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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3. 8월호] 다툼있는 곳에 화합의 씨앗도 있으리니 / 법현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3.12.08|조회수193 목록 댓글 0

 

-이달의 명상-

다툼爭 있는 곳에
화합和合의 씨앗도 있으리니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하나는 선택되어야 하나니 두 가지를 겸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이나 의복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새는 심지 않고 거두지 않고 저축하지 않되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백합화는 옷이 없어도 아름답다.”<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란다.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기보다 어렵다 한 부자의 천국행가능성을 나는 그대로 따르지 않지만 성직자(聖職者)의 천민자본주의 즉 부자 되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신도는 부자가 되어도 좋지만 성직자는 부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성직자도 그러한데 직업이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는 불교의 수행자(修行者)는 삼의일발(三衣一鉢)만 가진다 해서 거의 무소유의 삶을 추구한다 해서 저축도 금하는데 하물며 부자됨이랴? 하지만 말 그대로나 옛 방식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인식하는데 첫 계기인 처음 그대로가 아닌 달라진 상황을 감안한다면 나와 우리 또는 우리 단체나, 시설에 필요하며 좋은 일에 쓰일 재화는 필수요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는 정황이다. 내가 공유물이 아닌 재물 1~2급 샐러리맨보다 많은 부동산과 동산을 가졌다면
자본주의 아래에서라도 수행자가 아니라고 보면 된다. 그러고도 가지고 있는 여러 이름들은 뭐라고 꾸며도 세속적인 것이다. 저 절대자를 믿는 이들의 경전 가르침도 살피면 뜻 깊고 재미있다. 절대자유인 세계에 머묾을 부정하는 열반지향인 곧 불교수행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만 나부터 부끄럽기 짝이 없다.
“먹을 곳 있는 곳에 다툼 있으나 다툼 있는 곳에는 참된 법(담마)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내가 속한 곳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 곁에서 들 말한다. ‘어디는 먹을 것이나 있어서 다툰다지만 거기는 먹을 거도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러시나? 하필 나쁜 것까지 닮아가려고 그러시나?’고. 부끄러운 지적이다. 여기에도 부끄럽고, 저기에도 부끄럽다.
그런데 다툼은 왜 시작되었을까?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승단에 그것도 여섯 가지로 화합(六和하)는, 그래서, 집단들의 가장 모범적인 집단이라는 승단(僧團)에 왜 다툼이 시작되었을까?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붓다 당시부터 다툼이 일어났다고 한
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붓다가 타일러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붓다는 꼬삼비 지역 제자들의 싸움을 보고 간곡하게 타일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단다.
화해시키고 타이르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 한참을 코끼리숲속에 홀로 지냈다. 화해를 했을까? 그럼 어떻게 해서 화해를 하였을까? 재가자들의 공양거부가 이어지자 비로소 다툼이 중지되고 참회하고 화해했다고 한다. 붓다가 꼬삼비를 떠나기 전에 화합하는 가르침을 내렸다.
“모두들 서로 똑같이 고함을 치지만 아무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른다. 승단이 분열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 산만한 재치로 지혜로운 척 하면서 온갖 말을 다한다. 입을 크게 벌렸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가 나를 욕한다, 그가 나를 해쳤다, 그가 나를 이겼다, 그가 내 것을 빼앗았다’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에게 원한은 가라앉지 않는다.
‘그가 나를 욕한다, 그가 나를 해쳤다, 그가 나를 이겼다, 그가 내 것을 빼앗았다’
이렇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원한은 가라앉는다.
“언제 어느 때나 원한은 원한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원한 아닌 것으로만 원한은 가라앉는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율장 대품(Vinaya Mahavagga)>의 이야기가 시(詩)들의 모임인 <법구경>에도 엮여서 전한다.
그런데 다툼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많이들 <율장 대품>에 설해져 있다고 말한다. 그저 누군가의 말을 따라서 옮겼을 뿐이다. 자세히 나오지 않고 잘 못해서 징계를 받았는데 절차가 바르지 않아 싸움이 시작되었단다. 미얀마 밍군사야도가 쓴 <대불전경>에는 약간 더 나아간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거기에도 정확한 시작이나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 나아간 자료이므로 이 자료를 바탕으로 조금 더 사유해보고자 한다.

