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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4. 2,3월호] 부루나 칼럼 Ⅰ화를 대처하는 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6.19|조회수5 목록 댓글 0

 

부루나 칼럼 Ⅰ

명상 네 꼭지(7)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명상 #86, 2023. 8. 26

인디언의 약속

 

18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서부의 대평원에는 수백만 마리의 들소(버팔로)가 들끓었습니다. 대초원의 지평선을 가득 메운 들소 떼가 발굽을 울리고 내달리며 이동을 할 때면 엄청난 진동으로 천지를 울렸으며 지나가던 기차도 멈춰 서서 한 시간 가량이나 기다려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에 평원에 살던 코만치, 다코타, 샤이엔, 쇼쇼니, 블랙푸트, 아파치, 나바호 등등 여러 인디언 부족들에게 이 들소는 삶의 버팀목이었습니다. 백인들의 주식이 밀이었듯이 인디언의 주식은 들소의 고기였으며 많은 생필품들도 들소에서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꼭 필요한 만큼만 들소를 사냥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냥에 나가 시위에 화살을 메우기 전에 이러한 약속을 하며 들소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내 가족이 지금 얼마나 굶주리며 왜 꼭 너를 죽여 살코기를 얻어야만 하는지를 알아 다오.

너를 사냥하는 것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단다. 이 다음 세상에 내가 들소 되고
너가 사냥꾼 되었을 적에 나도 굶주리는 너의 가족을 위해 내 살코기를 주마."
자연에 경외심을 가지고 내세를 믿으며 모든 동식물을 나의 조상이며 형제요 피붙이라고 믿
던 그 인디언들은 지금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이라며 인디언 말살을 밀어붙인 백인들 때문이지요.
처음에 백인들은 느닷없이 인디언의 천막촌을 습격하는 등 직접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만만찮은 저항에 자기들도 피해가 속출하였으며 현격한 전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목표 달성은 그리 손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영국에서 시작된 기름진 쇠고기에 대한 수요의 물결이 미국에까지 번져 왔습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유럽의 목장은 물론이고 남북전쟁으로 인해 미국 남부의 목장들도 황폐화되어 버렸을 때였습니다. 미국 서부의 드넓은 평원과 공짜 풀은 인디언과 들소만 없다면 황금알을 낳는 목장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에 영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대량의 자본금, 돈밖에 모르던 미국 서부의 목장주들, 그리고 살찐 쇠고기에 목말랐던 많은 백인들의 탐욕이 어울린 결과 미국의 연방정부는 방침을 바꾸었습니다.
총으로 인디언을 쏘아 죽이는 대신 그들의 양식인 들소를 죽여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들소가 없으면 인디언은 굶어 죽을 테니까요.
이 정책은 몇해만에 대성공을 거두어 평원의 들소떼는 천지에 하얗게 깔린 뼈다귀만 남기고 거짓말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굶주려 기가 꺾이고 굶어죽지 못해 살아남은 소수의 인디언은 비좁은 보호구역에 갇혀 이제는 거꾸로 정부로부터 목장의 쇠고기 토막을 받아 연명하는 구차스러운 삶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이렇듯 우리가 그릴에 굽는 이른바 LA 갈비 한 토막에도 겹겹이 카르마(업)가 배어 있습니다.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모두 되돌릴 수는 없지마는, 때로는 인디언의 그 약속, 그들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과 간절했던 기원들을 떠올리는 것도 영 헛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명상 #91, 2023. 9. 30
성장과 성숙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아이가 어서 튼튼하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조금 늦자라는 아이도 있고 웃자라는 아이도 있지만 대개는 거의 평균에 가깝게 자랍니다. 그리고 다 자라면 성장이 멈추고 어른이 되어 갑니다.
만약에 아이가 늦자라다 너무 일찍 성장이 멈추어 버리면 난장이가 되며 이와 반대로 너무 오래 웃자라다 보면 어처구니(거인)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람이라는 것도 너무 벗어나지 않고 알맞아야 좋은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자람과 함께 조금씩 열매를 맺으며 여물어 익어 가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성장과 함께 성숙이 조금씩 시작되다가 성장이 멈춘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성숙하는 계절이 이어지지요.
그런데 성숙은 성장과 달리 그 한계가 없어 보입니다.
익고 또 익어 마침내 성인이나 부처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너무 멀리 갔다 탓할 수 없는 것입
니다.
그런데 속세에 사는 우리가 사람으로서 성숙을 하자면 무엇부터 갖추어야 할까요?
재산일까요 명예일까요? 아니면 학위나 인맥, 사회적인 지위일까요?
그런 것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성숙의 핵심 사항은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저도 한참 못 미치기는 하지만 이렇게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는, 남에 대한 이해심을 기르고 나와 다른 자를 경멸하거나 말살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은, 뭐든지 독차지하려 들지 않고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주위와 다음 세대를 생각하여 환경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더라도 성장보다는 성숙을 위한 종교를 찾아서 제대로 성숙하기 위한 수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명상 #86, 2023. 11. 11
이판사판이다 이거야?

