빛나는 마음(brightly shining mind)”을 비추기 위하여 자신 내면으로 빛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광반조의 전형적인 인식체계는 시기적으로 초기불교부터 중국불교 시기까지 지속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도불교의 명상 전통 안에서, 회광반조 수행에 대한 견해는 명백하게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기법의 잠재된 형태로 염처 수행 경에서 사용되는 ‘청정념(bare attention)’의 방법을 통해서 함축적으로 언급될 수 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주위 집중을 되돌려서 소리를 듣는 마음을 명상(反觀聞聲)”하는 방법이 몇백 년 후에 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 The Suramgama Sutra)에서 ‘청각 기관의 완벽한 관통’(耳根圓通)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 ‘회광반조’라는 주제로 더욱 상세히 서술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 방법이 존속되어 12세기에 대혜종고(1089~1163)에 의해서 간화선 수행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6. 능엄경의 “회광반조(回光反照)”에
나타난 초기 경전의 “바왕가(Bhavaṅga)” 개념
인도불교 수행 안에서 중국불교로 변형하는 동안 한 가지 요소가 살아남아 더 발달하여 왔는데, 그것이 바로 앞에서 논의 되었던 ‘회광반조’이다.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초기 불교의 관점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서 ‘빛을 발하는 선명한 마음(luminous mind)’을 간단히 검토해 보면, “빛을 발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증지부경전 增支部 에서 처음 나타난다: “비구여,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 바로 이 마음인데, 우연히 오염되어 더럽혀진다” (Aṅguttara Nikāya 1. 49~52).
보디스님은 이것을 의식이 활동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신적 상태의 유형을 나타내는 아비달마 개념인 “바왕가식(bhavangacitta識)”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대략 현대 심리학의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Bodhi 2012, p. 1597). 바왕가라는 말은 ‘존재의 요인(factor of existence)’을 의미하는데, 다시 말하면, 그것은 주어진 삶을 통해서 그리고 한 생으로부터 다음 생까지 지속적인 개인의 독자성을 유지하는데 원인이 되는 인자이다. 그러나 바왕가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의식의 상태라든가 또는 영원한 자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디스님은 덧붙인다. 바왕가는 일련의 순간적인 마음의 흐름으로, 마음이 의식적으로 대상을 파악하여,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자와나(javana)”라고 하는 활동적인 인식의 과정과 번갈아 생겨난다. 그래서때로는 이러한 정신 작용의 유동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왕가의 흐름(stream of bhavanga)”으로 표현되곤 한다. 여기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라는 개념은 ‘끊임없이 연속적(continuous)’이 아닌 ‘단속적으로 끊임없음(continual)’으로 이해하여, 윤회의 개념이 ‘지속적 환생(reincarnation)’이 아닌 ‘거듭나는 윤회(rebirth)’임을 이해할수 있다. 밀린다빵하(Milinda Pañha, 나선 비구경 那先比丘經)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무아설과 윤회설을 촛불의 비유로, 한 촛불이 다른 촛불로 옮겨가는 것처럼 간명하게 윤회를 설명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바왕가에 관해서, 불교학자 피터 하비(Peter Harvey)는 흔히 남방불교 전통에서 언급되는 신비로운 마음의 형태로서 ‘밝게 빛나는 마음(brightly shining mind)’이라고 하며, 또한 이것은 불성, 혹은 모든 중생에게 있는 깨달음의 잠재성에 대한 대승불교 의견의 기반이 된다고 설명한다(Harvey 1995, p.166). 하비는 증지부 경전에기술된, 오염되거나 투명하나, 어디든지 퍼져있는 “빛나는 마음(radiant citta)”의 존재를 지적하면서, 비록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오염되어 가려져 있는 ‘밝게 빛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인간성과 모든 중생들의 본성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후에, 선종의 전통 안에서, 중생들이 본래 그리고 내재적으로 이미 깨달은 부처라고 강
조하는, 따라서 “마음은 부처와 같다” (是佛比心卽佛)는 견해가 마조 스님의 글에서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회광반조’의 잠재적인 형태가 염처경에서 보여준 ‘청정념’의 방법 안에서 발견될수 있다.
