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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3. 3월호] 수불큰스님과 만난 사람들-스텔라 박

작성자무량수|작성시간23.05.19|조회수130 목록 댓글 0

 

 

수불큰스님과 만난 사람들 (1)

 

 스텔라 박

 

 

“근본에 철저하게 사무쳐 마음의 실상을 자각해야지만, 생사일대사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의 요점은 명안종사를 만나 바른 공부법과 인연을 맺는데 달려
있다. 이 공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먼저 선지식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근본을 의심하여 끝내 마음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바른 길
이다. 부처님 이하 역대 조사들께서 그것을 증명하여 전등해주신 것이다.”

 

- 수불큰스님

 


 

 

 

지난해 10월 문을 연 대한불교조계종 안국선원 LA 분원(조실 수불스님, 총무 덕우스님)에는 일요일 법회 때마다 여러 법우들이 방석 위에 고요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다.
기자는 지난 2018년 9월 UCLA에서 열렸던 ‘국제 간화선 학술 대회’에서 처음 수불 큰스님을 친견했고, 안국선원 LA 분원 개원식 때 또 한 차례 큰스님을 뵈었다. 스님은 그때마다 활구 참구의 중요성, 눈 밝은 선지식과의 만남과 가르침을 강조했다.
수불큰스님이라는 선지식과 연결돼 있어서일까, 안국선원 LA분원의 법우들은 기자의 눈에 유난히 편안해보였다. 수불큰스님이라는 선지식과의 만남, 그리고 선지식과의 가열찬 간화선 공부는 과연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수불큰스님께서 이끈 최초의 LA 간화선 공부에 참여했던 법견성(회장) 보살과 한국에서부터 큰스님과의 공부 인연을 맺어왔던 선월범(총무) 보살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가벼워지고 심플해지고
놓아졌다

 

법견성(70세)
현재 안국선원 LA 분원 신도 회장.
수불큰스님의 LA 2호 제자로 2000년으로부터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여년의 세월 동안
수불큰스님을 보필했고,
총 6년이 걸린 안국선원 LA 분원 불사를
직접 담당했다.

 

 

큰스님과의 첫 인연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2000년 9월 수불큰스님께서 LA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간화선 지도 모임을 주도하셨는데, 그때 참가하는 행운을 안았었습니다. 당시 저는 수불 큰스님이 누구인지도, 안국선원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어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당시 저는 선지식을 만나게 해달라는 발원으로 천일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요. 포교사 가운데 한 분이 수불큰스님께서 LA에
오셔서 간화선을 지도하실 예정이니 한 번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그 시기가 딱 제가 천일기도를 마칠 즈음이었어요. 그렇게 선지식을 만나 공부할 기회가 찾아오더군요. 그렇게 해서 당시 로텍스 호텔 콘도에 방을 얻어, 먹고 자고 하면서 10일간의 간화선 집중 공부에 들어갔습니다.

 

큰스님께서 어떤 화두를 던지셨나요?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는데 큰스님께서는 손가락을 들면서 “누가 이것을 구부리는가?” 하고 물으시며 30명의 참가자들에게 동일한 화두를 던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가며 답을 물어보셨어요. 그 물음에 대해 어떤 사람은 “마음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어떤 사람은 “내가 합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했는데 스님은 이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주일의 집중 공부 기간이 끝나갈 무렵 스님께서 잠깐 브라질에 다녀오셔야 했어요. 그때 30명의 참가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집에 돌아갔는데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했던 5명은 저녁에 방석 하나씩을 챙겨 가지고 스님이 머무시던 호텔 방에 찾아가, 다음 날 출국하시는 스님을 붙잡고 마지막 정진을 했습니다.
저 역시 큰스님 앞에서 마무리 정진을 했습니다. 그 날 밤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가운데 커다란 울림이 있었고, 새벽 1시경 큰스님으로부터 마지막 점검을 받았습니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35명 가운데 나머지는 모두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했어요. 끝까지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스님께서 2명을 점검해주셨습니다. 첫번째 점검해주신 분은 안국선원 LA에 나오지 않아요. 그리고 두번째 점검해준 것이 저입니다. 그렇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제가 LA의 수불큰스님 간화선 공부의 선배가 된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점검할 때 던지는 질문은 사람마다 다 달랐어요. 저에게는 “뭐를 봤습니까?” 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대답 대신 그냥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브라질로 떠나셨던 스님은 일주일 뒤에 오셔서 3일을 더 계셨는데 그때 또 한 분이 스님으로부터 공부에 대한 점검을 받았습니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음식이 마치 모래 씹는 것 같았고 잠깐 눈을 붙일 뿐 잠도 오지 않더라고요. 화두가 들리면 화두에 집중하느라 나도 모르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10일간의 간화선 공부를 마치고 난 후를 그 전과 비교한다면요?
전에는 나를 비춰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환희심이 정말 컸었습니다. 그 큰 환희심으로 3개월을 웃으며 보냈습니다. 입꼬리가 늘 귀 밑에 걸려 있어서 입이 아플 정도였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이 보고서 “좋은 일 있죠?” 라고 하더군요. 나를 알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이런 날이 나에게도 오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기쁘고 환희심에 가득 차서 남편에게도 정말 공손하게 대했었습니다. 삶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일어나도 괴로울 게 하나도 없더군요. 몸이 아픈데도 웃음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좋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그 환희심은 사라졌어요.

