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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3년 9,10월호] 스텔라의 마음공부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3.11|조회수20 목록 댓글 0

 

 

 

 

스텔라의 마음 공부

다양성에 대한
진정한 가슴 열림

 

 

 스텔라 박

 

 

LBBTQI의 상징인 무지개빛 깃발

 

 

다양성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 마야 안젤루(미국의 시인)-

 

 

몸으로 경험한 다양성

 

내가 처음 ‘다양성(Diversity)’이란 단어를 접했던 것 은 2017년 UCLA MAR에 서 실 시 하 는 TMF(Training as Mindfulness Facilitator, 마인드풀니스 지도자 과정) 중 프랙티컴 기간에서였다.
TMF의 지 원 서 에 도 ‘다 양 성 교 육 (Diversity Training)’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고 대충 무슨 의미인 줄은 파악했지만 구체적으로 ‘다양성 교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나흘간 하루 종일 실시되는 프랙티컴 기간 동안,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다양성을 경험할 기회를 갖게 됐다.
클래스 지도자는 교육생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 리더들에게 카드 게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리더들로부터 전해들은 그 매뉴얼에 따라 게임을 했다. 게임에서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던 팀을 떠나 옆의 팀으로 가야 했다. 우리 팀에도 바로 옆 팀에서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새로 합류했고, 우리 팀에서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옆의 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사람이 게임하는 방법이 영 수상쩍다. “어떻게 저렇게 패를 던진다지?” “제 정신맞아?” 나를 포함한 우리 팀원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 판에서도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옆의 팀으로 쫒겨 나갔다. 다시 옆 팀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우리 팀으로 들어왔다. 그가 카드를 플레이 하는 방식은 좀전에 합류한 사람보다 더 형편 없었다.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옆의 팀으로 옮겨가기를 반복한 결과, 우리 팀은 맨처음 때와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 있었고, 그들의 카드 플레이 방식은 생경하다 못해 너털웃음이 나는 수준이었다. “이제 그만” 이라는 게임 인도자의 선언 이후,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각각의 팀들에게는 전혀 다른 게임 방식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옆 팀에서 온 사람들은 현재 팀으로 오기 전, 자기 팀에 주어진 방식으로 게임에 임했던 것. 각기 제각각의 방법으로 카드 플레이에 임하니 기존의 사람들이 볼때는 “이건 뭐지?” 라는 느낌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게임의 목적과 플레이 방법을 알게 되자 답답함으로 가득차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양성’을 온 몸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다양성으로 가득찬 삶은 ‘우주의 큰 농담(Cosmic Joke)’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구나. 유러피언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인 집단에 아시안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들어갔을 때 느끼는 느끼는 당혹감, 또 대부분의 유러피언들이 느끼는 이질감을 이처럼 몸으로 체험해볼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다양성의 벽

 

미국의 불교 수행 공동체에서는 다양성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갖고 있다. 소수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집단이 느낄 만한, 보이지 않는, 하지만 분명 느껴지는 그들만의 리그, 문턱, 진입장벽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샌프란시스코 젠센터도 다양성 지침을 갖고 있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한 명 새로 공동체에 들어왔다. 이 공동체는 절대적으로 유러피언 아메리칸들이 다수이다. 새로 들어온 아프리칸 아메리칸은 아무리 이 공동체에 섞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기존의 유러피언 아메리칸 멤버들이 의식적으로 새로 들어온 그에게 “안녕하세요? 우리와 함께 수행해요.” 라고 말하며 다가가더라도 뭔가 느껴지는 벽에 그 아프리칸 아메리칸 새 회원은 조직에 동화되기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 이렇게 소수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다른 소수 민족 회원과 연대할 때야 비로소 약간의 소속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불교 수행 공동체에서는 소수 그룹의 사람들에게 보다 더한 주의력을 집중하고 그것을 표현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까지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비슷한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하고만 살아왔었던지라 다양성에 대한 수용 정도가 그리 높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다르게 생긴 사람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들,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다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나누기보다 “너는 왜 나가 아니고 너인가?” 라며 판단한다.

