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마음을 비우고 조건 없이 베풀자
글 보선 스님(두륜산 대흥사 조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합니다. 생각하고 도구를 발명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에 의해 여러 동물이 높은 지능으로 도구를 사용하며 소통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다른 점은 고도의 정신문명을 차곡차곡 이루어 왔으며 이를 통해 개개인은 물론 인류가 나아갈 바를 확실하게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서술한 본생경과도 비교됩니다. 본생경은 부처님이 여러 생을 거치면서 경험한 547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전생에서 지도자 또는 평범한 사람, 때로는 귀신이나 동물로도 살았고 보살의 삶도 살았습니다. 부처님은 전생의 다양한 삶 속에서 시종일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통하여 선행과 공덕을 쌓았기에 마침내 현생에 최고의 지혜 완성을 이루고 인류의 큰 스승이 되신 것입니다.
지구촌 도처에서 사람들은 매일 평화의 기도를 하지만, 현실은 전쟁과 질병, 굶주림으로 연일 무수한 목숨이 죽어가며 다치고 있습니다. 주거지를 잃고 방황하거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조차 제공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 글을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는 포성이 울리고 확전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단 한 모금의 물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육신의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인데 이러한 고통을 같은 인류끼리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전쟁의 승리자는 없습니다. 전쟁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며 인류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문명을 퇴화시킬 뿐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도시와 자연 환경파괴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러한 전쟁이 끝이 보이지 않고 당사국 지도자들은 물론 각자의 마음속에 전쟁 중단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비와 화해보다는 원한과 점령, 배제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불행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추앙하고 생사를 의탁하는 신이나 절대적인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 스스로가 배척하고 있으니,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품어도 되는지 회의감마저 듭니다.
부처님은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원한은 그치리라. 참으면 원한은 그치게 되니 이것이 부처님의 법이다.’ 하셨습니다. 불교는 항상 깨어 있어서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다사다난하고 위태로운 삶의 현장에서도 흔들리거나 편견 없이 바르게 보며,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말하며, 바르게 행동하며, 바르게 생활하며, 바르게 정진하며, 바르게 깨어 있으며, 바르게 집중해야 한다고 이릅니다. 이를 팔정도라 합니다.
여기서 ‘바르게’는 차별과 분별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즉 민족이나 인종이 다르다는 분별, 생김새와 언어가 다르다는 분별, 종교가 다르다는 분별, 배움의 차이가 있다는 분별, 대국 소국 따지는 분별, 역사가 다르다는 분별, 장애가 있다고 하는 차별, 조금 더 안다고 하는 차별, 나와 친하다는 분별, 나만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등등의 아상과 아집으로 인한 차별과 분별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세계관의 충돌과 불평등, 전쟁으로 점철된 2023년을 보내고 희망의 2024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의 한 대목인 제7장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을 소개합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또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여래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만한 일정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가 취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요, 또 법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가하면 모든 현성(현인과 성인)이 다 무위의 법을 쓰시되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所以者何 一切賢聖皆以無爲法 而有差別)”
풀어서 말하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위없이, 더할 나위 없이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분명 최상의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이신데 당신께서 무엇인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있으며 또한 법문을 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묻는 것이니 자못 황당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높은 수행의 경지에 오른 수보리는 기승전결로 단호히 이렇게 답합니다.
여래가 깨달았다는 정한 법(진리)은 없습니다.
여래가 말씀으로 가르쳐 보여주셨다는 법도 없습니다.
이유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잡을 수도 없습니다.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현성(현인과 성인)이 다 무위의 법을 쓰시되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일체를 부정하고 마지막 구절로 귀결하는데,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세상에 유행되는 말로 간결하게 설명을 하면 ‘마음을 비웠다’ 또는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대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것은 그저 말로만 비운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에서도 집착이 없고 진리나 깨달음이라는 것까지도 초월한 마음의 비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 즉 무위의 경지에서 세상과 사물을 대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이 경구의 핵심 요체입니다.
여래는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떠난 마음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며 행동하니 여래는 가히 절대 그것의 존재입니다. 동시에 자비 그 자체입니다.
저는 종교를 떠나서 각국의 지도자와 세상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는 각계각층의 여러사람들 그리고 불자와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무위의 마음을 바탕으로 매사를 생각하고 세상을 대하며 분쟁을 해결하자고. 그래야만 인류는 지속가능합니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환경문제, 전쟁, 기아, 에너지 문제에서부터 사사로이는 개인 사이의 갈등과 다툼까지도 그 근본 원인을 따져 들어가면 결국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과 분별 그리고 그에 따른 배제와 불평등, 내 생각만이 옳고 나의 사상과 이념만이 진리라는 착각 속에 각자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반조해보면 우리 인간은 저 광활한 우주의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서 발버둥 치는, 길어야 100여 년 살다 가는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일으킨 분쟁을 인간이 해결 못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인류와 성현이 이룩한 위대한 가르침을 이어가서 평화로운 지구촌, 우리 사회를 극락 세계로 장엄하는 일은 너와 나라는 분별과 차별의 벽부터 허물며, 고통 받는 이웃에 귀기울이고 자비의 손을 먼저 내미는 데서부터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바로 나의 고통임을 인식할 때 인류사회는 모든 난제를 해결하고 개개인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생각과 정한 법이라 하는 것의 바탕은 공(空)합니다.
어찌하여 나만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며 별칭을 붙이고 차별합니까?
지나간 세월의 역사와 법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미래의 일과 법은 아직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재의 모든 것에 집착을 떠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것입니까?
마음에 집착을 여의었다면 나의 편도 너의 편도 없으며 원한도 사라집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동물도, 이름 모를 어떤 생명도 차별 없이 대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너와 나, 모든 이들이 품을 때 세상은 아름답게 됩니다.
2023년의 아픔과 절망은 온 인류의 책임입니다.
양보하고 이해하며 나누는 보살행이야말로 인류 구제의 길입니다.
2024년 다시 밝아오는 새해, 우리는 한 인류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조건 없이 대화하고 베푸는 보살행으로 인류사회를 장엄해 나갑시다.
두륜산 대흥사 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