 

보살님이 이해한 큰스님의 법은 어떤 건가요?
아직까지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큰스님과 공부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한 후 10년 째에 알아지는 게 있고, 또 더 세월이 흐른 후에 알아지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 깨달아지는 게 무엇인지 잘 표현을 못하겠었는데 이제 스스로가 알겠더군요. 전에는 부처님 말씀을 봐도 무슨 뜻인지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공부를 하고 나니 “아, 이게 이 말이었구나” 라고 알겠더라고요. 스님은 간화선 가르침을 펴시면서 무엇보다도 재가불자들에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자 한 것 같아요. 마음의 편안함을 가질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된 것이죠. 사람마다 다 업이 달라서 다르겠지만 정말 그 무엇보다도 가벼워져요. 그리고 복잡했던 것도 심플해져요. 그리고 그냥 놓아져요.

 

그 후로는 어떻게 계속 수행을 하셨나요?
크게 수행한 것은 없지만 그냥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적어도 30분씩 앉아있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공부를 했는데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지. 내 앞에 닥친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해주자. 싫어하지 말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냥 생활 속에서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만이라도” 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20년을 살아왔습니다.

 

안국선원 LA 분원의 불사를 거의 도맡아하셨는데요, 어떻게 그리 큰 마음을 내게 되었나요?
큰 마음 낸 것은 아니고, 그저 “내 앞에 닥친 것은 그냥 하자” 하는 마음으로 해냈습니다. 처음에 1543 West Olympic Blvd.의 건물을 임대해서 안국선원 LA 분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 불이 나서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대할 만한 곳도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수불큰스님에게 “사정이 이렇니 차라리 건물을 구입하는 것이 어떨까요?” 라고 여쭸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건물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건물을 봤는데 마음에 차는 게 도무지 없더군요. 그러다가 아담스에 있는 이 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무엇보다 땅이 넓어서 주차장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건물이야 어차피 사찰, 선원으로 사용하려면 리모델링을 해야 하니까 좀 낡았더라도 개의치 않았었습니다. 역사적 건물(Historic Building)인 것은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적지(Monument)이기도 하더라고요. LA 건축법은, 역사적 건물이면 외관을 바꿀 수 없고, 유적지일 경우는 인테리어 구조를 바꾸지 못해요. 그래서 복구(Restoration) 작업을 해야 했습니
다. 스님께 건물의 사진과 함께 설명을 보내드렸는데, 나중에 모뉴먼트인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스님, 어렵겠어요. 돈도 많이 들어갈 것 같아요. 에스크로 중이니 지금이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는데 스님께서 그냥 진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훗날 스님이 와서 보시더니 선원의 터가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불사를 맡아 하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우리 집, 사고 파는 것을 몇번 해본 경험 밖에 없었고, 평생 북키핑 일밖에 한 게 없어요. 정말 건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맡아할 사람이 없다보니 “못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안 나오더군요. 그래서 그냥 맡아했습니다. 다행히 은퇴 뒤라 만사 제쳐놓고 선원 복구 작업에 매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3-4일은 나와서 하루 종일 시청과 선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했습니다. 나오지 않는 날도 집에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하며 일을 진행시켰죠. 선원 불사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이렇게 고쳐놓고 보니 정말 큰 보람이 느껴집니다.

