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부루나 칼럼 Ⅰ
명상 네 꼭지(3)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명상 #42 2022. 10. 15
비
메마른 남가주에 드디어 비가 옵니다.
잔뜩 흐린 날씨에도 찔끔거리기만 하는 빗방울이지만 이를 온몸으로 맞으며 반기는 산천
초목의 즐거운 옹알거림이 무성영화에서처럼 내 마음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비단 식물뿐이겠습니까? 거기에 깃들어 먹이사슬을 이루는 수많은 벌레나 동물들도 이 생
명의 감로수에 취하여 촉촉히 젖어 들고 있겠지요.
그런데 비는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내리는 것일까요?
볕에 물이 날면 김이 되고, 하늘로 올라갔던 김은 서늘한 바람을 만나 이슬로 서려 이 방울
들이 엉기면 비가 되어 내리지요. 그리고 내린 빗물은 고이며 흐르며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다가 다시 볕에 말라서 김이 되어 올라가고요.
이렇듯 만물(萬物)은 모양만 바꾸며 돌고 돈다, 어려운 말로 유전(流轉)한다는 것은 동양
에서는 필부도 아는 상식이었으며 서양에서도 일찍이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비롯한 여러 통찰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만물의 하나이므로 우리 삶도 당연히 때가 되면 모양을 바꾸어 가며 어디선가 돌
고 돌다 무엇인가로 다시 나투기(輪廻, samsara)를 되풀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 삶의 궤적이 이런 동그라미가 아니라 일회성인 직선이라고, 이 생은
한 번 죽으면 그뿐이라거나 죽어 한 번 심판 받아 배치되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 것이라고
믿는 매우 특이한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남가주에 비가 오네요.
이 비는 모양과 움직임을 바꿀 뿔만 아니라 그를 부르는 이름도 더불어 비슷하게 바꿉니다.
<비>는 내리면서 <보슬비>가 되기도 하고 흘러가서는 <바다>라는 명사도 되지요. 그 움직
임에 따라 <부시다>, <붇다>, <붓다>, <뿌리다>, <빨다> 하는 여러 동사로 몸바꿈 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슬보슬>, <부슬부슬> 하며 부사 노릇도 하지요. 언제부턴가 그것을 가리키는 뜻에 달라붙은 비읍(ㅂ)의 소리를 한참 동안 그대로 지니면서 말이지요.
우리의 삶도 저 빗물처럼, 그 흔적의 일부를 얼마간 그대로 지니면서 저승에서 이승으로,
이생에서 내생으로 차츰 모양이나 이름을 바꾸어 나갈 것입니다.
명상 #65 2023. 4. 1
오계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가장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이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어느 정도이며 어
떤 권력을 가졌는가가 부러워하고 기대고 싶은 잣대가 되기 쉽겠지요. 혼인이나 사교에 있
어서도 이러한 점이 크게 고려되는 것은 나무랄 수 없는 인지상정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니까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언제나 반드시 이런 일차적이고 직접적이거나 잠재적인 이익만을 위
하여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가치관이랄까 성향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도 모
르게 그에 따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휩쓸립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이나 종교인들 가운데는 이도 저도 아닌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고
그런 개인적이거나 사회적, 종교적이거나 또는 정치적인 동경과 지지를 맹목적으로 보내는
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각설하고, 만약 자신이 불자라면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주신 오계를 가장 일차적인 기준으
로 삼아 자신과 상대를 평가하고 기리는 기준으로 삼아야 바람직하겠습니다.
살생하지 말라, 그 사람은 모든 목숨, 특히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인명도 경시하는 사가
아닌가.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남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도둑질했는가
아닌가.
음행하지 말라, 그 사람은 이성에 대해 음란한 짓을 일삼았는가 아닌가.
거짓말하지 말라, 그 사람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를 속이고 대중과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았는가 아닌가.
술 마시지 말라, 그 사람은 술이나 습관성 물질에 신체나 정신을 버릇처럼 의존하고 헤어
나지 못하는 위태로운 사람인가 아닌가.
