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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3. 8월호] 이달의 법문/원공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3.12.08|조회수79 목록 댓글 0

 

 

관觀

 

 

 

글 원 공 스님

 

 

 

참선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으로 부터가 아닐까?
출가 초기에 시간이 나면 좌선을 했다. 출가 이전에는 정식으로 좌선을 해본적이 없어 좌선하는 방법은 잘 몰랐다. 우리 스님께서는 관하는 간단한 방법을 말씀해주셨다. 나는 자세한 좌선방법은 천천히 배우기로 하고, 우선 관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방석에 앉아서 생각나기 이전에 집중했다. 그런데 실제 해보니 생각나기 이전이 뭔지 어떻게 집
중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나름대로 방법을 정해서 해보고, 차츰 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생각나기 이전을 우리 스님께서는 주인공이라고 하셨다.그래서 숨을 들이쉬면서 “주인공”, 내쉬면서 “주인공” 하고 마음으로 외웠다. 내쉴 때는 “주인공”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고 생각하였고, 숨을 들이 쉴 때에는 “주인공”에 머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잘되는 것같지 않아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다.


그런데 계속 하다보니 처음에는 마음이 어수선하다가, 먼저 생각이 스스로 떠오르면 거기에 빠져 내가 생각을 이어가는 것을 봤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왔다. 차츰 생각이 일어나면 알아차려 빠지지않게 되었다. 생각이 줄어들었다. 생각이 줄어들자 기쁨이 생겼고, 한 번 앉으면 두 세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음이 조금 들뜨면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며칠은 책을 봤다. 그러나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단순한 관에 집중했다. 어떤 때는 생각이 형성되기 전에 느껴지면서 생각이 되기 전에 바로 사라졌다. 그때에는 법문을 들을 때도 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고 오로지 단순한 관에 집중했다. 주로 우리 스님 법문을 들었다. 스님께 질문할 기회가 있어도 뭘 질문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거의 질문을 하지않았다. 하루종일 놓치지 않고 주인공을 관하는 것에 노력했다.


그리고 뉴욕에 오게 되었다. 바로 개원한 사찰이고 우리는 사찰관리가 처음이어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살았다. 처음에는 좌선을 열심히 하려고 하였지만, 차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차츰 좌선 보다는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들을 매일 서너 페이지 읽으면서 환희심 속에 두 세시간을 앉아 있는 것이 즐거움이고 휴식이었다. 어느 해 우리 스님께서 오셔서 아침 저녁으로 좌선을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거의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결심을 하고 한국 사찰의 선방에서 정진을 몇 철 하였다.


선방에서의 정진은 출가 초기 만큼의 몰입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것을 느꼈다. 출가 초기에는 여유가 있어서 많은 시간을 좌선을 했는데 그 떄에는 다리가 아픈줄 몰랐는데, 폭풍처럼 밀려오는 졸음이 지나가자 다리 아픈 것을 참아야 했고, 반가부좌를 두 세가지 방법으로 했는데 편치가 않아서, 갑자기 결가부좌를 했는데 고
통이 심해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간 중간 반가부좌를 하면서 시간이 지나니 하루 종일 결가부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가 발작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생겨서 지금도 불편하다. 잘 아는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생각은 결가부좌가 좋기는 하지만 그 자세가 어렵고 긴시간 좌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편한 자세로 시작하면 될것이다. 미추와 허리를 곧게 세우는 것은 건강에 좋은 바른 자세이고 마음을 단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허리가 아파서 걱정했는데 허리 근육이 강화되어서 오히려 허리가 좋아졌다.


참선을 하면서 고요한 것이 명상이라는 관념이 있어서 고요함에 집착했는데, 고요함보다는 깨어있음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봉암사 선방은 죽비 경책을 돌아가면서 했는데, 눈을 감고 정진할 때는 잠을 적게 잔 날은 전혀 졸지않은 것 같은데 경책이 들어왔다. 그래서 눈이 아파도 눈을 뜨고 정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리고 법계정인을 하여 손가락이 가볍게 맞닿게 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으로 몸을 통해서도 깨어 있으려고 했다.


관하는 것은 망상과 졸음에 빠지지 않는 노력이 거의 모든 것이었다. 어느 날 수좌 적명스님께서 20대 토굴에 살면서 정진할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화두가 되지않아서 애를 쓰시던 어느 날 석양녘에 근처의 묘지 옆에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는데 무심이 되었고 무심이 되니 화두가 들렸다고 하셨다. 나는 화두를 관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멈추면 관하는데에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나는 새벽과 저녁에는 애써야 했지만 낮 시간에는 집중이 순조로
웠다. 특히 오전에 몸이 상쾌할 때는 망상과 졸음이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스스로 떠오르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날도 있었다.


나의 노력은 생각과 졸음에 빠지지 않고 주인공을 관하는 것까지이고 더 이상은 나의 일이 아니었다. 같은 마음이지만 나라는 생각이 없는 성성적적한 상태는 갑자기 스스로 일어났다. 특이한 것은 처음 며칠 동안 엄청난 졸음이 쏟아져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어려서 부터 마음에 걸렸던 일들을 끊임없이 말하는 것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는 적정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나옹스님의 게송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하는 귀절이 떠올랐다. 입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마음에 내가 없어서 분별이 없는 침묵을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을 할 때에는 ‘나’를 놓아야 한다. ‘나’가 있으면 너와 나의 주객의 분리가 일어나고, 대상에 대한 좋고 나쁘고 분별이 일어나고, 좋은 것을 취하고자하는 의도가 일어나고, 거기에서 긴장이 일어난다. 그러면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관을 할 때에 긴장을 풀라고 한다. 몸의 긴장은 마음을 반영하며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깊게 우리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한
다. 그러므로 관은 분별하는 생각과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참구하는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수행을 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일념이 되고 무심이되어 깨달으신 분들이 말씀하시는 상태의 어떤 면들을 보고 그 체험이 끝나면 예전의 나로 돌아가서 깨달음이나 지혜가 열리지않고 잊혀지는 일이 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관은 끊임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큰 깨달음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꾸준히 해도 훌륭한 수행이라 생각한다.

할 수 있지만 꾸준히 하기는 어렵다. 또, 일상 생활 속에서 정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일상의 삶에 스며있는 습을 자각하기는 어렵고 반복하기는 쉽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
쨋든 명상의 시대에 불자로서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또는 시간이 날 때마다 형편에 따라서 지금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관을 5분 혹은 15분 또는 30분을 한다면 그것도 예불이라 생각한다. 계속하다보면 알아차림은 더 깊어지고 지혜도 차츰 열릴 것이다.
우리 스님께서는 내안에 ‘주인공’(자성불)이 있는데 뭐가 걱정할것이 있느냐! 하셨다.

 

 

원공스님은 1990년 미국에 입국한 이후
뉴욕 한마음선원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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