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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3.1월호] 하나의 길· 하나의 행(II)-이원익

작성자무량수|작성시간23.03.20|조회수69 목록 댓글 0

 

 

 

하나의 길· 하나의 행(II)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하나의 길·하나의 행(I)에서 계속

 

 

 

그리고 1963년, 놀라운 사건이 터진다. 혹심한 불교 탄압에 항의하던 틱쾅둑(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1897~1963) 스님이 스스로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하여 전 세계, 특히 서구권을 경악케 했다. 그런데 남베트남 당국은 오히려 탄압을 더해 가며 이를 조롱하기까지 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담누는 이를 ‘땡중의 바베큐 쇼’라고 비웃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더 이상의 미련을 버리고 남베트남 정권의 교체를 결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해 예상대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고딘디엠과 고딘누는 피살되지만 마담누는 용케도 빠져나가 유럽에서 일생을 마친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서구인들에게 틱낫한은 여러 번 스님들의 소신공양을 옹호하였다. 틱쾅둑 스님의 경우를 비롯한 이러한 몇 건의 사건에 경악하는 서양사람들에게 그것은 자살이 아니며 탄압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에 세계인의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설명하였다. (해방 이래 한국 스님의 소신공양은 세 건이 알려져 있다)
1964년, 월남불교연합(Giáo Hội Phật Giáo Việt Nam Thống Nhất 敎會佛敎越南統一, United Buddhist Church of Vietnam UBCV) 이 결성되었다. 틱낫한은 이 단체에 요청하기를 월남전의 종식과 추후 불교 지도자를 위한 교육 강화를 공개적으로 선포하도록 제안했다. 그리고 같은 해, 틱낫한의 제자 두 명이 라보이(Lá Bối) 출판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1966년이 되자 이
모든 관련자들은 평화를 어지럽히고 용공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여러 차례 감옥을 들락거리게 된다. 이 해에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자 베트남의 하늘 위로 밀려올 어마어마한 먹구름을 감지하고 있던 틱낫한은 끊임없이 평화와 화해를 부르짖으며 어떡하든 전민족적이고 세계적인 재앙의 불씨가 번지는 것을 지금이라도 막아 보자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수레를 가로막는 사마귀[螳螂拒轍]’의 신세였다.

 

 

 

 

알다시피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란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 세 척이 정보수집 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USS Maddox) 호에 총격을 가하고 이어서 8월 4일에도 적대적 공격 저지름의 징후를 보여 대응 사격을 하였다는 사건이다. 하지만 뒷날 밝혀진 실상은 이와 다르다. 8월 2일의 총격은 사실과 부합하나 8월 4일의 적대행위라는 것은 월남전 개입을 위한 미국 측의 조작이었거나 최소한 실수로 인한 오인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날 그 바다에 북베트남의 군함은 한 척도 없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미국이 하는 말이라고 늘 참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를 빌미로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 대통령은 북폭을 명령하였으며 미 의회는 이를 승인하고 대규모의 전비 지출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1955년, 미국이 프랑스의 패망을 넘겨받아 시작된 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Vietnam War)은 본격적으로 불타올랐다. 그런데 결과는?

아시다시피 미국의 치욕적인 패배였다. 통계가 확실하진 않지만, 스무 해를 끈 이 전쟁에서, 딴 것은 다 두고 인간의 목숨에 관해서만 보더라도 최소 130만에서 350만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패망 후부터 따져도 그렇다. (미국의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뒷날 자기 입으로 말하길, 베트남 사람만 해도 380만명이 죽었다고 했다) 미군은 5만 8천 명 이상이 죽었으며 30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났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다. 32만이 참전한 한국군도 5천 명 이상이 아까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에서 확전을 이끌고 전쟁 수행을 지휘했던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 1916~2009)는 이러한 패배를 겪은 후 뒷날 하노이를 찾아가 지난날의 적장 보구엔지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1997). 그리고 자기 책에다가 미국이 북베트남에 진 까닭을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 국방장관까지 하면서 손자병법도 읽은 적이 없었던지, 한 마디로 자기들이 무지하고 오만했었다는 고해성사다.

