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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3. 3월호] 내 詩 내 해설 - 조성내

작성자무량수|작성시간23.05.19|조회수27 목록 댓글 0

 

 

내 詩 내 해설

 

 조성내
시인, 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

 

 

아침 좌선

 

아침 좌선하는데 풀 깎는 앞집·옆집 소리
화두(話頭)가 흐트러진다
봄·여름이면 들리는 마을의 시끄러운 소리

 

두룩두룩 풀 깎는 기계소리
남미에서 온 일꾼들은 좋아한다
저 소리가 돈 소리
가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동전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살려주는 고마운 소리

 

풀 깎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것
아마 내 마음 탓이겠지
저게 부처의 설법인지도 모른다
귀 기울러 들어보자
두룩두룩 두룩두룩···

 

 

 

 

아침마다 30분 좌선을 하는 것은 나의 매일 아침 일과이다, 좌선이 끝나고 나면 아령 들고 5분 동안 운동을 한다. 맨손체조를 이삼 분 더 한다. 그러고 나서 신문을 읽는다. 이렇게 나의 하루는 시작한다.
봄여름이면, 앞집 옆집, 온 마을의 마당에 풀을 깎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때는 나의 좌선시간에 풀 깎는 소
리가 들린다. 좌선에 방해가 된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좌선이란 항상 조용한 곳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
라고 했다. 아주 시끄러운 시장에 앉아서도 좌선을 해야 하기도 하고, 물결이 거세게 흘러가는 시냇가에서도 좌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풀 깎는 소리가 방해가 되지 않는다. 풀 깎는 일꾼들은 주로 남미에서 온 가난한 사람들이다. 풀을 깎음으로 해서 이네들은 돈을 번다. 큰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어떤 일꾼은 돈의 일부를 남미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생활비로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일꾼들에게 있어서 풀을 깎는 기계소리는, 돈이 만들어져 나오는 소리인 것이다. 돈이 나오기에, 이네들에게는 풀깎는 기계소리는 즐거운 소리일 것이다.

 

나는 풀 깎는 기계소리에 소동파이 일화가 생각났다. 소동파(1037-1101)는 유명한 중국의 문필가이다. 자만심이 강했다. 서른네 살 때의 일이다. 스님을 놀려주기 위해서, 소동파는 옥천사를 찾아갔다. 승호(承皓)스님이 그 절에 계셨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이니까, 스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소동파는 칭가(秤哥)라고 답했다. 칭은 무게를 다는 저울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스님한테, “스님, 당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당신의 실력을 재는 저울입니다” 하는 뜻으로 칭가라고 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상당히 안척하는, 자기가 세상에서 아주 잘 났다고 건방지게 뻐기는 소리였다. 나쁘게 말하면 스님을 얕보든 아주 거만한 사람 같았다.
승호 스님은, “아, 그런 성씨도 있나요?” 하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야압~” 하는 기합소리를 크게 질렀다. 이때 소동파는 그 기합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때 승호스님이 물었다.
“칭(저울) 거사님! 방금 들은 그 소리는 몇 근이나 나가겠소?”
이때 소동파는 말이 꽉 막히고 말았다. 창피를 느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스님 앞에서
물러났다.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폭포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서 갑작이 깨쳤다.

 

시냇물소리는 부처의 설법이요
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청정한 부처의 법신(法身)일세.
고요한 밤에 들려오는 팔만사천법문 게송
다음날 무슨 방법으로 사람에게 내보일 수 있을까

 

나도 소동파가 “시냇물 소리는 부처의 설법이요”라는 말이, 바로 저 풀 깎는 소리는 바로 부처의 설법일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풀 깎는 소리가 나의 좌선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풀 깎는 소리가 들리면, 저 소
리는 일꾼들에게는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요, 나에게는 부처님의 설법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니, 어떤 소음도 좌선하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토끼

 

뒷마당에 나타난 토끼
귀엽다
두 살 손자는 신기해한다
토끼한데 달려간다
토끼는 풀숲으로 숨는다


토끼는 왜 태어났을까
도망 다니기 위해서일까
먹이가 되기 위해서일까

 

찌르기 위해 날카로운 뿔 하나라도
물어뜯기 위해 매서운 이빨 하나라도
한 대 갈겨 줄 수 있는 사나운 앞발 하나라도
적어도 하나쯤 갖고 태어났어야 할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났다

 

토끼만 그럴까
도망 다니면서
먹이가 되면서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토끼가 말한다
운명을 탓하고 싶지 않아요
제 명대로 사나
잡혀서 일찍 죽으나
생각 없이 살고 있기에 상관없어요

 

 

 

