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불교⑦
태국불교의 개혁성향
개혁 기치를 내건
담마카야(法身=불교정법) 운동의 확산
글 이치란 박사 (원응 보검)
태국불교는 미얀마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불교와 함께 남방 상좌부의 종가(宗家) 역할을 하고 있다. 상좌부에서는 미얀마와 쌍벽을 이루는 쌍두마차와 같은 양대 산맥이다. 지금 인도불교가 8백년간 잠을 자다가 이제 다시 잠을 깨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상황이라면, 태국 미얀마 불교는 이런 인도불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좌부의 종가 역할과 기능을 해 오고 있다. 태국불교는 실론(스리랑카)에서 전파되어 왔지만, 실론에 다시 계맥(戒脈)을 전해준 역사를 갖고 있다. 인도에서 실론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였다. 실론 불교는 기원후 5세기 까지는 비
교적 안정적으로 지속해서 발전해오다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시련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실론 불교는 기원후 5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면서 어려운 역경에 봉착하게 되는데, 실론 섬 안에서의 전쟁과 남인도의 공격으로 실론 섬은 평화스러운 적이 없을 정도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불교는 피해를 입었지만, 명맥은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070년에 이르러서 폴론나루와 왕조의 위자야바후 1세 왕은 섬을 평정하고 불교를 재건하려고 하니, 수계를 줄 비구 5명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불교가 그로기 상태에 이르렀을 때, 특명 대사를 버마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벵골 만을 가로질러서 버마에 간 대사(大使)는 실론 불교의 사정을 설명하고 전계(傳戒)할 고승들의 방문을 요청하자, 버마 승가에서는 즉각 고승들을 파견, 수천 명의 비구들이 수계를 받게 되어서 실론 불교는 순식간에 다시 재건되었다.
상좌부의 생명은 부처님의 직설을 모아 놓은 삼장(三藏=경율론)을 공부하고 비구승가의 규율인 파티 목카(戒目=227개의 계율 조목)를 잘 준수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승가공동체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법률인 227가지의 규칙을 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비구(승려)가 되려면 이 계율을 지키겠다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이것이 수계식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상좌부에서는 부처님 시대 이후, 최초의 율장(律藏)에 의한 율사(律師)인 우빨리 존자로부터 기원하는 율맥(律脈)의 전수(傳受)이다. 율맥의 전수는 바로 상좌부의 생명을 이어가는 법통(法統)이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율맥보다는 법맥을 더 중시 여긴다. 법맥(法脈)을 누구로부터 받았느냐, 즉 전법심인(傳法心印=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은 비밀스런 마음의 도장)을 인가 받았느냐가 핵심이 된다. 한국불교에서 조계종의 종조가 보조다, 도의다, 태고다 하는 법통논란이 이런 법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방 상좌부에서는 율맥의 전수를 부처님으로부터의 비밀마음도장을 이어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11세기 실론에서 버마까지 가서 전계(傳戒)를 할 자격을 갖춘 고승을 초청해 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면 실론불교는 다시 시련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유럽으로부터의 기독교 선교사의 도래였다. 포르투갈, 화란과 브리티시는 식민지쟁탈과 함께 선교활동을 본격화함으로써, 실론 불교는 타격을 받게 되고, 이런 결과로 비구 승려가 씨가 마르게 된다. 이로써, 18세기 중엽 태국에서 전계할 고승을 초빙, 다시 수계를 줌으로써 시암니카야(시암종=태국종파)가 탄생하게 되고, 이후 또 버마에서 계맥을 전해옴으로써 두 개 파가 더 생겨서, 실론에는 3개의 종파가 있다.
인도-실론으로 이어지는 인도원형불교의 맥은 이처럼 인도-실론-버마-태국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버마와 태국에서 실론으로 逆 전파된 것이다. 실론은 인도-실론의 인도원형불교전통과 계맥에서 태국과 버마에 기선을 빼앗겨서 다소 그 정통성에 있어서는 기가 죽어 있는 상태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태국의 상좌부에 대한 전통과 계맥에 의한 비구승가의 정통성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기 때문에, 미얀마와 함께 상좌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종가라고 스스로 자임하고 있다. 상좌부에 대한 정통성과 계맥의 법통성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으면 태국불교 이야기는 풀리지가 않는다. 이제 태국불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자.
태국불교는 지금 보수냐 개혁이냐를 놓고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몇 년 전 푸미폰 국왕이 서거했는데, 그는 짜끄리 왕조의 9대 왕으로서 70년간 국왕의 지위를 유지했다. 푸미폰 국왕은 불교를 적극 후원하고 보호한 불교도 왕이었고, 왕 스스로가 실제로 비구생활을 할 정도로 불심이 대단한 분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증조부인 4대왕인 몽꿋은 비구생활을 27년간이나 했던 경력이 있을 정도로 짜끄리 왕조는 친 불교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다. 수도 방콕은 물론 태국 전역에 왕실과 관련되지 않는 사원이 없을 정도로 왕실에서는 사원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태국불교이다 보니, 불교와 왕실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한 사이이다. 그렇지만 왕실에서도 태국불교의 개혁성향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민심의 동향에 민감하다.
태국불교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이다. 권위주의적인 승가구조는 수 백 년 간 이어져 오는 태국불교의 전통인데, 승속(僧俗)의 엄격한 구분으로 재가신도들은 승가에 대한 존경과 공덕 쌓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복성향의 불교전통이 강하다고 하겠다. 승가생활도 이런 구조에서 쉽게 이탈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이런 환경의 태국불교에 습관적으로 의존하고, 불교란 이런 모습인가하는 수동적인 자세이지만, 반면에 교육받은 도시의 중산층들로서는 이런 불교전통과 관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시대에 맞는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때마침 왓 프라 담마카야 사원에서 이런 중산층 신도들의 성향을 파악이나 한 듯이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담마카야 운동을 벌이면서, 새 불교운동을 전개하자, 신도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자, 순식간에 담마카야 사원은 거대한 단체로 부상하게 되었다. 중산층 지성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담마카야(法身=불교정법운동) 운동은 방콕은 물론 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치인들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태국불교 승가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왕실에서도 이 담마카야 사원에 주목하게 되고 민심의 흐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문제는 기존의 태국승가에서 이런 신생 단체(종파)를 보는 관점인데, 수 백 만 명의 신도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뭔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태국 승가의 최고 수장(首長)인 상가라자(僧王=종정) 선출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담마카야 사원은 최근 다소 분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태국승가 최고 회의에서 담마카야 사원과 밀접한 고승을 승왕(종정)으로 내정했으나, 태국의 보수승가와 왕실 그리고 군부출신 정부에서는 이를 달갑지 않게 보고 있으며, 태국수상은 승가최고 회의에서 내정된 승왕의 임명을 형식상 국왕으로부터 인준을 받아야 하는데, 수상은 이를 홀딩하고 있는 차제에 푸미폰 국왕이 서거하자, 승왕 선출은 차기 국왕 대관식 후로 자동 연기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