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3. 7월호] 저승길 - 글 조성내

작성자무량수|작성시간23.08.30|조회수34 목록 댓글 1

부루나 칼럼 Ⅱ

저승길

 

글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울리는 저 북소리 목숨을 재촉하네
뒤돌아보니 해는 서산에 걸렸구나
황천(皇天) 가는 길에는 주막조차 없다는데③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쉬었다 갈꼬④

 

 

성삼문

 

 

내가 많이 늙어서 그러는지, “황천 가는 길에는 주막조차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라는 구절이 뭔가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위의 시조를 읽고 또 읽었다. 여기서 황천은 사람이 죽은 뒤에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저승을 말한다.
위의 시조는 성삼문(1418-1456)의 사세가(辭世歌)이다. 사세(辭世)는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다. 1455년에 단종은 왕 자리에서 쫓겨났다. 세조(1417~68)가 왕이 되었다. 성상문은 쫓겨난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 발각되었다.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잡힌 후 7일 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참형(斬刑)당했다. 위의 시는 노량진 강변의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것이다.
성삼문은 유교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었다. 그 당시 이씨조선에는 아직 기독교가 없었다. 성삼문은, 죽으면 걸어서, 황천까지 걸어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말(馬)은 있었겠지만, 왜 말 타고 황천에 간다고 하지 않았을까? 아마 이조사람들은 그 당시 어디를 가든 걸어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 마음을 끄는 대목은 ③번하고 ④번이다. “저승길에는 주막하나 없다는데” 이 말이 맞는 말인가? 황천 가는 저승길이 얼마나 길었으면! 가는 길목에 주막이 있어야 했나? 그런데 성삼문은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쉬었다 갈꼬?”하고 걱정을 한다. 지금 당장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저승길에서 주막이 없어 어디에서 쉬고 갈까를 걱정하고 있다. 죽어짐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없다. 죽기 전에, 그의 마음은 벌써 저승길에 가 있었다.
사후(死後)에 대한 생각이 아주 비극적이고 부정적이다. 죽고 난 후, 저승에서 ‘주막이 없다는데’
주막이 없다면, 오늘 밤은 어디에서 묵고 갈까 하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있다. 왜 저승을 이처럼
주막도 없는 처량한 곳으로 알고 있었을까? 저승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죽으면서도, 죽기 싫어서, 가슴 아프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면? 가령 황천에 가면 평화롭게 살 것이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더라면! 위의 시조가 써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후(死後)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종교는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나 이슬람 종교일 것이다. “죽기만 하면, 천당에 가서,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서, 아주 행복하게 영생토록 살게 될 것이다.” 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긍정적인 믿음 때문에, 죽을 때 비교적 평온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저승

 

기독교의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이다. 야훼가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서” 사람을 만들었다. 태초의 사람은 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의 아내는 진흙으로 만들지 않았다.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빼서 여자, 이브를 만들었다. 죽으면,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남자들이야 죽으면 흙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런데 여자는 흙에서 온 것이 아니고 남편의 갈비뼈에서 왔으니까, 죽으면 어디로 되돌아갈까? 그냥 의문해본다.
구약성경<창세기>에 보면, “아담은 930년을 살고 죽었다”고 했다. ‘구약성경’에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게 없었다. 천국이 없었으니까, 아담은 죽은 후 천국에 가지 못했다.
아담은 죽어서 흙에 묻히었다. 이브도 죽어서 흙에 묻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죽고 난 후 ‘신약성경’에는 천당과 지옥에 대한 글이 써져 있다. 다음은 ‘루가’ 복음(16;19)에 써진 것을 여기에 적어보겠다.
“부자 한 사람이 있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있었다. 거지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아가고 있었다.
라자로는 죽었다.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얼마 뒤 부자도 죽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부자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오. 라자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했다.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다.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려고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기독교에서는 한번 사람이면 영원히 사람이다. 죽어서도 사람이다. 천당에 가도 사람이고 지옥에 가도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천당에 가면, 전에 돌아가셨던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만난다.
위에서 보면 ‘라사로’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러니까, 천국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천국에 도착하게 되는 것 같다. 부자는 어떻게 해서 지옥에 도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지옥은 아마 악마가 데려다 주었을까? 망자가 직접 걸어서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불교의 저승 가는 길

 