두 살 아이는 토끼가 귀여워서, 토끼하고 장난치고 싶어서, 토끼에게 달려갔는데, 토끼는 무서워서, 얼른 담 밑
으로 도망을 가버린다.
내가 뒷마당에서 네트에다 골프공을 딱딱 치고 있으면, 언제 나타났는지, 5-10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서, 내가 공을 치고 있는 것을 한참 구경한다. 내가 자기 곁으로 가지않는 한, 토기는 안심하고 뒷마당에서 앉아서 내 골프 치는 것을 보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토기는 태어날 때부터, 풀만 뜯어먹고 살라고 태어났다. 결코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못한다. 그러다가 포식동
물을 보면, 살기 위해서, 얼른 도망쳐야만 한다. 만약 토끼가 뿔을 갖고 태어났다면 토기는 더 이상 토끼가 아니
된다. 황소나 염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무서운 이빨을 갖고 태어났다면, 더 이상 토끼는 아니 된다. 악어나 호랑이가 되어버린다. 만약 강한 앞발을 갖고 태어났다면, 토끼는 더 이상 토끼가 아니 된다. 곰이나 살쾡이가 되어버린다. 토끼는 결코 포식동물이 될 수 없다. 그 대신 포식동물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다음은 <본생설화>(本生說話)에서 나오는 토기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보겠다.
옛날 베나레스(인도) 근처에 여우, 원숭이, 토끼, 세 짐승이 살고 있었다. 우정이 지극히 두터워 서로 사랑하기
를 제 몸 같이 하였다.
석제환인은 이 모양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진실로 이 가운데 보살도를 닦고 행하는 자가 누구일까? 시험하고자, 석제는 늙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너희들 별일 없이 잘 있었느냐?”
“예. 우리들은 날마다 숲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주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매우 사이좋게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 하도 기뻐 이 늙은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별안간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구나. 너희들 미안하지만 뭐 먹을 것 좀 갔다주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할아버지,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 하고 말한 다음 다 같이 먹을 것을 구하려 나갔다.
얼마 후 여우는 물가에 가서 생선을 잡아 가지고 왔다.
원숭이는 숲속에 들어가 나무과실을 따 왔다. 그러나 토끼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빈손으로 와서 그 주위를 뱅뱅 돌았다. 노인이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노인님, 저는 저대로 생각이 따로 있어 그랬습니다.”
토끼는 옆에 있던 원숭이와 여우에게 말했다.
“벗들이여, 미안하지만 나를 위해 마른마무 한단씩만
구해다 다오.”
여우와 원숭이는 곧 나무를 해다 쌓았다. 토끼는 곧 그 나무에 불을 놓고 훨훨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엄숙한
태도로 노인에게 말했다.
“저는 쓸데없는 물건입니다. 원컨대 이 몸을 노인님께 공양하고 후세 성불을 기약합니다.”
토기는 훨훨 타오르는 불 꽃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때 늙은 사람은 제석(帝釋)의 본 모습으로 나타났다.
타다 남은 토끼 시신을 잿더미 속에서 꺼내 들고 탄식하였다.
“실로 나는 너희들이 보살행도를 시험하고자 여기에 왔다. 그러나 지금 토끼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이와 같이 훌륭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토끼의 자취를 영멸(永滅)해버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차마 할 수 없다. 내 이제 토끼의 모습을 달 속에 붙여 길이
후세에 본이 되게 하리라.”
그리고 제석하느님은 토기의 모습을 달 속에 그려 넣었다.
부처님은 이 설화를 설해 마치고, “그 때의 토끼는 바로 오늘 나다.” 라고 말씀하셨다. (축역 한국대장경 제4권)
이 설화는 전생에 부처님이 토끼였었을 때, 배고픈 노인에게 자기 몸뚱이를 보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보
시행위가 있었기에, 나중에 부처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토끼는 태어날 때, 이미 다른 포식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태어난 것이다.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들도, 토끼하고
비슷한 점이 많다. 토끼에게 날카로운 뿔·이빨·손이 없듯이, 흙수저도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학벌도 없고 백
(back)도 없다. 항상 토끼모양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기의 운명이 나쁘다고 괴로워하거나 욕
질한다고 해서 운명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불평 없이 열심히 일을 하면서 살다 보면 운명이 좋게 바뀌어 질수도 있다.
남에게 잡히어 먹히는 게 억울하다고, 정말 억울하다고, 토기가 죽어가면서 한탄만 한다면, 그 죽음은 고통이
고 헛된 죽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부처 토끼처럼, “이게 다 내 몸을 바치는 보살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어간다면, 죽임을 당하는 게 다 도를 닦는 보살행위가 된다. 흙수저가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도를 닦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고통을 겪지 않고는 불도를 이룩하기는 쉽지 않는가 보다. 그래, 지금 이 고통이, 수행을 닦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고된 삶이 고된 삶이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즐거운 삶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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