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세계Ⅰ
현대 세계불교⑮
내가 본 태국불교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게 된
태국 비구승가로의 출가
글 이치란 박사 (원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 강원불교대학장
WFB 태국본부 전집행이사 /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매일종교신문 기고가 / 땅끝 어룡도 해수관세음보살 도량 당제산 여의암 회주
다나TV 영어경전 강의 / 세계불교 TV에서 ‘세계불교를 가다’ 소개
(http://www.haedongacademy.org)
태국불교는 나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 바 있다.
한국불교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인도의 원형불교를 접한 나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뭔가 신선감을 느꼈다. 특히 태국 불교는 계율(戒律)이란 승가의 규칙이 나를 무겁게 누르면서도 빨려들게 하는 흡입력이 강했다. 하루를 수행하다가 말더라도 제대로 한번 해보자하는 각오로 덤벼든 것이었는데, 막상 태국불교에 입문하고 보니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태국불교는 인도의 원형불교를 계승한 불교의 정통성을 지닌 상좌부의 종가 집과 같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불교 1천 7백년사는 너무나 우여곡절이 많은 기복(起伏)과 흥망성쇠의 연속이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왕성했던 한국불교는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의 정치이데올로기의 타킷이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불교는 그로기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찰나에 일본불교를 만나서 그나마 소생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간단한 예로서 조선불교는 피폐할 때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일본불교의 조력을 받게 되고, 일본식 대처불교로 재편되는 과정을 밟게 되는데, 한편에서는 실 날 같은 한국(조선)불교의 임제정맥(臨濟正脈)을 지켜오던 선사(禪師)들과 한국불교 교학(敎學)의 정수인 화엄종장(華嚴宗匠)들이 산문 깊숙이 은거하고 있었다.
이런 몇몇 고승들은 비구승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만해 한용운 스님의 경우는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고수하면서도 대처를 수용했던 개혁불교의 기수역할을 했다. 일본불교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불교유신(佛敎維新)의 구체화였다고 보여 진다.
광복 후의 한국불교계는 일본불교에 의하여 재편된 일본식 왜색불교인 대처불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한국불교계는 불교정화운동이라는 대전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은 비구 측의 승리에 의해서 한국불교승가는 명목상으로는 비구승가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한국불교는 다소 무질서하고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불안
정한 모습의 승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뭔가 새롭게 해보려는 의지는 강했으나, 승가는 통일되지 않은 채, 비구 승가는 주로 산중사찰에서, 산중 사찰에서 밀려난 대처승들은 도시에 조그마한 사설사암을 세우면서 둥지를 틀게 되는데, 비구 승가는 승가대로 대처승은 대처승대로 어딘지 불완전한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한국불교의 어수선한 환경을
경험했던 필자로서는 도대체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뭔지 모를 정도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고, 태국행을 감행하여 불교의 정체성이 뭔지 한번 탐색해 보자는 것이 태국 비구승가로의 출가였다. 태국에서 비구승가의 일원으로서 출가했던 경험이 세계불교를 보는 눈과 귀가 열리고 불교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의 4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아서 마음이 편해지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마치 고향을 떠났다가 만년에 귀향하여 고향의 참 모습과 정겨움을 알게 되듯이 말이다.
내가 접한 태국불교는 계율불교(戒律佛敎)였다.