 


모든 것에 가슴이 열리다

 

가슴 열기를 매순간 수행하던 나는 어느 순간 가슴이 확 열리면서 이 세상 모든 것과 일체감을 느끼는체험을 했다. 전체인 내가, 경험하는 자와, 경험하는 대상을 분리했던 것은, 진정으로 나를 경험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나의 존재를 알기 위해 분리의 경험을 창조해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이 경험하는 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판단
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 경험이 가져다주는 “있음”의 느낌에 집중할 뿐이다. 그렇게 열린 가슴은 이제껏 나와 다른 부류라고 선을 긋고, 분별하던 모든 집단에 대한 완전한 수용을 가져왔다.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가슴열림

 

그 첫 대상은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이들, 즉 LGBTQI+에 대한 가슴열림으로 나타났다. LGBTQI에서 각 알파벳은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퀴어(Queer), 인터섹스(간성, Intersex)를 뜻한다. +는 위에 언급한 존재 외에도 다양한 성정체성, 성별 정체성, 신체적 성특징을 지닌 존재가 얼마든 있고 언제든 새로 등장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내가 나와 다른 성적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한 순간은 현재 LA 브로드(The Broad)에서 전시 중인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그림 앞에 섰을 때였다. 동성애자인 그는 1988년에 에이즈에 걸려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종차별 반대, 에이즈 교육, 동성애자 인권운동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그림은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했으나 아직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꽉 막힌 사회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전통적인 성 정체성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성 정체성을 갖게 된 이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몸이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띄고 태어난 우리들은 생후 5-6년 사이에 “나는 여자야.”, 또는 “남자야.” 라는 성인지를 갖게 된다. 그리고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대로 여성으로 또는 남성으로 조건화된다. 그리고 동성이 아닌 이성에게 매혹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그렇게 되어간다.
하지만 LGBTQI+는 그렇게 덧씌워진 사회적 통념과 조건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과연 그럴까”를 단 한 순간이라도 의심해본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마치 달나라로 발걸음을 내디딘 인류처럼, 또 다른 성적 정체성을 실험했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더 자연스러운 조건임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이를 세상에 선포한 혁명가들이
다. 태어난 이후 내가 여성이라는 점을 의심한 적 없고, 사회가 나에게 덧씌운대로 남성에게만 매혹되어야 하는 줄 알고 살았던 나는 다른 성적 취향을 시도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회적 조건화를 받아들인 자, 즉 ‘지도’를 ‘영토’라 여기며 살아온 이성 중심주의인 근대주의자였다. 답습된 성 정체성을 당연시 여기지 않은 이들은 ‘영토’를 탐색해본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브로드에서 전시 중인 키스 해링, 그는 제도화된 성 정체성을 벗어난 혁명가이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에 대한
가슴 열림

 

나는 내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에 대해 열린마음을 가진 줄 알았었다. 하지만 내 내면에서 나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에 대한 분별, 저항을 알아 차렸다.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특징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별 매혹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그 문화와 그 집단은 존재하지만, 보여지지 않는(Unseen) 대상이었다.
처음으로 그들의 죄없음과 그들의 고통을 가슴으로 경험하게 된 것은 워싱턴 DC에 있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뮤지엄(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에 갔을 때이다. 2016년에 개관된 아프리칸 아메리칸 뮤지엄은 미국의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미국의 형성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인종 간
이해와 조화를 증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예제 시대 때 포로로 끌려온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과거에서부터 피와 목숨으로 자유를 산 남북전쟁, 시민전쟁 시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흑인 인권 운동 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기여와 업적을 탐구하며, 그들의 역사를 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아티팩트, 전시물, 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사용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초원에서 필요한 것만 취하며 평화롭게 살던 그들이 탐욕에 사로잡힌 얼굴 하얀 이들에 의해 사냥돼 노예선에 올라타 신대륙까지의 여정에 올랐다. 신대륙에 도착해서는 발가벗긴 채로 물건처럼 진열돼 팔려졌다. 팔려간 노예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힘겨운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러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당했던 것과 다름 없는 고통을 그들도 지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고작 35년을 지배받고도 그 잔인함에 치를 떤다. 미국 땅에서 흑인 노예의 역사는 16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에서 흑인 노예 20명이 거래된 이후, 노예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여 1779년에는 무려 20만 명의 흑인 노예가 팔려 왔었고, 1850년경 남부지방에서는 노예 수가 무려 320만 명에 달했다. 수탈과 인권 말살, 지독한 인종차별은 당연시 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중인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한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그후로도 계속됐다.