불교에서는 A가 죽으면, A는 없어지고 만다. A의 ‘연속’이, 업에 따라, 육도(하늘, 인간, 아수라, 동물, 아귀, 지옥)를 윤회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연속성을 말한다. 나무가 씨를 낳는다. 씨가 나무가 되지만, 처음 나무하고 씨에서 생긴 나무는 별도로 각각 다른 나무인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연속되어 있으니까, 한 나무일 수도 있다. 달리 보면, 다른 나무일 수도 있다. A가 죽고 난 후, 연속되어 생겨난 게 바로 B다. 불교에서는 영혼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있을 것 같은데 찾아보면 영혼이란 없다.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윤회하기에 영혼이 있는 것 같다. 영혼이 없다는데 집착하면 단견(斷見)에 빠진다. 영혼이 있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빠진다. 불교에서는 단견이나 상견을 떠나서, 항상 중도(中道)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업(karma)이라는 게 있다. 업은 우리의 신·구·의(身口意)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몸의 행동, 입놀림 그리고 생각(마음가짐)에 따라 우리의 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생각·마음’이다. 우리가 선량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입에서 선량한 말이 나온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선량한 행동을 한다. 생각(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좋은 생각(마음)에서 좋은 업이 만들어진다. 나쁜 생각(마음)에서 나쁜 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나가세나 존자의 설명

 

내가 <아함경>을 두세 번 읽었다. <아함경>에, 사람이나 동물이 죽은 후, 어떻게 사람이 동물이 되고, 어떻게 동물이 사람이 되는가에 대해서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왕문경>(石上善應 저)에서, 어느 정도 이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왕문경>에 보면, 나가세나 존자는 대왕에게 묻는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 어렸을 적, 선생으로부터 시를 배우셨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대왕은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대왕께 옮겨간 것입니까?”하고 묻는다.
스승으로부터 시를 배우기는 배웠지만, 그 시가 스승으로부터 옮겨온 것은 아니다. 스승은 시를 가르쳐주었지만, 아직도 그 시를 스승의 머리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왕은 대왕대로 시를 배워서 그 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대왕이시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몸에서 다른 몸으로 윤회의 주체가 옮겨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태어나기는 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해준다.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윤회의 주체가 옮겨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태어나기는 난다”고 나가세나 존자는 말했다. A가 죽으면, A가 연속인 B로 직접 옮겨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B로 태어난다는 말인 것 같다.
불교는, 내가 ‘업’을 만든다. 내가 만든 업이, 내가 죽은 후, 다음 세상에 태어날 ‘나’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나의 창조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나는 피조물인 것이다.
다음 세상에 좋은 복을 갖고, 미남미녀로 총명하고 건강하게 태어나고 싶으면, 그리고 좋은 집안에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싶으면,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업을 지을 수 있을까? 바로 5계를 지키면서 10선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성삼문 시 한 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 낙락장송(落落長松)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여기서 봉래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산이다. 이 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 늙지 않는 불로초와 죽지 않는 불사약이 있다. 낙락장송은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를 말한다. 만건곤은 건곤(乾坤)은 하늘과 땅을 말한다. 만건곤은 온 세상을 가득채움이라는 뜻이다. 독야청청는 홀로 절개를 지키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은 봉래산에서,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편안하게 사람으로서 살기를 원하는데, 성삼문은 왜 하필이면 소나무가 되기를 원했을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금바위 | 작성시간 23.09.01 한국의 전통적 선비는 유불선과 천부경가지도 공부하였고 특히 세종대왕의 칭찬을 받은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선생님은 법성게 주석을 일품으로 하였고 금척을 연구하였읍니다
    사육신 성삼문도 분명히 매월당과 친분이 두터울터!
    추운 겨울을 보내고야 피는 매화꼿
    추운 겨울을 거뜬히 견디는 소나무
    불교에서 특히 알아주는 나무 아닌가요?
    금바위의 어머님은 크리스챤이지만
    불법에서 득도 숙명통, 천안통, TELEPATHY 3가지 능력을 30여년 유지 하였으니
    당연히 전생 후생을 볼수 있었읍니다 금바위 전생록과 광명 만다라 그림도 있읍니다
    기독교인 EDGAR CAYCY 도 자기최면으로 사람들의 질병원인이 전생에 있읍을 알고
    많은 사람들을 도왓는데 의사협회의 공격으로 고통 당한지 이차대전 당시입니다
    미국의 금바위 지금 같은 상황이라
    UNLIMITED HEAILING 할수 있읍니다
    불자 의사이신 유명하신 조성내 의사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