 

 

- 우리는 적의 지정학적 의도를 잘못 판단했고 미국에 미칠 위험을 부풀렸다.
- 우리는 남베트남 사람들과 지도자들, 정치세력들을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
- 우리는 아시아의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다.
- 우리는 그들의 역사, 문화, 정치, 그리고 지도자들에 대해 무지했다.
- 우리는 우리의 현대 첨단 군사 장비, 군대 및 교리의 한계를 몰랐다.
- 우리는 의회와 미국 국민을 설득하는 사전 정비가 부족했다.
- 우리는 예상외의 일들이 벌어질 때 제대로 설명을 못 했다.
- 우리는 우리 국민도 지도자도 전지하지 않다는 것을알아채지 못했다.
- 우리는 우리의 군사 행동을 제대로 다국적 군대와 함께하지 않았다.
- 우리는 국제 문제에서도 즉각적인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몰랐다.
- 우리는 행정부에 이러한 잘못을 효과적으로 다룰 조직을 만들어 놓지 못했다.

 

 

 

 

이렇게 전 국토가 불바다, 생지옥이 되어 가는 와중에서도 1964년, 틱낫한과 안쾅 파고다의 스님들은 먼 앞날을 바라보며 고급불교학기관(Học Viện Phật Giáo Việt Nam)을 만드는데 이것이 뒷날 반한 불교대학 (Vạn Hạnh Buddhist University 萬行佛教大學)이 된다. 그리고 그는 사이공에서 불교 심리학, 반야 문학을 가르치며 이 대학의 모금 활동을 돕는다.
그는 또한 사회봉사청년학교(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 SYSS)를 만든다. 이는 시골에 학교를 세우고 보건소를 운영하며 마을 되살리기를 돕는 등 중립적인 활동을 하는 불교 봉사단체다. 틱낫한은 미국으로 잠시를 예정하고 떠났다 못 돌아오게 되자 찬콩(Chân Không 真空 1938~) 비구니가 책임을 맡는다. 그런데 1966년, 반한(Vạn Hạnh) 대학연합의 학생들이 평화 요구 시위를 하자 대학 당국은 대학연합을 해산시키고 SYSS에 대한 지원도 끊어 버린다. 그리고
정부는 반한 대학을 접수한다. 1966년 1월, 틱낫한은 투휴 절에서 찬탓 선사(Zen Master Chan That)로부터 전등식을 받고 법통을 전수받는다. 이로써 그는 당나라의 선승 임제(臨濟義玄?~867) 스님의 베트남 쪽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한국의 선승들과는 법형제가 되는 셈이다. (틱낫한은 2003년 내한하여 조계종 5대 종정 서옹 스님을 예방하였는데 당시 서로 법형제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즈음(1964~1966) 틱낫한은 접현종(接現宗 Order of Interbeing, Tiếp Hiện)이라는 새 종파를 시작하는데 뒷날 그는 베트남 불교의 한자어 접현(接現) 을 번역하면서 ‘interbeing’ 이란 새 낱말을 만들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더불어 있기’, ‘서로 얽혀 존재하기’ 라는 뜻인데 우리는 모두 홀로 있지 않고 서로의 인연으로 각기 얽혀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다. 만물에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불변의 정체성이 없다는 공(空)의 진리와 통하는 말이다.
그는 SYSS에서 평신도 남녀 각각 세 명씩을 뽑아 ‘다섯 마음챙김 훈련’과 ‘열넷 마음챙김 훈련’을 시켰으며 접현종의 ‘열네 계율’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1966년, 베트남 불교에 관한 심포지움에 참석하러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는 이때 코넬 대학교의 동남아 전문가인 케이힌 (George McTurnan Kahin 1918~2000) 교수에게 초청받아 평화에 관한 공부를 계속했으며 미국 정부의 베트남 정핵 포럼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다섯 가지를 제안했다.
1. 미국은 베트남 사람들이 진정하게 바라는 정부를 만들 베트남 사람들을 돕겠다고 분 명하게 선언하라.
2. 미국과 남베트남은 베트남 전역에 대한 공습을 중지하라.
3. 모든 반공 군사작전은 방어전으로 제한하라.
4. 미군은 수주 안으로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라.
5. 미국은 베트남의 복구 건설을 위해 어떻게 감당할지 제시하라.
이 제안을 미국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했다면 1975년의 ‘사이공 철수’라는 그 치욕적인 결과는 비껴가거나 최소한 줄일 수 있었을 것인가? 아무튼 이 소식을 접한 남베트남의 군사정권은 자동기계처럼 그를 반역자 내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입국을 금지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틱낫한은 미국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 및 사회 저명인사들과 만나 교류하며 종교간의 이해를 돕고 평화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겟세마네 수도원을 방문하여 치유사 토머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과 만났는데 그는 틱낫한을 형제라고 불렀다. 예수회 사제 베리건(DanielJoseph Berrigan 1921~2016)과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1954~)도 만났다. 그리고 1964년
에는 ‘비난(Condemnation)’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였는데 이제 그는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반전시인이자 용공주의자로 몰렸다. 다음은 그 시의 일부다. 누가 듣든 증인이 되어 주오 나는 이 전쟁을 받아들일 수 없오 언제가 되든 결코 그리할 수 없오나 죽기 전 천 번도 더 말하리다 짝을 위해 죽는 새처럼 말이외다 부러진 부리로 피 흘리며 외치나니 “고개 돌려 진짜 네 적을 알아채라 -야망, 폭력, 미움, 탐욕이라는 적을!”
Whoever is listening, be my witness:
I cannot accept this war.
I never could I never will.
I must say this a thousand times before I am
killed.
I am like the bird who dies for the sake of its mate,
dripping blood from its broken beak and crying
out:
“Beware! Turn around and face your real enemies
—ambition, violence, hatred, and greed.”