즉 집중의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억제될 때, 마음의 활동은 순수한 수용적인 상태에 있는 지각 과정의 가장 첫 단계로 되돌아 간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는 통찰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띠로써 분별없이 관찰되는 몸 (身), 느낌 (受), 마음(心), 현상 (法)에 대한 네 가지 명상은 무아(anattā)라는 불법의 중심 개념으로 집중된다. 이것이 무아의 진리를 드러내어 자각하게 하는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 또는 실체가 없이 정신적 사고 과정에서 생겨나는 ‘머물고 소멸하는’ 요인들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을 배운다.
간화선 수행의 주된 정신 기법은 단연코 ‘회광반조’로 묘사될 수 있는 반면에, 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그것이 ‘청정념’의 진화된 형태이거나 또는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대등한 형태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화두에 전념해서 집중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수행자가 자기 마음의 깨달음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내면적인 집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버스웰 교수가 설명한 대로, 일단 수행자가 회광반조를 통해서 자신 마음의 근원을 재발견하게 되면, 그 수행자는 깨달음에 대한 공안 또는 화두의 의도를 알게 되고, 결국 수행자는 같은 상태의 깨달음을 완성한다 (Buswell 2011, p. 190). 이러한 기법을 통해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되어, 주체적인 ‘나’라는 의식이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은 결국,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二元性duality)을 초월한 불이성(不二性nonduality)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그때, 본래 성품인 공성으로의 자유로운 통찰력이 생긴다. 화두 ‘시심마’(이 무엇인가) 수행은 몸과 마음의 흐름 과정에서부터 생겨나는 여러 가지 감각들과 연관된대로 [시심마] 질문을 끊임없이 놓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독특한 종교 체험인 ‘일체감’ 또는 ‘불성’으로까지 실질적 또는 효과적으로 전이에 이르게 한다. 이처럼, 회광반조의 개념은 ‘일체감(一體感)’ 또는 ‘불이(不二)’의 상태를 끌어내는 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회
광반조의 개념이 어떻게 선 전통에 스며들었을까?
후기 선 전통안에서 염처 수행의 흔적을 찾아보면, 8세기 중국 위경 중의 하나인, 수능엄경(首楞嚴經 Śūraṅgama Sūtra)에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데, 이 경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써, 청각에 의해 마음을 통찰하는 것에 역점을 두는 특징을 보여준다. 불교학자 조용헌 교수에 의하면, 능엄경의 저자(들)은 두 가지
단계로 되어있는 “청각 기관의 완전한 관통”(耳根圓通)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묘음(妙音), 관세음(觀世音), 범음(梵音), 해조음(海潮音)과 같은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회광반조의 수행처럼 “자신의 듣는 작용을 내면으로 되돌려 듣는 것” (反問聞聲)이다 (조용헌 2002, p.84). 이것이 다음과 같은 가장 대중적인 화두 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매일 매일의 종교적 수행에서 독실하게 끊임없이 아미타 부처님을 염송하는 염불자가 누구인가를 염송하는 화두 즉, “염불 독송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念佛是誰)의 기반이 되었다고
보인다. 능엄경에서는, 특히 청각 기관의 내면으로 되돌려서 알아차리는 명상법이 말세에 있는 중생들이 깨달
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붓다’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청각 기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막힘없이 꿰뚫고 들을 수 있다는 “통진실(通眞實)”; 모든 방향의 소리를동시에 전체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원진실(圓眞實)”; 그리고 소리가날 때, 안 날 때와 같은 생멸 현상과는 관계없이 듣는 성품 자체가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는 “상진실(常眞實)”의 완전한 세 가지 진실을 담고 있다는 독특한 설명을 제시한다 (수능엄경, 권6). 이러한 이유로 능엄경의 확실치 않은 출처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자들은 중국의 선(禪)의 발달과 더 나아가서 한국의 선 수행에 큰 영향을 미친 능엄경의 중요성에 주목해 왔다 (Jo 2002, pp. 20~42).