이렇게 큰 체가 있는데도 걸러 내지 못하고 작고 쓸모없는 엉뚱한 체를 들고 종일 흔들고
까불어(?) 봐야 곡식에 겨를 날려 보내고 섞인 돌덩어리를 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명상 #69 2023. 5. 6
향일암 반찬가게
간만의 고국 나들이길에 이번에는 여수 돌산도에 있는 향일암을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향일암 아랫마을까지 시내버스가 닿는데 정작 버스에서 내려서
오르는 길은 꽤 가파릅니다. 포장이 돼 있고 많은 계단으로 잘 다듬어진 길이지만 젊은 사람
이라도 단숨에 오르기에는 숨이 차지요.
그런데 그 가파른 길의 양쪽에 토산물 반찬가게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손님을 부릅니다. 하
나라도 더 팔고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는 삶의 현장이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다 그 정도는 된 지 한참인지 손님도 장사꾼도, 제 기억 속의 여느 시장바
닥같이 악다구니를 하거나 서로 야바위를 치는 것 같지는 않고 얼마만큼 안정돼 있어 보입
니다. 아마도 저 일주문 위쪽에 계시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교화가 가까이 미쳐서 그럴런
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벌집처럼 줄 지은 이 가게에는 아주머니들이 한 분씩 들어앉아 손으로는 열심히 반
찬거리를 만지고 다루면서도 눈은 흘깃, 지나치는 손님들의 아랫도리를 훑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씩 알맞은 음량으로 짧은 언사를 간간히 던집니다.
그런데 그 반찬 사 가라는 목소리가 어쩌면 저에게 던져 주는 선사님의 화두 같습니다. 아
니면 마치 반찬 하나 못 사 갈 바엔 거기 올라가 봤자 헛일일 것이라는 방장님의 일갈 같기
도 합니다.
승속이 따로 없는 건가요? 아마도 그 가게 하나하나마다 관세음 보살님이 한 분씩 앉아 계
신 거지요.
어줍잖은 시조 한 수를 읊어 올립니다.
향일암 반찬가게
향일암 올라가는 가파른 비탈 따라
촘촘히 어깨 결은 토산물 반찬가게
일주문 조 아래까지 나를 바래 주노니
갓김치 맛보세요 고들빼기 사 가세요
백팔계단 힘들어도 잊지 말고 들르세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아낙들의 내던짐
사바의 부추김인가 속리(俗離)의 진언(眞言)인가
양옆에 울타리 친 두 가닥 벌집 구멍
될성을 아랑곳 않고 나를 몰아 올리네
명상 #72 2023. 5. 27
카프카와 인형
부처님오신날을 봉축 드립니다.
‘변신’이란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프카(Franz Kafka 1882 ~ 1924)가 어느 날 독
일의 한 공원을 거닐다가 울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를 보았습니다.
왜 우느냐고 물어보니 애지중지하던 인형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둘이서 공원을 다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더 크게 울음보가 터
졌습니다.
이에 카프카는 아이를 달래려고 실은 인형이 세상 구경을 하러 여행을 떠난 거라고, 떠나
면서 자기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자기가 인형의 우체부인데 깜빡 잊었다면서 내일 갖다 주
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얼굴이 밝아진 아이를 만나 (실은 자신이 지어서 쓴) 편지를 읽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세 주 동안이나 인형이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보고 겪으며 느낀 꿈같은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날마다 아이를 만나 읽어 주었습니다.
그 동안에 인형은 전세계 방방곡곡을 다니고 사랑에 빠졌으며 결혼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엔 인형이 돌아왔다면서 새 인형을 하나 아이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모습이 달라졌다고 뜨악해하는 아이에게 카프카는 인형의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많이 변했어요.’라고.
아이는 그 인형을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로, 보살의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날마다 기쁨과 행복을 누리던 카프카는 그로부터 한 해 뒤 폐결핵으로 세상
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지어낸 이야기, 만들어진 인형이 아이를 달래고, 우리 중생을 달래어 안정시키고
기대와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여러 종교의 경전 말씀이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이 실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지 모르
겠습니다.
거짓 속에 참이 있고 방편 속에 우리가 어둠을 헤치고 살아날 길이 있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