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나 칼럼 Ⅰ
명상 네 꼭지(4)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명상 #25 2022. 6. 25
말 한 마디
어느 노총각이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나 맥주를 한 잔 하면서 푸념을 했습니다.
“그 동안 잘 있었냐고? 말도 말게.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방금 겨우 파출소에서 풀려나오
는 길이라네.
버스간에 올랐더니 마침 참한 아가씨가 창가에 앉아 있기에 옆에 앉았지. 이 나이에 잘 하
면 장가 한 번 가 볼 수 있겠다 싶어 기회를 보다가 말을 붙였지.
그런데 아가씨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면서 같이 가자고 그러더군.
좋다구나 하고서는 따라 내렸지. 그런데 곧장 간 곳이 파출소야. 그리고는 싫다는데도 추
근대는 추행범으로 나를 몰고는 사라지더군. 진땀을 빼며 가까스로 해명하고 풀려나오는 길이라네. 나 원 참!”
“그래도 나보담 낫네그려. 난 십오 년 전에 버스 한 번 잘못 탔다가 요모양 요꼴이라네.
시골 다녀오려고 시외버스를 탔는데 창가에 아가씨가 탔고 옆자리가 비었더군. 거기에 내
가 앉았는데 날씨가 더워 창 좀 조금만 열자고 아가씨에게 말을 붙였지.
그러다가 코가 꿰어 벌써 애새끼만 주렁주렁 다섯이라네. 먹여 살리기에도 등골이 휘는데
마누라는 눈 뜨고 있는 시간은 내내 잔소리에다가 안하무인으로 핍박이라 사는 게 지옥이
라네.
그러면서 죽어도 헤어질 수는 없다니 나는 자네가 한없이 부럽구먼!”
이렇듯 말 한 마디는 모든 인연이 얽혀 드는 끄트머리인 실의 머리, 곧 실마리가 되기 쉽습니다.
언제나 좋고 순수하며 슬기로운 마음으로 말을 던져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따라오는 인연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요.
위의 두 친구, 앞으로는 실마리가 술술 잘 풀리길 빌어 드립니다.
명상 #40 2022. 10. 2
안과 밖
베트남 출신의 인권운동가이자 선승으로 올해 초 입적하신 틱낫한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
신 적이 있습니다.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나와 같은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종종 더 어려울 때가 있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우면서도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끼리는 너무
쌀쌀맞거나 빡빡하게 굴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시샘하여 끌어내릴 때가 없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눈을 바깥쪽으로, 더 큰 세상으로 돌려 파이를 벌어 올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버리
고 눈길을 안쪽으로만 돌려 얼마 남지 않은 파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형제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좁은 안목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어느 가정이나 사회, 나라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불교를 포함한
종교단체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데서는 어떻게 하고 있나? 어찌하여 저들은 번창하는데 우리는 날이 갈수록 위축되
고 있나?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 버려야 할 점은 무엇일까? 이렇게 차분한 분별력과 함께 열린 마음으로 진취적인 생각을 하고 배울 자세를 갖추어 꾸준히 노력해야 성장과 발전이 있겠지요.
그러면서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정진하며 애쓰는 동료와 도반들을 북돋아주며 그들의 작
은 실수나 모자람은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주고 성심으로 서로 일깨워 주어야겠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불교가 타종교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첫째는 적극성이라고 봅니다.
둘째는 청소년 포교에 힘을 쏟아 장래에 대비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열심히 사회봉사에 참여하여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점입니다.
명상 #62 2023. 3. 11
달구지
60년대에 한국의 농촌을 방문하던 펄벅 여사가 어느 날 지게에 짐을 지고 소달구지를 몰
고 가던 농부를 보고는 물었습니다.
“왜 달구지를 타고 편하게 가지 짐을 지고 옆에서 걷고 있나요?”
농부가 통역을 통해 대답했습니다.
“소가 오늘 일을 많이 해서 고생했으니까 짐을 덜어 줘야지요.”