한 편 ‘청각 기관의 완전한 관통’이라는 인식은 중국선 전통 안에서 당나라때의 선사로, 금욕적 수행과 참선 기량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정중무상(淨衆無相 680~756) 대사에 의해 그 정신이 유지되었고, 후에 임제종 창시자인 임제의현(臨濟義玄 19c AD)에 의해서 계승된다. 특히 무상 대사는 억양의 길이를 늘여가며 부처님을 독송하는 방법인, 이근원통과 상통하는 인성염불(引性念佛)을 가르쳤다고 한다(Jo 2002, pp. 59~69). 또한 육조 혜능의 법을 이어 백장-황벽-임제로 법맥이 이어지는 것으로 기록된 마조도일 (709~788)을 포함한 명성이 높은 선사
들을 가르치고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지고, 한반도에 있는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로, 속성이 김 씨였기에 “김 화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7. 선종의 점진적 전개 속에서
간화선의 출현
여기에서, 인도불교의 명상 수행이 중국 사회와 문화에 적응하도록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12세기 중국 송나라 때에 간화선의 출현으로 변용되었는 지를 지적하고, 또한 어느 정도까지 인도 불교의 명상 수행 방법이 남아있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몇몇 중요한 영향력 있는 선사들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선종의 명상 수행에 관해서 버스웰 교수는 불교의 중국화 과정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형 중의 하나는 이러한 참선 형태의 원동력으로 보이는 ‘의심(疑心)’의 발상을 도입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한다 (Buswell 2011, p. 190). 그는 ‘의심’은 인도불교의 영적 문화에서는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을 못 할뿐더러, 명상 수행에서 그것은 극복되어야만 할 장애라고 지적한다. 누군가는 이 두 전통에서 의심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다고 논박하겠지만, 의심을 포함한 다섯 가지 장애는 사념처의 네 번째, ‘마음의 대상 (法)’으로 하는 명상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Nanamoli ad Bodhi 1995, pp. 151~55). 이런 수행에서, 수행자는 의심이 생기고 사라지는 요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네 가지 마음의 장애를 대상으로 명상하는 것을 배운다. 비록 의심이 장애로서 끊임없이 해로운 마음 상태와 연관되어서 인도 경전에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나타나지만, 중국 남송의 한 명망있는 선사는 역설적으로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의심에 주목하였고, 그것은 인도 불교의 영적 전통과 는 완전히 다른, 문자 그대로 “화두(話頭 topics of inquiry)”를 관찰하는 선 수행을 말한다. 그 선사는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이며, 그는 평상시에는 정신을 약화하는 부수 현상으로 나타나는 의심의 주제를 깨달음을 향한 추진력으로 변형시켰다 (Buswell 2011, p. 192). 대혜 선사는 오로지 화두 탐구의 방법으로 수행하는 간화선을 옹호하는 중국 임제종의 17대 계승자로서 육조 혜능의 걸출한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상심이 도(道)”라는 사상으로 유명한 홍주종을 개창한 마조 도일의 법맥에서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의현 선사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간화선의 주된 방법은 공안 화두에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이라는 의미인 ‘화두’는 비유하자면, 말의 정점 또는 말이 고갈된 상태를 넘어선 지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때로는 공안의 한 부분에서 발췌된 구절(句) 이나 문장(文)처럼 기능하는 짧은 한 낱말 (一語文 holophrase)로서, 이전의 공안으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깨달음으로 이끄는, 선사들과 대담자들 사이에서 즉흥적이고, 조직화하지 않고, 체계가 없는 즉답인 “기연문답(機緣問答 encounter dialogue)” 모형의 축약된 개요를 나타낸다 (McRae 2000, pp. 47~48). 화두에 집중하는 목적은 수행자에게 합리화나 개념화를 넘어서서 큰 깨달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화두 구절은 전체 담화의핵심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로서 명상과 성찰의주제가 되는 분명한 표현이다. 공안/화두선은 아시아 불교 사회에서 점점 더 대중화되어 가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화두는 “염불 독송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念佛是誰)?”이다 (Harvey 2013, p. 366). 이 화두는 19~20세기에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승, 허운대사(虛雲 1840~1959)에 의해 제창되었고, 12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가장 선호하는 참선 수행의 방식으로 이 화두를 가르쳤다 (Shi 2010, pp. 248, 255). 이 화두는 직감적인 본체 단계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선의 시각이 참 마음/한 마음 (True Mind/One Mind) 또는 부처와 중생의 자성을 대변한다고 본다 (Choo and
Choi 2017, p. 55). 중국불교에서 또 다른 두 가지 화두는 “나의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에 나의 진면목은 무엇인가?”와 “무(無)”이다. 일본의 선 전통, 특히 임제종(Rinzai school)에서 가장 잘 알려진 두 가지 공안은 “무(無)”자 화두와 하쿠인 선사 (백은 혜학,1685~1768)의 “한 손으로 치는 손뼉은 어떤 소리인가?(隻手音聲)”이다.
인도불교 전통에서 전파되어 중국화 된 선 전통은 이른바 깨달음의 성취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임제종의 구원론 체계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알려진다.