 

수불 큰스님께서는 지난 20년간 LA에서 간화선 공부를 몇 차례나 실시하셨나요?
총 5번 했는데 그때마다 제가 LA에서 간화선 공부의 선배이다 보니 항상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공부를 주도하게 됐습니다. 간화선 집중 공부가 있을때마다 수행의 후배들을 위해 공양을 준비해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간화선 공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내가 해보니까 이렇게 하는 게 좋더라.” 라는 얘기도 들려줍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냥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봐줘요. 그렇게 지켜봐주는 것이 가장 크게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불교계에서는 초기 불교 수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큰 것 같아요. 수불큰스님과 공부한 후, 초기
불교 수행을 해보고 싶다거나 다른 선지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한 번도 다른 가르침에 눈을 돌린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이 한 길만 따라왔어요. 저는 46년 전 결혼과 함께 불자가 됐습니다. 신행 생활 초기에는 신심을 키웠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천일기도도 하고, 3천배도 하고요. 결혼 후 5년째 되는 해에 미국으로 이민와서도 기도에만 주력했습니다. 그러다가 관음사에서 불교 교리 공부를 하고 난 후에는 절에서 봉사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 이해, 실천, 체득을 따라서 한 것이죠. 요즘은 “부처님께서 우리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계속 하다 보면 부처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다” 하는 마음으로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냥 “내 앞에 오는 것을 해나간다” 라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해나갈 뿐입니다.

 

대불사를 하는 과정에서 스님의 가르침과 그 방식대로의 수행이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이 터가 다 쓰러져 가는 집이라서 복원을 하는 지난 6년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수불큰스님과 공부를 하지 않았고, 제가 어떤 공덕을 바랬었다면 저는 결코 이 큰 불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 해요. 그만큼 스님과의 공부가 제게 큰 힘을 주었기때문에 그 모든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큰스님과의 공부가 개인적 삶에 있어서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스님께서는 늘 “하다가 힘들면 예전에 공부했을 때를 살짝 들여다보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래서 힘들 때면 잠깐식 그때를 들여다보고,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곤 합니다. 그 전에는 남을 보고 비판을 했다면 지금은 안으로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죠.
가정 생활도 평안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난 후 남편이 불자라서 불자가 됐거든요. 남편도 다른 절에서부터 많은 봉사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저를 많이 이
해해줍니다. 안국선원 불사를 할 당시, 제가 자궁암 수술을 받았었는데, 배를 움켜쥐어 가며 일을 할 때 남편이 운전을 해주는 것을 비롯해서 정말 많은 도움을 줬어요.

 

주변에서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포교를 하시는지요?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 먼저 불법이나, 수행을 권하지 않아요. 그냥 사람들이 저의 행을 보고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면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안국선원에 가자고 먼저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격상으로도 그런건 잘 못해요. 바라건대 저의 행을 보고서 “저 사람, 정말 진실한 불자이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라는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 뿐입니다.

 

 

 

본래의 자리를 아니까 항상 집으로 돌아가요

 

선월범(47세)
현재 안국선원 LA 분원 총무.
대학생 시절부터 수불큰스님과 함께 공부했고 4년 전 온 가족이 이민온 이후에는
안국선원 LA 분원에 나와 봉사하고 있다.

 

 

대학생 때부터 수불큰스님과 공부를 하셨다면서요?
어떤 계기로 공부하게 되셨나요?
제가 대학교 3학년이었던 여름 방학 때였어요. 엄마가 스님께 인사드려야 한다면서 저를 데리고 안국사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한 보살님께서 저를 보시더니 공부하면 좋겠다면서 저를 그 자리에서 그냥 끌고가다시피, 부산 안국선원 선방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집에도 못 가고 엄마가 가져다주는 옷을 갈아입고 선방에서 먹고 자고 공부를 했습니다. 보통 스님과의 간화선 공부는 일주일이면 된다고 하던데 제 경우는 28일, 거의 한 달 가까이를 부산 안국선원에서 지냈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한 공부가 간화선인지도 모르고 했었어요. 공부를 하고난 뒤, 세월이 지나면서 제가 했던 공부가 간화선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저는 어렸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도 공부를 한 것을 보면 인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어떤 화두를 주셨나요?
그때 저를 안내했던 보살님의 손을 잡고 수불큰스님 처소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스님이 저를 멈추게 하시더니 “그 한 발 내딛는 놈이 누구인가”?” 라고 물으시며 이를 참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도망가고 싶지 않았어요.

