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불교⑧
태국승가의 보수파와 진보파
인도-실론 원형불교
전통 계승하는 태국불교의
보혁 세력
태국의 현대불교는 남방 상좌부 전통만이 아닌 대승불교권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른바 대승불교권이라면, 동아시아 불교전통과 티베트 불교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티베트 불교권은 동아시아 불교권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 불교권은 중국 한국 일본 대만 베트남지역이다.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기원전후에 서역(페르시아-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전해진 인도북부와 북서부지방의 불교전통이다. 이 무렵 인도에서는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로서, 막 대승불교가 흥기(興起)하고 있을 때이다. 북방으로 전해진 불교는 실론이나 인도 남부지역으로 전해진 부처님시대의 불교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인도남부와 실론으로 전해진 불교는 인도의 원시 즉 초기형태의 불교를 생명처럼 지키면서 장로파(長老派)의 정통성(正統性)을 계승하여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므로 빨리어에 의한 삼장(三藏=經律論)의 호지(護持)와 실천에 주력했고, 그것은 승가공동체(僧伽共同體)란 승원주의(僧院主義)에 입각하고 있다. 남방 상좌부는 대체로 이런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착실하게 이런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태국불교는 이 남방 상좌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에 중국으로 전해진 대승불교는 사상면이나 승가의 형태나 공동체 조직이 조금은 다르게 변화되어 왔다. 이미 중국에 전파되기 전에, 이른바 대승 불교란 이름으로 변화를 겪은 불교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변화란 변용된 개혁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원형불교가 인도 북부 또는 북서부로 북진 하면서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처님이 주로 활동했던 마가다 지역은 갠지스 평원이다. 하지만 인도의 북부지역은 히말라야의 산악지형이 시작되는 카슈미르 간다라 지역이다. 이 지역은 기원전부터 일찍이 페르시아-그리스 문명과 충돌하면서 인도-그리스왕국이 존재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인도-그리스왕국을 밀어내고 들어선 것은 쿠샨왕조(기원후 30년-375년)이다. 쿠샨왕조는 타지키스탄, 카스피 해,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제국으로 월지 민족이 세웠는데, 원래 타림분지의 초원에서 살다가 흉노에게 밀려서 그리스왕국인 박트리아를 물리치고 자리를 잡았으며,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등과 교역을 했다.
흔히 대승불교하면 쿠샨왕조의 카니슈카 대왕을 떠올리는데, 그가 제4차 경전결집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열반 이후 지금까지 6차 경전결집회의 가 공인되고 있는데, 제3차는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이뤄졌고, 제4차는 두 곳에서 개최됐는데, 남방 상좌부는 실론에서, 북방은 쿠샨제국에서 개최되었다.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쿠샨제국에서 개최된 제 4차 경전결집에서 채택된 텍스트였다. 실론에서 개최된 결집회의는 빨리어가 그대로 경전어였다면, 쿠샨제국에서 열린 결집회의의 경전어는 빨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전개된 불교는 산스크리트(梵語) 텍스트에서 한역(漢譯)되었는데, 주로 월지출신이나 페르시아 계 승려들이 역경(譯經)에 참여했다.
위에서 북방 대승불교의 탄생에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전제했는데, 그것은 지리환경적인 요인이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페르시아 문명과의 접촉에 의한 변화를 의미한다. 당시 쿠샨제국은 인도-그리스왕국 플러스 페르시아 문명권을 접수했기에 다언어 다종교사회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쿠샨제국의 초기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는데, 기원후 127년까지였다. 기원후 127년부터 박트리아어 (이란계)가 공용어로 대체되었다. 월지족은 쿠샨제국을 세웠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그리스인과 박트리아인(이란계)이였다. 비공식 종교언어는 간다리어(산스크리트어계), 소그드어(이란계), 이란계방언과 산스크리트어였다. 종교는 불교, 힌두교, 샤머니즘,
조로아스터교, 마니교와 기타 박트리아(이란)와 인도계의 소수 종교들이었다. 종합해서 정리한다면, 쿠샨제국은 다언어 다종교사회로서 국제성을 띤 다문화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이런 다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촉발된 개혁성향의 새 불교였던 것이다.