한편, 깨달음에 이르는 사선(四禪),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사념처(四念處), 등과 같은 초기 불교 원리들은 점차 억제되어 왔고, 보리 달마 시기 이후 거의 700여 년 동안 대부분의 중국 선사들에 의하여 심지어 폐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후기 간
화선 안에서 명맥을 잇게 된 부분은 무엇일까?
8. 중국 불교의 공안/화두, 시센모(是甚麽 Shishenmo)에서
한국 선 전통으로의 전개
능엄경은 대승 경전의 하나로 통일신라시대에 한국 불교에 소개되었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9세기 고려 왕조 때 명망 있는 학승 중의 하나인, 의천 대사(義天 1055~1101)에 의해, 그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28개의 능엄경 해설을 편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백여 년이 지나 보조지눌(普照 知訥 1158~1210)에 의해서 “회광반조(tracing back the radiance)” 의 방법이 채용되어 쓰였다 (Buswell 1992, pp. 103~4). 지눌은 한국 불교에서 공식적으로 화두의 사용을 지지한 첫 스승이었고, 그의 제자인 진각 혜심(眞覺 慧諶 1178~1234)과 함께 그것을 확고히 자리 잡게 하였다. 버스웰 교수는 지눌이 초기의 깨달음을 촉진하기 위한 원칙적인 방법으로, 마음 내면의 “밝게 빛나는 중심부”에서 발하는 빛을 추적하여 그 근원에 되돌아가서 마음의 원래 깨달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Buswell 1992, pp. 103~4).
이처럼 ‘청각 기관의 완벽한 관통’(耳根圓通)의 방식에서 듣는 감각이 두루 통하고 거리낌 없다는 가르침은 지눌에 의해서 한국 불자들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한 세기쯤 후에, 한편, 염처 수행의 중요한기술적인 방식은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이 그의 제자들에게 화두 시심마를 새로운 의미와 함께 그 가르침을 주입하면서 소개하여 더 강조되었다. 중국이나 일본 전통과는 다르게, 한국의 선 전통에서는 화두 ‘시심마’(C. Shishenmo, K. Sisimma, J. Zejinmo)가 간화선 수행자들에게 가장 선호하는 화두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이 화두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과 남악 회양(南嶽 懷讓 677~744)의 첫 만남으로 그 기원이 드러나는 간화선 전체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화두 중의 하나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혜능의 육조단경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남악 회양은 혜능의 전법을 인가 받은 두 제자 중의 하나이고, 다른 제자는 청원 행사(淸原 行思 d. 740)이며, 그 이후로 선의 법맥은 다수의 부차적 법맥으로 확장되었다. 공안 시심마와 관련 있는 첫 번째 역사적 일화는 남악 회양의 혜능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육조 혜능이 회양 선사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회양은 “숭산으로 부터 왔다”고
대답했다. 또 혜능이 “어떤 물건이 어떻게 왔는가(什麽物 恁麽來)?” 라고 묻자,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說似一物卽不中)” 라고 회양이 응수했다. 육조 혜능이 “그러면 가히 더 닦고 깨달아 얻을 것이 있는가 (還可 修證不)?”라는 물음에, 회양 선사가 “닦고 깨달아 얻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오염되지는 않는다(修證不無 染汚卽不得)”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처럼 초기에 묘사된 공안은, 한국 간화선 수행에서는 고전적인 중국의 선 수행 형태가 회광 반조의 방식으로 염처법 정신과 결합하여 “알아차림 화두 시심마(mindful hwadu Sisimma)”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9. 한국 선 전통의 알아차림 화두 시심마,
“사띠-시심마 (Sati-Sisimma)”
한국 선 전통에서, 염처 수행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로 염처 방식을 상기시키는 알아차림 화두 시심마, “사띠-시심마”로 발전해 왔다. 염처(念處)와 시심마(是甚麽) 두 방법 다 깨어있어 정신이 기민할 때 계속 집중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시심마 수행은 끊임없이 질문을 요구하는 한편, 염처 수행은 붓다의 팔정도의 하나인, 정념(正念)의 체계적인 계발을 요구하는 차이점이 있다. 한국불교 역사에서, 나옹 혜근(懶翁 惠勤)은 시심마의 중요성을 강조한 첫 번째 선사로 알려져 있다 (Kim 1997, p. 258). 그는 고려 말기에 잘 알려진 선사였고, 현재 한국불교 조계종의 중흥에 큰 힘이 된 승려 중의 하나였다.