 

대학교 3학년이면 연애 하고 대학 생활 하느라 마음이 분주했을 시기인데 간화선 공부가 마음에 들어왔나요?
연애는 하지 않았었고요. 남들처럼 일주일 만에 공부를 마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나했고, 또 공부를 마치고 난 후에는 주위의 보살님들이 계속 선원에 와야 한다고 해서 그냥 계속 다녔습니다. 대학 생활 중에도 항상 선원이 먼저였어요. 일요일마다 청년 법회에 참가했고, 약속은 모두 오후에 잡았었습니다. 하지만 그 생활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뭔지도 몰랐지만 순전히 불교와 인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다른 생각 하지 않고 꾸준히 스님과 연결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의 언어로 큰 스님으로부터 배운 법을 표현하자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냥 ‘나를 아는 것’이라고 할까요? 스님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봤던 나를, 내 본래의 자리를 아니까 항상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가끔씩 흔들릴지라도 다시 돌아갈 집이 있는 거죠.
처음 공부할 때는 주변 분들이 공부를 가리켜 “좋은 것”이라고는 하는데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면서도 “그런가보다”, 하고 왔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이 공부가 진짜 귀한 것임을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도 자식인 저에게 만사 제쳐두고 이 공부를 시키려고 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공부로 인해 살아가는 데도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첫 공부 이후 25년 정도 수행을 해오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신기하게 그런 게 없었어요. 제가 미국에 온 것도 그냥 남편이 “가자” 해서 이민 가방 5개 챙겨서 애들 데리고 왔는데요. 이민 오면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어떻게든 살겠지, 살아지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오지 않은 앞날에 대해 걱정하거나 고민하거나 두려워하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삽니다. 수불큰스님은 늘 “살얼음 딛듯 살아라.” 라고 말씀하세요. 처음에는 “내가 이 공부를 했는데 두려울 게 뭐 있
어?” 했습니다. 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까요? 정말 두려움 없이 살 수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건 어쩌면 젊은 혈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살면서도 살얼음 걷듯이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스님의 말씀을 더욱 깨달아가고 있어요.

 

지금 현재는 매일 어떤 식으로 수행을 하시나요?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다른 도반들처럼 딱 정해진 시간에 하지도 못하고, 긴 시간을 수행하지도 못해요.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서 잠깐, 자기 전에 잠깐 수행합니다. 일하면서도 중간 중간씩 수행해요. 그렇게 잠깐이라도 내 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해서 하루를 잘 버텨냅니다. 처음 스님 만나 깨우친 자리에서 잠깐 생각을 따라 나갔다하더라도 항상 다시 돌아옵니다. 사람이다 보니 생각이 끊이지 않잖아요. 그래도 다시 돌아오고 다시돌아오고 해요. 그러다보면 고요해져요.
안국선원 식구들끼리 있으면 잘 몰라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수행과 연이 없으셨던 분들을 보면, 그리 정진을 많이 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그분들과는 힘이 다르다는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수불큰스님과 이 공부를 하고, 또 열심히 정진하는 분들은 정말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삶에 불만이 있어도 공부한 사람들은 돌아오려는 원천의 힘이 있잖아요. 타 종교인들처럼 매달리는 게 없으니까 제각각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 꾸준히 방황하지도 않고, 다른 종교, 다른 스님에게 가보지도 않고 오롯이 이렇게 오신 건가요?
네, 그냥 수불큰스님을 처음 만나고 그 이후 계속 안국선원에 다니고 다른 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다행히 미국에 왔는데 안국선원 LA 분원이 복구공사를 마친 상태여서 또 갈 곳이 생긴 거에요. 그래서 주저 없이 이곳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스님 법이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냥 판단하거나 시비를 많이 안 일으킵니다. 살다 보면 “저 사람 왜 저래?”, 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들잖아요? 그런데 그럴 때 그냥 “저 사람은 저런 게 있나 보다”, 라고 여기고 “그저 그럴 뿐” 합니다. 그리고서 곧 저를 돌아봅니다. 그러다보니까 저는 그 무엇보다 가정 생활에서 정말 큰 혜택을 본것 같아요. 큰 아이가 사춘기 때, 다투다가도 “내가 왜 이렇지?” 하면서 돌아보니, 관계 회복이 빠르더 라고요. 딸 셋도 제가 키운 게 없어요. 그냥 자기들
이 알아서 컸어요.

 

안국선원 LA분원의 총무 직을 맡고 계신데요. 현지인 포교에 대한 큰스님의 포교를 어떻게 도와드리려 하시나요?
제가 총무 직을 맡은 것은 연세 드신 분들이 많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젊은 제가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선원의 장래 비전이 어떤 것이든, 큰스님 의도하시는 게 있고 그것을 따르는 주지스님이 계시니까, 저는 그것에 발 맞춰서 잘 따라 드리며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4월 23일부터 일주일간 안국선원 LA분원
에서는 수불큰스님을 모신 가운데, 간화선
특별 공부 행사가 열린다.
참가 신청
안국선원 LA 분원
(LA Anguk Zen Meditation Center)
3115 W Adams Blvd Los Angeles, CA
90018.
전화: 213. 358. 9420
주소: 3115 W. Adams Blvd. LA 90018
이메일 : laseoncen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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