 

 

1965년, 틱낫한은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 1968) 목사에게 편지를 쓰고는 다음해에 그를 만나 월남전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도록 촉구했다. 드디어 그 이듬해, 킹 목사는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베트남을 넘어서: 침묵을 깰 시간(Beyond Vietnam: A Time to Break Silence)’이라는 연설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틱낫한보다 더 알맞은 수상 후보자는 없다면서 이례적으로 그를 노벨 평화상에 강력히 추천했지만 상을 받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또한 틱낫한을 평화와 비폭력의 사도라고 불렀다. 남베트남 정부의 입국 금지로 귀국길이 막힌 틱낫한은 1966년 프랑스로 가서 베트남 불교 평화사절단 (Vietnam Buddhist Peace Delegation)의 의장이 되었다. 그 후 쭉 프랑스에 머물면서 세 해 뒤에는 연합불교교회(Unified Buddhist Church)를 설립하였다. 1977년에는 퐁반느(Fontvannes)에 ‘고구마 명상 센터(Sweet Potatoes Meditation Center)’를 세운 다음 내리 일곱 해 동안은 수행과 글쓰기를 계속하여 <마음챙김의 기적(The Miracle of Mindfulness)>, <달 대나무(The Moon Bamboo)><태양 내 심장(The Sun My Heart)> 같은 명저들을 마무리했다.
이 가운데 <마음챙김의 기적>은 특히 서양사람들에게 호응이 커서 이를 기초한 많은 마음 치유 프로그램이 생겨 나와 병원, 군대, 감옥, 학교, 심지어는 교회나 성당의 프로그램에까지 폭넓게 적용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좋은 효과를 주고 있다. 그에게서 가르침을 직접 받거나 이를 활용, 치유법을 개발하거나 한 사람 중에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신체의학 교수 허버트 벤
슨(Herbert Benson 1935~2022), 매사추세츠대학 산하 ‘의학, 건강, 사회 마음챙김 센터’의 창시자이자 한국 출신의 숭산 스님에게서도 배운 존 카밧진 교수(Jon Kabat-Zinn 1944~), ‘건강 마음센터’의 설립자 리처드 데이비드슨 교수(Richard J. Davidson  1951~), 신경 과학자이자 철학자, 작가, 종교 비평가, 블로거, 대중지식인이며 라디오 방송인인 샘 해리스(Samuel
Benjamin Harris 1967~) 들이 있다.
틱낫한이 이렇게 광활한 처녀지에 부처님의 씨를 뿌리고 프랑스에 머물며 평화의 화두를 잡고 치열한 수행을 계속하는 동안, 그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던 남베트남은 미국의 막대한 물적, 인적 지원과 직접적인 군사개입에도 불구하고 정정불안과 부정부패의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 지원의 본고장인 미국은 그 심장부에서부터 ‘미국은 항상 정의다’라는 전설을
의심하기 시작한 대중의 반전시위가 차츰 수위를 높여 고비를 넘고 있었다.
유권자들에게 베트남전쟁 종전을 공약했던 닉슨 대통령(Richard Nixon 1913~1994)은 국무장관 키신(Henry Alfred Kissinge 1923~)로 하여금 북베트남의 남부 중앙국 부서기 레둑토(Lê Đức Thọ 黎德壽 1911~1990)와 협상케 하여 1973년 1월, 파리평화조약(Paris Peace Accords)을 맺음으로써 미군 완전철수의 수순을 급하게 밟아 나갔다.
미국의 윽박지름에 마지못해 조약에 서명하며 속는 줄 알면서도 믿기로 했던 남베트남의 실권자들은 아니나 다를까, 북베트남의 대규모 군사 공세에도 언질과 는 달리 미국의 대응이 없자 대통령 구엔반티우(Nguyễn Văn Thiệu 阮文紹 1923 ~ 2001)부터 짐 싸들고 일찌감치 제 한 몸 살자고 망명을 해 버린다. 이에 공황에 빠진 남베트남 사람들은 제풀에 쓰러지고 지레 넘어짐으로써 너무 수월하고 빠른 진격에 도리어 불안해했던 북베트남의 공격군들에게조차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리하여 1975년 4월 30일, 공격군의 탱크가 독립궁(Independence Palace)에 진입하고 남베트남은 항복하여 무력통일은 마무리되었다.
이를 즈음하여 새로운 공산정권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워낙 급작스럽게 무너진 형국이라 무작정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이른바 선상 난민, 곧 보트 피플(Boat People)이 망망대해를 수놓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다수가 바다를 떠돌며 헤매다 물에 빠지거나 굶주림과 기갈, 병마로 죽어 갔다. 주위의 아무 나라도 이들을 반기지 않고