간화선은 간화선 조계종 수행으로 가는 길 (혜국, 화랑, 2005, pp. 33~34)에 기술된 것처럼 일반적으로 수행의 가장 정통적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책은 간화선이 조사선의 핵심을 유지하고 과거의 조사들에 의해서 강조된 깨달음의 경험과 같은 견해를 상속한다는 내용을 표명하고 있다 (Choo 2014, pp. 92~93). 나옹선사가 시심마를 소개한 이래, 오늘날 까지 대부분의 한국불교 선 수행자 사이에서 흔히 “이 뭣고?”라는 화두로 그 사용도가 가장 많이 알려진 근원적인 화두 중의 하나로 널리 퍼져 왔다. 시심마가 소개된 이후, 당대에 시심마 화두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몇몇 영향력 있는 수행자를 열거하면, 경허 성우(鏡虛 惺牛1849~1912),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구산 수련(九山 秀蓮1909~1983), 퇴옹 성철(退翁 性徹1912-1993), 숭산 행원(崇山 行願 1927~2004), 송담 정은(松淡 正隱1929~) 등등의 선사들을 꼽을 수 있다.
한 예로, 숭산 선사는 공안/화두로서 안수정등(岸樹井藤 A Tree Vine off the Cliff hanging into the Well)의 비유를 사용하여, 수행자에게 틀에 박힌 상식으로 답을 알려고 하지 말고, 오로지 “이 뭣고?” (시심마, what is it?)라는 질문만 가지고 계속 나아갈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그러면, 숭산 선사는 “어느 날 당신은 틀림없이 ‘돌로 만든 수탉의 울음소리(石鷄鳴)’를 들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Choo 2014, pp. 98~100).
특히, 구산 선사는 화두 시심마의 한국적 수행과 연관하여, 많은 실용적인 가르침을 제공한 명성 있는 한국 선사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한국 사찰에 외국인 수행자들을 받아들이고 훈련한 최초의 선승이었다.
구산 선사는 화두 수행의 핵심 요소가 단순히 말의 반복적 암송이 아니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상태, 즉 “의심 덩어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때, 구산 선사의 제자였던 마틴 배철러는 화두 시심마를 들고 있다는 것은, 수행자가 “무엇이 보는가?” “무엇이 듣는가?” “무엇이 냄새 맡는가?” “무엇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을 지속하라고 요청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Batchelor 2009, pp. 59~63). 화두 시심마가 참선자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참선자는 그 빛을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려 추적하여, 마음을 본래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태로 복구하고, 전일적(全一的) 일체를 창조하는 통합을 이루어낸다. 이 가르침은 귀납적(inductive)이고 실증적(empiristic)인 염처 수행을 연상하게 한다. 질문하는 과정은 새로운 질문을 바로 직전의 질문에 덧붙여서 마치 그것이 겹쳐있는 것 같으나, 계속 방해 받지 않고 연결되어 각각의 새로운 질문으로서 지속되어야 한다. 바로 전의 질문에 덧붙여져, 질문의 덩어리가 상당한 정도로 확대되었을 때, 갑자기 터져서 전 우주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순간 마침내,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고, 이것이 소위 깨달음의 시초, 또는 깨달음의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 (Batchelor 2009).
혜민스님(Ryan Joo)은 송담, 성철, 그리고 수불 등, 현대 한국 선사 세 명을 집중 조명하여, 수행은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에, “의정(疑情)”을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결론지었다 (Joo 2010, pp. 236~37). 여기에서 “의정”이란 의심의 덩어리를 치
열하게 지속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불교학자들이 흔히 “의심의 감각(sensation of doubt)”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의심은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지속적으로 감정화된 의심(sustained and emotionalized doubt)”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세 선사중에, 송담 선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실제로 “이 뭣고?” 화두 수행을 하기 전에 호흡을 세면서(수식관 數息觀) 참선 수행 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친다. 구체적으로, 그는 화두 ‘이 뭣고?’와 호흡을 연결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실 동안, 수행자
는 시심마를 상기하고 몇 초 동안 숨을 참는다 그리고, 숨을 내쉴 동안 잠깐 뒤에 또 한 번 짧게 시심마를 상기한다. 수행자가 시심마에 적응이 되면, 그것을 두서너 번 숨 쉴 때마다 상기시킬 수 있다. 나중에 수행자가 시심마를 들고 있는 상태에 더 익숙해지
면, 수행자는 아침에 눈 떴을 때 하루 한 번만 시심마를 떠올려서 온종일 들고 있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자는 엄청난 돈오(頓悟)의 경험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한다 (Songdam 1988, No. 445, 455).
