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진전을 위한 인忍
보시 수행
글 상욱스님
2011년 자우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 수지,
봉녕사 승가대학 수학
2016년 비구니계 수지, 위봉사,
대원사에서 제방 참선 수행
2019년~ 영화 선사의 지도하에 수행 정진 중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열심히 합니다. 경을 읽고 좌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절을 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정해 몇 시간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때로는 내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낍니다. 전처럼 화를 덜내고 욕심이 줄어들고 남을 더 배려하게 됩니다. 내 마음의 번뇌를 볼 수 있는 힘이 더 커지고 번뇌를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해도 제자리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화를 다스리기 힘듭니다. 똑같은 상황에 계속해서 번뇌가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라면 근본적으로 내 수행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과법이 있습니다. 나의 수행에 진전이 있기 위해서는 적절한 ‘인忍’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인’은 ‘복’입니다. 복은 비단 수행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기 위해서는 복이 필요합니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돈복이 필요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배우자복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공부 복이 필요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는 수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수행복은 어떻게 쌓을 수 있습니까? 수행의 복을 쌓기 위해서는 보시 수행이 먼저 행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수행 가운데 보시가 제일 처음으로 언급이 됩니다. 보시를 행해서 복이 쌓이면 자
연스럽게 계를 지킬 수 있고 계를 지키면 인욕이 키워집니다. 다음으로 정진 바라밀을 수행하면 선정과 지혜가 자라납니다. 그래서 보시가 수행의 기본이고 보시의 복으로 수행은 계속 진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처음 출가한 행자들은 바로 참선을 시키지 않고 복을 짓도록 공양간에서 일을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복을 충분히 지은 후에 강원을 가고 참선을 하여야 장애가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시는 다 같은 결과를 가져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 혹은 누구에게 보시를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42장경에는 보시의 상대에 따라 보시로 얻는 공덕이 다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범상한 사람 백을 공양하는 것이 착한 사람 하나를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착한 사람 천을 공양하는 것이 다섯 가지 계행 지키는 사람 하나를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다섯 가지 계행을 지키는 사람 만(萬)을 공양하는 것이 수다원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수다원 백만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사다함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사다함 천만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아나함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아나함 일억만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아라한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아라한 십억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벽지불 한 분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벽지불 백억 분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 한 분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부처님 천억 분을 공양하는 것이 한 분의 무념[無念], 무주[無住], 무수[無修], 무증[無證]한 분께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이처럼 공양을 받는 이의 수행력에 따라 그 돌아오는 복은 다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대중공양을 합니다. 여러 스님을 초청해서 공양을 올리는데 그 중에 한 명의 깨달은 사람이 있으면 공양을 올림으로써 얻는 복은 매우 큽니다.
수행이 진전하기 위해 수행의 복은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요? 수행의 복을 쌓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내가 수행하고자 하는 수행법, 수행도량, 선지식에 복을 지어야 합니다. 대승불교를 수행하고 싶다면 대승불교를 수행하는 절에 가서 복을 지어야 합니다. 어떤 수행처에서 장애없이 수행을 하고 싶다면 그 수행처에 복을 심습니다. 특정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 그 선지식과 선지식이 머무르는 도량에 복을 짓습니다. 선지식의 수행처에서 일을 하거나 선지식의 일을 도움으로써 복을 쌓습니다. 특히 수행의 진전에 있어서 선지식의 복이 매우 중요합니다. 선지식은 눈 밝은 스승입니다. 그는 이미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간 사람이고 그 길을 감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이 있는지 잘 알아서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선지식의 복을 쌓기 위해서는 그 선지식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선지식이 있는 도량에 가서 일을 하고 복을 지어야 합니다. 선지식의 일을 도와야 합니다. 만약에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불보살님께 청을 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선지식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을 하면 반드시 불보살님은 우리를 도와줍니다. 수행은 어두운 길을 혼자 더듬거리며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앞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때 눈밝은 선지식이 옆에서 인도를 한다면 목적지에 훨씬 안전하고 빠르게 도달할 것입니다.
이처럼 보시는 수행의 진전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절대로 보시의 대가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보시를 할 때 보시하는 나도 없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없고 보시를 하는 물건도 없습니다.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합니다.
보시를 하되 보시를 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이 보시로 내가 복을 지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보시로 상대가 나에게 뭔가를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보시를 하고 나면 완전히 그것에 대해서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시입니다.
수행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시를 행해야 합니다. 보시의 기본마음은 내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득을 챙기는 것이 아닌 기꺼이 손해를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시 수행을 계속하면 어느새 나의 탐진치가 줄어들고 번뇌로운 상황에 여여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