 

 

붓다의 제자 가운데 율장에 능통한 율사비구, 율사비구그룹이 있었고, 경장에 능통한 강사비구, 강사비구그룹이 있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붓다가 계실 때에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뒤에 비구들의 경향에 따라 그렇게 무리 지었을 수 있다.
또 한 편 결집(結集,samgiti)도 마하깟사빠가 주도했다고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한다. 붓다의 교단은 크샤트리아가 주축이었을 것이고 브라흐만 출신이 주도권을 행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브라흐만 출신이 결집 사실 편집에 해당하는 합송을 주도하면서 자연스레 율사비구,강사비구를 나누고 수드라출신의 우빨리
를 높이되 크샤트이라인 아난다비구의 약점을 강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아난다가 붓다 열반 이후 결집 전날까지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의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강사비구는 해우소에서 뒷일을 보고 나왔다. 뒷 일을 보고 나오면 반드시 뒤 뿐 아니라 손을 씻어야 한다. 오른 손으로만 먹고 왼손으로만 뒤를 씻는 문화의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앞 사람이 뒷일을 보고 손을 씻고 나면 반드시 씻은 물통을 비우고 엎어놓아야 한다고 비구들의 계율에 규정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강사비구는 실제로
는 뒷일을 보지 않았기에 씻을 필요가 없었고 씻지 않았기에 물통을 엎어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엎어놓으려다 그만 둔 것이었다. 그런데 뒤에 지나가던 율사비구가 현실적인 자연스런 일이며 그래서 계율에도 있는 것이기에 당연하게 어긋남을 지적했다. 강사비구는 지적을 받았으니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겠다고 했으나 율사비구가 깜빡했던지 의도가 아니라면 범계가 아니니 참회할 필요도 없다고 무마시켰다. 그런데 잠시 뒤 계율조항이 기
억났던지 율사를 따르는 후배비구들에게 강사비구가 생각 없이 범계를 했다고 말해버렸다. 그들은 강사비구의 후배들에게도 이야기 하고 범계했으니 징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야단치는 이야기를 들은 강사비구는 정서적 친분이 있는 비구들에게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자기를 징계한다고 설명해서 정서적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다. 양쪽 비구들
은 서로 함께 있기가 거북했고 묘하게도 강사비구들은 승원 안에서, 율사비구들은 승원 밖에서 안거하고 붓다의 인정을 둘 다 받았다.
그 이후 교단이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붓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붓다가 나서서 그렇게까지 싸울 일인지 살펴보고 다툼을 멈추는 것이 더 나은 길임을 설명하고 제지했으나 양쪽의 비구들이 모두 붓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께서 비구들이 있는 곳을 떠나갔고 한참동안이나 비구들의 숲속에 계시지 않는 것과 일의 분위기를 알게 된 재가
자들이 탁발비구들에게 공양을 거부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먹지 못하게 된 비구들이 잘못을 붓다께 참회하고 붓다가 용서하고서야 공양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 참회를 받으면 붓다가 한 설법이 ‘여섯화합높임(六和敬) 설법’이라고 한다. 승단은 이렇게 화합하는 집단이라고 설법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화합되는 집단이라는 해석이 더 그럴 듯하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은 화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진리는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둘 또는 여럿이라는 생각과 내가 주장하는 아예 없다는 생각을 해야 비로소 화합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붓다가 주장한 함께 살고(同住), 다투지 않으며(無諍), 한 생각으로 같은 일 하고(同事) 지킬 것을 같이 하며同修), 현
상 풀이를 같이하고(同解), 이익을 함께하면(同均) 비로소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말임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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