 

 

탐욕스런 얼굴 하얀 이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흑인 노예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55년, 몽고메리 시립 공영 버스의 흑인 좌석차별 사건 이후, 비폭력 평화 시위를 이끌며 흑인 해방 운동, 흑인 인권 운동을 주도했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을 비롯한 많은 흑인 관련 운동과 인권 운동을 이끌어 법률과 제도의 수정, 공민권법, 투표권법의 개정과 흑인의 권리를 증진시켰다.
나는 그가 수많은 흑인들을 이끌고 행진했던 워싱턴 DC 거리를 “코리아 피스 나우(Korea Peace Now!)” 외치며 행진하면서 흑인들의 울분과 함성, 그리고 더 나아가 평화에의 요구와 선언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추호라도 흑인들의 문화를 저급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완전히 항복시키고 그들의 저항의 역사에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들이 피와 생명을 댓가로 쟁취한 권리를 그냥 누리면서도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낼 줄 몰랐었던 것이다.

 

쇠사슬에 팔이 묶인 흑인 노예

 

 

 

아메리카 원주민과 라티노들에 대한
가슴 열림

 

스미소니언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또 다른 다양성에 가슴이 열렸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그들의 후예인 라티노들 또한 얼마나 얼굴 흰 사람들의 탐욕과 폭력의 희생자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들 역시 짓밟힘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는지를 가슴으로 느낀 것이다. 나는 참회와 함께 용서를 빌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에 대한
가슴 열림

 

21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최근 나는 내가 얼마나 이들을 향해 ‘오직 사랑과 이해’가 아니라 아주 미묘한 편견을 갖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특히나 조현병, 양극성 장애(조울증),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기보다 판단하고 저항하는 경향성을 띄었음을 고백한다. 내 안의 심리적 장
애를 만나면서 나는 이들 역시 어린 시절의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트라우마), 또는 유전적 이유로 인해 이런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이해와 함께 비로소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라는 공감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다양성에의 인정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지금길

 

다양성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선물

 

인류는 다른 것을 즐기고 축하하고 나누기보다, 판단하고 심판하고 미워하고 적대시하고 싸우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다양성은 진정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선물이다.
살아온 배경, 문화, 언어, 종교, 성별, 성적 정체성, 능력 등 다양한 측면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은 우리가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고,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다양성은 또한 혁신과 창조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서로의 강점을 합치면서 새로운 지식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결합시켜 보다 현명하고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그 가치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종종 편견과 선입견에 묶여, 서로를 평가하고 분류하며, 다른 이들과의 접점을 놓친다. 또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이가 경험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가슴 열고 귀를 기울여 경청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며 진정으로 다양성에 대해 가슴이 열린다면, 세상은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워질까.
이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겠지만, 우리의 작은 노력들은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열려있는 마음을 갖고, 자신을 바깥의 시선으로 돌아보면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연대를 느끼는 것에 큰 보상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것에 가슴이 열린 상태는 이미 메트릭스를 벗어난, 천상계이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때, 삶은 있는 그대로 열반이다. 이것이 21세기 다양성의 시대에 더욱 가슴을 열어야 하는 이유이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
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
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
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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