호흡을 ‘사띠(sati)한다’는 것은 몸의 필수적인 감각 중의 하나를 매우 자세히 관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중아함경(Majjhima Nikāya)에서 붓다는 그것의 가치를 극구 추천하고 칭찬했다고 서술되어 있듯이, 그것은 여러 가지 불교 명상의 기법 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선사들이 호흡 관찰을 어떠한 불교 명상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필수조건으로 알고, 그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강조하는 바이다. 구체적으로, 수행자가 매번 수식관을 주의 깊게 시도할 때, 화두 시심마는 마음의 지속적인 의식 상태를 상기시키는 데 특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움직이거나, 머물러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고 있거나, 그리고 평정한 상태에 있거나, 이 모든 순간에 확고하게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그 질문은 분리되지 않은 집중 또는 사띠를 일으키는 환경을 조성하여, 수행자가 모든 생물학적 기능이 일어나는 동안 매번 숨 쉬는 순간마다 완벽하게 쓰이고 있다.
사띠-시심마의 도움으로, 수행자는 산만한 집중의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일상에서 흔히 봉착하는 곳곳에 있는 문제들을 가라앉히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잡한 일상에서
관심의 집중은 계속 바뀌어, 화합하지 못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초래하는 부주의한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10. 동아시아 불교전통에 미친 한국불교의 영향:
중국불교와 심지어 초기 불교에까지 역류한 영향력의 사례
불교학자, 버나드세네칼은 조계종의 세계적인 간화선 포교 활동에 대하여, 한국 간화선 전통의 독창성, 동질성, 그리고 지속성과 연관된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표출하였다 (Senecal 2011, pp. 75~105). 그는 한국불교 전통의 보증 마
크인 간화선을 영향력 있고,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결론 내렸는데, 그것은 어떻든지 간에, 어느 정도의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반적인 이해는 한국불교의 독특한 면을 밝히는데 에는 소홀한 듯하다.
인정하건대, 버스웰 교수는 현재 동쪽으로 퍼져나온 우세한 중국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의 “여러 외곽 지역”들로부터의 영향을 받아서 중요한 회오리 또는 역류를 만들고 있는데, 이 외곽 지역 중에 특히 한국불교는 확실히 더 폭넓게 중국적불교 전통의 발
전에 참여해 왔다고 주장한다 (Buswell 2005, pp. 1~2). 그는 더 나아가서, 그러한 영향이 한국불교 주석서들과 함께 생겨났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진술한다. 예를 들어 금강삼매경론은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제기된 공사상, 반야사상,
화엄사 등의 교리를 다루고 있으며 원효 스님의 화쟁 사상 핵심을 수록하고 있는 대표적인 저서로 동아시아 전형적이고도 대표적인 주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활기찬 문화 전통이 있고, 그러한 전통을 가진 한국 불교
승려들은 이웃 나라 전통에서 일어나는 당대의 활동에 밀접하게 참여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교리와 명상의 융합된 조화에 단련된 한국불교는 흔히 통불교(通佛敎, “Ecumenical Buddhism,” or “Buddhism of total interpenetration”)로 묘사된다 (Buswell
1989, p. 116). 한국불교 학자들은 대체로, 신라시대의 가장 뛰어난 한국 학승 중의 하나인 원효대사 (617~686)가 불교 가르침은 서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설명하는 시도를 통하여, 그가 교리적 논쟁의 조화, “화쟁(和諍)”이라고 지칭한 해석학적 기법을 개척했다는 데 동의한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일부 불교 교리들이 명백한 차이와 불일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전체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도록 추구한다. 그의 근본 원칙은 주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대승기신론소(大
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論疏) 에 설명되어 있다 (Buswell and Lopez 2014, p.998). 버스웰 교수는 신라의 지식 계층을 고무시킨 원효의 해석인 “화쟁”은 그 “통합주의”라는 개념으로 원효 시대 이후 계속 한국불교의 표어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적어도 20세기 이래, 원효의 화쟁 해석은 불교사상에 독특한 한국적 접근의 특징으로 묘사됐다 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한국 선 전통에서 사띠-시심마의 발전이 한국불교에 널리 퍼져있는 통합적인 조화라는 사상적 바탕에 의해서 가능했기 때문에, 사띠시심마의 출현을 놀랍지 않게 보는 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교파적인 불교사상을 고려해 볼