도로 바다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준 자국의 선원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물리며 처벌하였다. 이에 틱낫한은 싱가포르에 머물면서 비밀리에 구조단을 조직하여 바다로 나가 일부나마 이들을 구해 내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싱가포르 당국은 그의 여권을 압수하고 스물네 시간 안에 싱가포르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틱낫한은 2010년이 되어서야 이 차디찼던 적도의 나라에 다시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1982년, 틱낫한과 찬콩 비구니는 프랑스의 보르도 부근에 ‘자두 마을 절(Plum Village Monastery)’을 만들었다. 이 절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통틀어 가장 큰 절로서 200명의 수도자가 있으며 해마다 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전에 만들었던 ‘연합불교교회’는 ‘참여 불교 자두 마을 공동체(The Plum Village Community of Engaged Buddhism)’로 거듭났다.
그 후 이 ‘자두 마을 전통’에 따르는 절이랄까 수행처가 프랑스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베트남 등지에 잇따라 생겨났는데 미국에서는 뉴욕주에 있는 벽암사원(Blue Cliff Monastery), 캘리포니아 샌디에 근 처 에 스 콘 디 도 에 있 는 ‘녹 야 원 (Deer Park
Monastery)’ 등지다. 이들 사원은 일반에게 열려 있어 가족이나 청소년 단체, 전역 병사들, 연예인, 의회 의원들, 경찰이나 간수 등 인종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며 방문객들은 크든 작든 무엇보다 ‘마음챙김’의 혜택을 받고 있다.
틱낫한은 또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과 현대의 노예제도 근절을 촉구하는 서명에 참여하는가 하면 종교간의 이해와 다리놓기에도 남다른 힘을 기울였다. 특히 열린 기독교도들 과 일반 서양인들이 애독하는 <살아있는 부처, 살아있는 예수(Living Buddha, Living Jesus)> 같은 책을 통하여 특히 이 두 세계종교 사이에 서로 통하는 점과 만
나서 어울릴 수 있는 접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더불어 자연을 사랑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며 특히 동물에 대한 폭력을 줄이기 위해 동물 제품을 극구 삼가는 등 그의 행적에는 버릴 것이 참으로 없어 보인다.
틱낫한은 한평생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 공직에 나선 일도 없으며 수행과 저작으로 오직 평화와 화해에 매진해 왔다. 하지만 이른바 현실의 정치인들은 그를 지극히 정치적으로만 해석하고 상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거나 비난, 매도하고 행동을 제약하며 핍박하거나 이용하려 들기를 일삼았다. 이 무슨 기시감인지, 그런 따위의 태도는 이념의 좌우 진영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불교의 안팎이 거의 한통속이었다. 남베트남의 부패한 우파 정권은 베트남의 천주교화와 종교 불평등에 항의하는 그를 빨갱이라 덮어놓고 매도하였다.
베트남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고국을 생령을 산산조각 내며 엄청난 고엽제를 뿌리고 네이팜탄을 쏟아부으며 전대미문의 융단폭격을 계속하는 월남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평화를 호소하는 그에게 미국의 정부나 대중은 걸핏하면 용공주의자나 공산주의자의 딱지를 붙였다. 한국 사람들도 비슷하였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알아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덩달아 그런 딱지를 붙이기 일쑤였으며 아직도 그러는 사람들이 극히 일부에는 남아있는 듯하다.
남베트남 정부가 1966년 내린 입국 금지는 공산 통일이 된 후에도 그대로였던 것은 새 정권 역시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아서다.