처음엔 적응하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 일과가 완전히 율장(律藏)대로인 태국불교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태국불교는 율장상으로는 세계불교에서 가장 정통성 있는 계맥(戒脈)을 계승하고 있었다. 부처님으로부터 율장을 전수 받은 우빨리 존자 이후, 율장의 학습과 계맥은 남.북방으로 전수되었는데 남방은 인도-실론(스리랑카)-버마=태국-스리랑카-인도(네팔)로 다시 원점 회귀했고, 북방으로 전해진 계맥은 한국(비구니계맥)에서 그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었다. 남방불교 권에서는 버마와 태국이 인도의 원형불교와 계맥을 계승하고 있는데, 계맥에 있어서는 태국이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동안 비구니 계맥은 1천 년전(1070년)에 스리랑카에서 맥이 단절되어서 공백 상태였으나, 1996년 12월 인도 사르나트(녹야원)에서 한국 스님들(전 종정, 전 총무원장, 전 호계원장)과 비구니 스님들의 협력으로 11명의 스리랑카 다사실라(十戒) 여성들에게 비구니 계맥을 전수하여 현재 수천 명으로 증가해서 비구니 승단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불교의 비구(비구니)승가는 인도의 원형불교의 한 부파였던 담마굽타카(법장부)의
근본율장에 연원하면서도 스스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범망경》에 의지함으로써 본분과 뿌리를 져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음은 정말 안타가운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태국과 한국은 율장상으로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한국 불교는 태국불교와 보다 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음에도 이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전연 다른 불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해라고 하겠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가 전연 다른 남.북방으로 향하다보니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언젠가는 증명되고 밝혀 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태국불교에 출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 줄 곳 태국불교와 관계를 맺어왔고, 현재도 한태불교 교류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45여 년전 필자가 처음 태국 불교를 경험하기 위해서 비구승가에 입문했을 때만해도, 태국의 비구들은 한국불교를 마하야나(대승)의 한 종파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고 한국불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불교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달라졌다. 태국의 비구들은 한국을 꾸준히 찾고 있으며, 교류의 폭을 넓히려는 의지만이 아닌 대승불교를 연구하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태국 노동자들이 한국에 많이 와 있는 이유로, 이들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3-4만 명의 태국 노동자들이 경기도와 경상남북도의 몇 몇 공장단지에서 일하고 있다. 태국에서 스님들이 오시면 함께 법회를 보도록 돕고 있다. 이제 태국의 현대불교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차회부터는 실론(스리랑카)의 현대불교를 다뤄 보고자 한다. 스리랑카불교는 남방 상좌부 권에서는 가장 역사가 긴 인도원형불교의 종주국이다. 하지만 남인도의 공격과 서구열강의 식민지화로 불교는 시련을 겪었고, 승가는 단절되었지만, 태국과 버마에서 승가의 계맥을 다시 이어왔고, 비구니 계맥은 한국에서 이어가서 현재 스리랑카 승가는 비구 비구니 승가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대 세계불교⑯
인도원형 불교의 종가,
스리랑카
戒脈을 태국과 미얀마에서 역수
입한 현대 스리랑카 불교
현대세계불교 시리즈를 엮으면서, 미얀마불교를 먼저 소개했고 다음은 태국 불교를 다뤘다. 남방 상좌부 불교는 실론(스리랑카), 버마와 태국이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고, 라오스 캄보디아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밖에도 방글라데시를 제외하면 안 되고 네팔 인도 등지를 거론해야 한다. 역사로 본다면 스리랑카 불교가 상좌부의 적통 종가여야 하지만, 적
통 종가는 미얀마와 태국에 자리를 양보했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인도의 원형불교가 살아 있을 때인 기원전 3세기이다. 스리랑카 불교는 사실, 버마나 태국보다는 1천년이상의 히스토리를 간직한 불교의 보고와 같은 존재이다. 그렇지만 현대 스리랑카 불교는 계맥(戒脈)을 태국과 미얀마에서 역수입했다. 때문에 현대세계불교 시리즈에서 남방불교를 소개하면서 미얀마를 먼저 다루고 다음은 태국을 다루고 이제 세 번째로 스리랑카 불교를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독자 여러분은 이해해주길 바란다.
스리랑카는 남방 상좌부의 3대 종가(宗家)인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가운데서 교학(敎學)이 가장 강한 불교 전통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직설(直說)이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결집(結集)이 되었는데, 이것은 불교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는 교의(敎義)에 관한 문제이다. 불교의 정전(正典)이 스리랑카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에 불교교학은 스리랑카에서 기초가 닦여지고 발전시켜왔는데, 정경(正經)의 경전어(經典語)는 빨리어이다. 빨리어는 인도 마가다 지역의 지방언어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유럽어의 인도 중부 방언인 프라크리트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마가다 지역은 부처님이 주로 활동
했던 영역이다. ‘빨리어가 부처님이 사용했던 언어다 아니다.’에 대한 논란이 학자에 따라서는 이설(異說)이 있지만, 이것은 서구 학자들의 견해이고 인도나 스리랑카에서는 빨리어가 인도 중동부 지역인 마가다에서 사용됐던 언어로 보고 있다.