이 말에 펄벅 여사는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집 감나무에 다 익은 감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저 감은 왜 마저 따지 않나요?”
“저건 까치밥이랍니다. 새들과 나누어 먹어야지요.”
이에 여사는 감탄했습니다.
“나는 거대한 고적이나 놀라운 경치를 보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네요. 이보다 더 아름답
고 가슴 벅찬 광경은 세상에 드물어요.”
이렇듯 한낱 집짐승이나 들새들에게까지 베풀고 나누고자 했던 우리의 따뜻한 심성이 언
제부터 자기만 알고 저 혼자만 먹겠다는 욕심장이로 변했을까요?
언제부터 스님이나 목사란 말 대신에 '땡중'이니 '먹사'란 험하고 천한 언사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분들의 빛이 도매금으로 가려지기 비롯했을까요?
일부 성직자들의 물욕 때문일까요? 이른바 보기 드물게 자본주의가 성공하고 단시일에 선
진국으로 올라섰기 때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구태여 욕할 것도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나몰라라 하고 개인적인 종교의 굴 속에 박혀 숨을 죽이는 것은 제대로 된 수행의 길
도 아니고 진리의 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 바로잡음도 우리의 밑바탕이 잘못돼 있으면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잘못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불자가 됐든 기독교인이 됐든 보시나 자선을 할 때, 저 60년대의 한국
의 농부처럼 남들을 위해, 중생을 위한 순수한 베풂의 마음을 가지고 해 왔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널리 베풀고 길이 남을 발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가족, 동아리 만을 위
한 일시적이고 이기적인 좁은 기복의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겠는지요?
절이든 교회든 나만을 위한 그런 기복의 재산이 모여 쌓인다면 어찌 반드시 날파리와 구더
기가 꼬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해로운 벌레들을 쫓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은 그런 불순한 먹잇감을 아예 짓지 않거나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명상 #67 2023. 4. 15
불교의 기적
주위의 타종교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로서 일단 하느님을 받아들이
고 성심껏 믿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 내 삶에서 불가능했던 일들이 곧바로 해결된다고 합
니다.
그러면서 불교에는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느님 같은 절대신이 없으므로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에도 기적이 있습니다.
다만 불교인은 자신의 종교생활을 기적에만 의존하거나 우선시하거나 기적을 앞세워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을 뿐입니다.
불교는 본래 부처님 당시 전세계 어느 사회에서나 창궐했던 미신의 정글을 벗어나 앞뒤가
맞고 사리가 분명한 깨달음의 종교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세계는 정교한 논리나 차가운 이성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현실의 괴로움에 허덕이는 수많은 중생을 큰수레에 태워 건지겠다는 대승불교의 시
대에 이르자 종교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중생 구제의 방편으로 자력신앙과 더불어 타력신앙이 도입되면서 부처님 말고도 관세음보살이며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같은 많은 보살님들이 나투게 되었습니다.
중생이 부처님이나 보살님들께 간절히 기도하면 이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치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렇게 불보살님께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가피(加被)라고 합니다.
가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몽중가피(夢中加被)로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불보살님이 응하시어 꿈속에 나타
나 미리 귀띔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지몽을 꾸게 하시는 것이지요.
둘째는 불보살님이 현실에서 눈앞에 나투시어 불가능했던 문제를 곧바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현증가피(顯證加被)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명훈가피(冥勳加被)입니다. 우리가 생각만 하는데도 불보살님이 멀찌감치 우리
둘레를 에워싸서 위험을 막아 주고 살아남을 길을 터 주시는 것이지요.
이렇듯 중생의 간절한 기도에 응하시어 일어났던 역사상의 수많은 기적의 기록이 각종 영
험록으로 묶어져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구태여 기록이 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
니다.
우리가 오늘도 수많은 위험 속에 하루를 살며 그 흔한 교통사고 당하지 않고 급병에 걸리
거나 총기 사고를 벗어나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며 이 나마의 삶을 꾸리고 있는 것 자체가 적어도 불보살님의 명훈가피를 입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불교에도 기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있어도 매우 많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