그의 책은 여전히 금서로 묶였으며 오랫동안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긴 협상 끝에 가까스로 입국의 빗장을 들어 주었으니 실로 39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그러나 당국은 그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제한하여 본사인 투휴 절의 방문 등 최소한의 활동만 허용하였으니 이를 받아들인 그에게 기존의 불교인사 중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때까지 당국의 핍
박을 받아 활동이 금지돼 있던 월남연합불교교회(Unified Buddhist Church of Vietnam, UBCV)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정부 당국에 반대 성명서를 내라고 그에게 촉구하였다.
이러한 안팎의 곤경에도 불구하고 틱낫한은 2007년 다시 고국을 방문했지만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스님들이 아직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압제자들과 협상하여 재입국을 얻어 내는 그를 배신자로 몰기도 했다.
이에 자두 마을은 그의 입국 목적을 요약하여 공표했으니, 첫째는 그의 종파를 따르는 수행자들을 지원함이요, 둘째는 월남전의 상처를 치유할 대염불회를 기획하기 위함이요, 마지막으로는 수행자들과 일반 불자들의 결제를 지도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도 틱낫한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꾸준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불교의 여러 가지 가르침과 수행법이 서구의 심리학과 이어질 수 있는 접점을 모색하였으며 일반이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명상법을 전파해 갔다. 반야심경을 베트남 말로 다시 번역하여 새로운 시각을 보여 주었으며 인터비잉(interbeing)이란 용어로 바라밀다paramita)의 진면목을 다시 풀어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노력과 활동이 오래도록 쌓이자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마음챙김의 아버지요 참여 불교 운동의 태두로 일컬으며 의심 없이 받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불교를 서구인들에게 인식시키고 접목한 큰 스승으로 손꼽힌다. 많은 서양인이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배우며 헌신하였으며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각 분야에 적용하고 개발하며 널리 퍼뜨리고 있다. 하지만 이 크나큰 스승에게도 마침내 이승에 머무를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2014년 11월, 틱낫한은 가볍지 않은 뇌졸중을 맞아 쓰러졌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치료를 받아 약간 호전되어 걸을 수도 있게 되었으나 말은 할 수 없었지만 2016년에는 태국의 자두 마을로 날아가 대중과 함께 무리지어 풀밭을 거닐었다.
2018년, 당시 아흔두 살이 된 틱낫한은 자두 마을의 사람들에게 베트남의 본사로 돌아가겠다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아흔다섯이 된 2022년 1월 22일, 틱낫한 대선사는 마침내 본사인 베트남의 투 휴
절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튿어져 둘로 뜯겨 나가는 이 세상을 이어붙여 애꿎고 불쌍하게 죽어 나가는 중생들을 감싸고 여미면서 무지와 편견, 오해와 질시를 미워하지 않고 끝까지 어루만지며 일깨워 온 거룩한 발자취, 진영과 계층간의 화해, 문화권과 종교간의 이해에 몸소 물길을 트며 ‘평화 이루기’라는 오직 한(一) 가지 행(行)을 닦아 온 한 평생이었다. 49재 후 화장한 그의 재는 투휴 절과 몇 몇 자두 마을 관련 절에 뿌려졌다. 생전에 그는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나 죽으면 재를 가지고 탑을 세우려는 제자가 있나 본데 팻말에 ‘여기 존경하는 스승이 누워 있다…’ 라고 쓰려나 봐.

쓸데없는 짓 그만하라 해도 고집한다면 ‘난 거기 없어’ 라고 쓰라 이르지.
사람들이 못 알아먹고 물으면 다른 팻말에 ‘난 다른 데도 없어’ 라고 쓰게 해야지.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세 번째 팻말엔 이렇게 쓰라구. ‘너의 숨길이나 걸어가는 길에 내가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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