한동안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서구 학자들의 권위와 정의는 그대로 진리인양 성역의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서구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비과학적인 주장이 섞여 있음에도 동양의 학자들은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학문의 세계어인 영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학문연구에 있어서도 상황은 다소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학문적 권력은 영어권에 있다고 본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풀어 가보면 스리랑카 불교는 역사적으로나 경전적으로 인도의 원형불교를 간직한 불교교학의 종가라고 하겠다.
이제 현대 스리랑카 불교를 본격적으로 엮어 가기 위해서는 스리랑카의 근.현대 불교를 개척한 스리맛 아나가리카 다르마 팔라(Srimath Anagarika Dharmapala1864〜1933)를 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런 운동을 전개하게 된 아나가리카 다르마 팔라는 누구인가를 브리핑할 필요가 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태어날 즈음, 실론은 브리티시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듯이, 실론도 이미 영국식 이름을 갖는 것이 시대풍조였고 브리티시의 강요였다.
그는 실론의 무역상인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돈데이빗 헤와위타라네 (Don David Hewavitharane)였다. 그는 기독교계학교에 들어갔고, 왕립학교인 콜롬보 아카데미(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인으로 신지학회(神智學會) 공동설립자이면서 친 불교적이었던 올코트 대령이 실론에 와서 활동할 때, 돈 데이빗 헤와위타라네는 신지학회에 가입하고, 돈 데이빗 헤와위타라네라는 영국식 이름 대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란 법명으로 개명(改名)했다.
아나가리카(anāgārika)란 말의 뜻은 ‘집 없는 자’ 의 의미이다. 집이 없는 자란 바로 출가 수행자를 의미한다. 다르마팔라 (Dharmapala)는 불법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법호(法護)’란 뜻 정도의 의미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서 아나가리카는 출.재가(出在家)를 막론하고 집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들어선 구도자(求道者)를 이렇게 불렀다. 불교가 아사직전이었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실론불교에는 이런 수행자들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출가 비구와 재가 신도사이의 중간 정도의 신분인 우리식으로 말하면 포교사나 법사(法師) 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신도는 5계를 지키고, 출가 비구는 227계(대승에서의 빅슈는 250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나가리카는 8계(戒)를 지키도록 되어있다. 스리랑카에는 이런 아나가리카로서 남성만이 아닌 여성 수행자도 있었는데, 정식 비구니가 아닌 다사실(十戒)여승이 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황색 가사는 입지 않았고 삭발도 하지 않았지만, 8계 이상의 계율을 지키면서 실론의 곳곳을 누비며 수행과 불교 부흥운동을 했다. 그는 실론에서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실론출신의 보살로 통했다.
이럴 즈음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에드윈 아널드 경(Sir Edwin Arnold)의《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노래한 담시(譚詩)에 감화를 받아서 1886년 인도 보드 가야 행(行)을 하게 된다. 에드윈 아놀드 경은 실론의 웰리가마 스리 수망갈라 장로(Weligama Sri Sumangala Thero 1825〜1905)의 격려와 고무에 힘입어서, 보드 가야의 성지복원과 불교도들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고 주창(主唱)했다. 에드윈 아널드 경은, 영국 한 지방의 행정도지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런던大와 옥스퍼드大를 나와서 교사를 하다가 1856년 인도 뿌나에 있는 국립 산스크리트 대학 교장이 되었다. 7
년간 근무하다가 영국에 와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신문 기자가 되었고, 이후 40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도 문학 활동을 했고, 고산등반을 하고, 아프리카 사막을 횡단하는 탐험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1879년《아시아의 빛》을 발표하자, 일약 유명해졌다. 잠깐 사생활을 살펴보면, 전 부인들의 사별로 세 번째 부인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정황을 보면, 그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문학 사상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동양의 정신문화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아시아의》은 대승 경전으로 부처님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수 있는 『보요경 普曜經 The Lalitavistara Sūtra 』에서 내용을 자유롭게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일본 터키 페르시아와 시암(태국)에서 훈장을 받았고, 아나가리카 다르마필라와 대각회(大覺會)를 공동 창립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인도방문과 대각회 창립 이후, 1893년 시카고의 세계종교의회(世界宗敎議會)에 남방불교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 힌두 구루인 스와미 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1863〜1902)를 만나서 인도의 종교 문제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보드 가야를 비롯한 불교 성지에 힌두 승려들의 핸들링에 대해서 설명했다. 스와미 위베카난다는 힌두 승려로서, 성자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 1836-1886)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