때, 사띠-시심마의 출현은 단순히 두 다른 전통의 접목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중국 선 전통 안에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교리와 수행을 넘어서 초기 불교사상에 대한 일말의 염원이 담긴 통찰력 있는 응용의 결과였다고 본다. 중국 선 전통은 근본적으로 인도불교의 영적 전통을 변형시켰고, 사선정(四禪定), 칠각지(七覺支), 사념처(四念處) 등의 초기 인도불교 원리들을 철저하게 억제하면서 발전되었다. 더 나아가서, 사띠-시심마는 현대의 명상수행에서 나란히 연결되어 수행할 수 있는 유용한 응용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운전하거나 일할 때는 잔잔한 주의집중(calm-attentive mode)이 필요한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수행이 적합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공원에서 걸을 때는 반사적 주의집중(reflective-attentive mode)이 필요한 사띠-시심마(Sati-Sisimma) 수행이 적합할 수 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중단되지 않고 줄곧 명상 수행을 지속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만일 수행자가 이러한 내용을 마음속에 잘 지니고 있다면, 사띠-시심마가 학자들과 수행자들 사이에서 실용적인 대화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학문이 선(禪)수행에 정보를 줄 수 있고 선 수행은 학문에 활기를 줄 수 있다는 말이다.
11. 맺음말
역사적 붓다는 염처 수행을 통해서 존재의 본성을 깨달았고, 깨달음, 즉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종교적 체험을 달성했다고 한다. 분별없는 관찰과 인식을 활용하는 특징을 가진 염처수행 자체는 몸과 마음의 작동 과정에서 생겨나는 감각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동안, 특히 선 전통에서는 여러 가지 대체 가능한 방법의 가르침으로 변모했다. 저자는 대승전통이 염처 수행의 일부의 핵심을 유지했다고 주장하지만, 특히 선 전통은 초기불교 자료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처럼, 붓다가 강조했던 ‘가르침’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염처수행은, 특히 중국의 당/송시대의 선사들에 의해, 오히려 약화되고, 생략되어 변질되거나 또는 심지어 모두 다 거부되기까지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선 전통에서는 염처 수행의 몇몇 요소들이 드러나 있는데, 잘 알려진 간화선화두 중의 하나인, 시심마는 14세기에 나옹 혜근 선사와 그를 따르는 많은 영향력 있는 선사들에 의해서 소개된 것이다. 지금까지, 인도의 명상 전통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양상이 동아시아 선종으로 전래하였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드물지만 한국 선 전통 안에서는 염처 수행의 정신이 특히, 회광반조와 수식관의 형태로 일부분이라도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간화선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화두 중의 하나인, 알아차림의 화두 시심마(mindful hwadu Sisimma), 즉 “사띠-시심마(Sati-Sisimma)” 로 더욱 확장되고 확고해졌다. 모든 알려진 공안/화두 가운데, 사띠-시심마는 서로 다른 수행의 중요한 강조점을 효과적으로 연결하고, 지속되는 사띠의 가치를 상기시키면서 널리 울려 퍼진다. 저자는 특정 종교집단의 교리를 옹호하는 종교적 변증론자의 입장을 벗어나서, 다른 전통에는 외람되지만, 한국불교 수행자들이 사띠-시심마라는 ‘정제된 공통점(distilled
denominator)’을 가지고 종교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염처 수행 가르침에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염처 수행자들은 이 공안/화두 수행이 염처 수행만큼 확고하거나 분명하게 증명되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그 반면에, 선 수행자
들은 염처 수행이 공안/화두 수행만큼 쉽고 광범위하게 깊은 집중상태를 끌어내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해의 관점에서, 각 전통의 약점과 강점이 두 수행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 이 논문에서는 어떻게 서로 다르게 보이는 두 종류의 수행이 한국 불교의 선 전통 안에서 함께 연계되어 나타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구체적으로 현대 명상 수행에서 그때그때의 경우에 알맞은 선택으로 ‘차분한 집중 양식(calm-attentive mode)’을 권하는 염처법과 ‘반사적 집중 양식(reflective-attentive mode)’ 을 방식을 권하는 “사띠-시심마”의 두 가지 방법이 나란히 수행할 수 있는 잠재적 기반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