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네 꼭지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명상 #3, 2022. 1. 23
극락행 천국행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거나 그 강물을 마시면 악업이 사라져 극락에 간다고 믿는 사람에게 부처님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갠지스 강의 물고기들이 맨 먼저 극락에 가겠네요.”
이렇듯 어디에 몸을 푹 담그고 있거나 어떤 형식적인 절차만 거쳐서 내 경력으로 만들기만 하면 자신이 한 단계 고차원으로 올라가서 무엇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지요. 우리 사회에 너무나 널리 퍼져 있는 일종의 미신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없거나 무엇을 안 한 사람은 보나마나 별볼일(?) 없는 사람이고 저질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입니다.
일례로 무슨 유명한 대학을 나왔다거나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해서 다 본받을 만한 최고의 사람은 아니듯이 어쩌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미천하다고 해도 어리석기만 하거나 상종 못할 야만인(?)은 아니겠지요. 실은 그 반대인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유명 절에, 어느 이름난 교회에 다녀 어떤 직책의 신도로 이름이 났으며, 어떤 스님이나 성직자와 잘 알고 지내며 어느 분을 어렵사리 친견했다거나 하는 것들은 종교의 본질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큰 금전적 보시나 기부를 했다거나 남들이 하기 어려운 어떤 과정을 거쳤다거나 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고 종교적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른바 극락행이나 천국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설사 갠지스 강에서 하루에 목욕을 백 번 하고 매끼에 밥 대신 강물을 한 바케스씩 퍼서 억지로 마시더라도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버릴 ‘마음’이 없다면 극락 근처에도 못 갈 것 입니다.
명상 #10, 2022. 3. 13
국자는 국맛을 모른다
사위성에 어느 늙은 바라문이 살았는데 재산은 많았지만 완고하고 어리석은데다가 몹시 인색하고 탐욕스러웠습니다. 그는 특히 크고 화려하게 자기 집 짓기를 좋아해서 그걸 챙기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그가 해를 넘기기 전에 죽을 줄을 알고 이를 가엾이 여겨 그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수고가 많으시오. 집을 이리 크게 지어 누가 살려고 하오?”
노인은 자랑스레 대답했습니다.
“앞 사랑채에서는 손님을 접대하고 뒤 별당에는 내가 거처하지요. 저쪽 집엔 자식들이, 이 쪽 집에는 종들이, 저 창고에는 재물을 쌓아 둡니다. 여름에는 저 시원한 다락에 오르고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서 지낼 것입니다.”
“마침 당신의 생사에 관한 일이 있어 일러주고 싶은데 잠시 일손을 놓으시지요.”
품삯 주는 것이 아까워 몸소 채양 다는 일을 하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지금 한창 바빠서 안되니 다음에 듣도록 하지요.”
부처님이 그 집을 나온 후 노인은 손수 서까래를 올리다가 머리에 서까래가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 읊으시되,
“어리석은 이가 슬기로운 이를 스쳐 지나감은 국자가 국맛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 어진 이가 슬기로운 이와 사귐은 마치 혀가 국맛을 아는 것과 같도다.”
우리는 이렇듯 중요한 일을 귀띔하고 일러주어도 제 고집과 탐욕에 절어 무감각하게 놓치는 국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같은 모임에 섞여 앉아 같은 가르침, 같은 말을 들어도, 같은 사이트에서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정보, 같은 뉴스를 보고 들었어도 아무런 감각이나 변화도 없이 국자 그대로인 이도 있고 감수성이 민감한 혀가 되는 이도 있습니다. 태어난 자연 그대로, 갖가지 맛을 맛으로 느낄 줄 아는 혀가 되어야겠습니다.
명상 #12, 2022. 3. 26
지도
우리는 지도를 보고 길을 찾습니다.
땅 모양이 어떻게 생겼으며 강과 시내는 어떻게 굽이쳐 흐르는지, 사람들은 어디에 모여 살며 마을과 도시를 이어주는 길은 어떻게 걸쳐져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맞뚫레가 뚫려 있고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도 배가 닿을 수 있는 포구가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가 땅이나 바다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 모양을 줄이고 추려서 쓰임새에 알맞도록 필요한 사항만 평평한 종이 위에 그려 넣은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다 자연과 인공의 모든 정보를 자꾸 집어넣어 죄다 표시한다면 지도는 점점 복잡해지고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고 충실하게 만들더라도 땅의 크기 만한 지도를 만들 수는 없겠지요.
설사 그런 지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지도가 아니라 쓸모없고 거추장스런 흉물이요 괴물일 것입니다.
경전도, 경전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길을 찾도록, 누구에게나 두루 쓰임새 있게 꼭 필요한 고갱이만 일러주는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지도이지요.
그러니 그 가르침에 기대어 길을 찾되 혹시라도 안내가 엉성하고 업데이트가 제대로 안 됐다고 불평하실 것까진 없겠습니다.
경전의 말씀이 나 개인의 일상사 하나하나를 미주알고주알, 어린아이 입에 밥 떠넣어 주듯 구체적으로 죄다 일러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약 그런 경전이 있다면 그것은 땅만큼 거추장스럽게 큰 지도처럼 이미 경전이 아닐 것입니다.
이정표는 필요하되 길은 결국 스스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명상 #19, 2022. 5. 14
인도 불교의 쇠망에서
부처님은 오늘날의 네팔 땅인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카필라 왕국에서 자라셨으며 출가하여 성불하신 후 주로 북인도를 중심으로 전법하시다가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하셨습니다.
그후 인도에는 불교가 번창하여 사방으로 퍼져나가 결국 이곳 미국땅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고향인 인도에는 오래 전부터 불교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현재 14억이라고 하는 중국의 턱밑에 다다른 13억 8천의 인도 인구 가운데 거의 80%가 힌두교도입니다.
그 다음이 이슬람 교도로 거의 11%에 이르며 기독교도도 2.5%에 이릅니다.
그러면 불교도는 얼마나 될까요?
1%에도 못 미치는 0.7%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러 분석이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짚어집니다.
첫째, 생활불교, 풀뿌리 불교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일단 번창하자 많은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형이상학과 이론에 몰두하여 민중들의 고달픈 삶과는 거리가 멀어진 너무 고차원적이고 현학적인 불교가 되어 갔습니다.
교리는 세밀히 발전하고 종파는 뻗어나갔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민중의 밭에 뿌리를 박지 못하고 공중에 떠버렸으니 한 번 모진 바람이 불자 불교는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것이지요.
둘째, 힌두교와의 습합으로 정체성을 잃어 갔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밀리던 힌두교는 자각하고 쇄신하며 교묘히 불교를 끌어들여 부처님을 여러 힌두신들 가운데 하나로 자기들 성전 한 구석에 모셔 두고는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기복신앙의 차원에 머물던 많은 민중들은 좋은 게 좋다고 부처님께도 빌고 힌두 신상들에도 빌다 결국 모두 힌두교도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세번째가 이슬람의 침략입니다. 마지막 결정타이지요.
모든 사원은 파괴되고 스님들은 집단으로 학살당하였으며 살아남은 신도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힌두교는 살아남아 결국 노도와 같은 이슬람의 파도를 막아내었으며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오히려 번창해 갔습니다.
민중의 등에 업힌 자는 도망쳐 살아남았고 민중의 등에서 내려놓여진 자는 홀로 버려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을 너무 숫자만 가지고 연연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그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개인의 성실한 수행은 물론이거니와 ‘생활불교를 하라’
‘불교가 일상생활과 관혼상제에 뿌리를 박도록 하루 바삐 방편을 찾으라’가 그 교훈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