이 정도 선에서 대승불교 흥기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고 태국불교 이야기로 돌아가겠지만, 한마디만 더 첨언한다면 이런 다문화에 의한 대승불교의 배경을 가진 쿠샨-이란계의 승려들이 실크로드 무역 루트를 타고 장안과 낙양에 진출했던 것이다. 초기 중국불교의 역경가로서 지(支)자 돌림의 지루가참(支婁迦讖=로칵세마(Lokaksema), 지량, 지겸과 지둔 등은 쿠샨제국 출신의 월지족 들이다. 또한 안(安)자 돌림의 안세고는 안식국(이란계) 출신인데, 이들을 그레코-불교계의 승려들로 보는 것이다. 그레코-불교(그리스-불교)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현대 아프가니스탄, 인도, 파키스탄의 영토에 해당하는 박트리아와 인도 亞 대륙 사이에서 발전한 그리스주의 문화와 불교의 문화적 혼합주의를 의미한다. 그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서 인도에 그리스인 진출로 시작되고, 인도-그리스 왕국의 설립에 의해 추가로 실시하고 그리스화한 쿠샨 제국의 번
영 동안 연장된 상호 작용의 긴 일련의 문화적 결과로 탄생한 불교를 말한다. 그리스-불교는 결과적으로는 인도불교를 뼈대로 했지만, 대승 불교의 예술과 대승사상에 철학적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보며, 궁극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 시베리아, 베트남으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태국의 현대불교를 논하면서 기원전까지 그것도 인도 북부지역으로 소급되었는데, 이런 글쓰기는 이미 ‘현대세계불교를 연재하며’ 서두에서 밝힌바 있다. 동서고금 남북을 가로지르지 않으면 불교란 종교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의 시각을 갖고 태국불교를 보면 동아시아의 불교인 중국, 한국불교와는 뿌리는 같을지라도 사상과 외형이 다르고 타종교처럼 이질감까지도 느껴지게 되는 이유이다.
인도-실론의 원형불교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태국 불교 승가는 크게 두 파가 존재하는데, 마하니카야파와 담마유티카 니카야(담마윷)파가 그것이다. 여기서 니카야란 용어는 수집(收集)、집합(集合)、분류(分類)、군체(群體)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마하니카야파라고 하면 다수파를 의미하는데, 현재 태국에서는 다소 진보성향의 승가를 말하고, 담마유티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룹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정법(正法)지향의 의지가 강한, 다시 말하면 계율상으로나 승가의 전통에 있어서 정통성을 고수하는 정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의 상좌부권에서는 대개 미얀마와 태국 그리고 캄보디아에 담마유티카 니카야파가 있는데, 인도원형불교 특히 승가공동체 전통에서 비구들의 계율면에서 근본주의를 따르고 지키려는 보수성향의 원칙주의를 말한다.
반면에 마하니카야파는 담마유티카 니카야파를 지향하는 비구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당연하게 마하니카야 파가 되는데, 그렇다고 인도의 원형불교전통을 따르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세부적인 계율조목의 관점에 있다. 이를테면, 남방 상좌부의 비구들은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는데, 마하니카야파에서는 우유를 마실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담마유티카파에서는 물과 차 이외에 어떠한 음식이나 우유도 허용하지 않는 원칙주의를 고수한다. 사원 밖으로 탁발을 나갈 때, 담마유티카 파에서는 맨발로 다니지만, 마하니카야파에서는 슬리
퍼를 신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태국불교에서 이 보수 원리주의 파를 창설하신 분은 본인이 직접 비구생활을 27년간이 한 바 있었던 와지라나노 비쿠(Vajirañāṇo Bhikkhu)에 의해서 1833년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그는 짜끄리 왕조의 라마 4세로서 제 4대왕인 몽꿋 왕(재위: 1851-1868)이 되었다.
나중에 라마 4세가 되었지만, 그가 비구로 있을 때 태국불교는 너무나 무질서하고 승가의 기강은 땅에 떨어질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27년간 비구생활을 하다가 태국왕실의 상황상,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되었지만, 소위 불교계 정화는 지속되었다. 몽꿋 왕으로 변신해서도 아들 가운데 한 명을 출가시켜서 이 담마유티카 즉 불교개혁운동을 계속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