 

복수극을 다룬 한국의 어느 인기 연속극에서 교회에 다닌다며 두 얼굴을 한 주요 등장인물이 주인공을 맞닥뜨려 이렇게 소리칩니다.
'뭐, 커서 만나니까 이판사판이다 이거야?'
그러자 주인공은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큰일 나, 사라야. 이판사판은 원래 불교용어야'
이렇듯 한국 교회에서는 불교용어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나 봅니다.
그런데 사라라는 등장인물은 불교용어인 줄도 모르고 불교용어를 내뱉은 거지요.
사라 뿐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는 불교에서 온 것인 줄 모르고 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교회, 기도, 기원, 성당, 신도, 예배, 장로, 전도, 지옥, 참회, 천사....
아시다시피 우리말에는 금강산, 안양시, 보광동 등 숱한 지명이나 다른 고유명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쓰는 말 중에도 많은 것들이 불교에서 왔기에 이들을 빼면 말이 잘 안 될 지경입니다. 우선 일반인들이 불교의 냄새를 거의 못 맡으며 쓰는 보통명사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자말이지요.
각색, 각성, 강당, 강사, 강좌, 공부, 과거, 관념, 교도, 교수, 국민, 근본, 기특, 나락, 내의, 노파심, 누비옷, 늦깎이, 다반사, 대중, 도구, 도덕, 면목, 명복, 명성, 목욕, 무진장, 묵인, 미래, 밀어, 방법, 법, 법률, 별도, 분신, 불가사의, 비법, 사부, 사유, 사자후, 살림, 상속, 선생, 세계, 수면, 스승, 습관, 식당, 신앙, 실상, 심금, 악마, 안심, 요령, 용맹, 은덕, 은사, 이력, 인간, 인식, 인심, 자유, 점심, 제자, 종교, 종자, 좌우지간, 주인공, 직업, 진실, 짐승, 차별, 출세, 타락, 투기, 판사, 평등, 포섭, 학생, 허공, 현관, 현재, 혼백, 환희, 희사....
조금 신경 쓰면 불교 빛깔이 느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고행, 공덕, 도량, 말세, 번뇌, 야단법석, 이심전심, 이판사판, 인과응보, 인연, 자업자득, 중생....
그리고 인도말의 소리를 일부 또는 전부 한자로 옮긴 낱말들 가운데 일반에게 별로 낯설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람, 건달, 단말마, 도로아미타불, 마구니, 사리, 삼매, 아비규환, 아수라장, 억겁, 찰나....
그런데 말이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좋은 뜻으로 좋게 써서 어떻게 널리 베풀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느냐에 그 값이 달린 것이지 그 말의 뿌리가 어디냐, 어디를 거쳐 왔느냐를 가지고 이제 와서 연고권이나 소유권을 다툴 수는 없겠습니다.
그 말의 연고를 알고 있으면 됐지 행여나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이판사판, 종교간에 이런 것 가지고 맞짱 뜰 일은 아닐 터이니 말입니다.

 

 

명상 #86, 2023. 11. 11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해 한용운 스님의 잘 알려진 시입니다.
나는 행인일까요 나룻배일까요?
한 살 한 살 나이를 들면서 이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가는 나룻배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하루를 되돌아보면 가까운 집안에서나 먼 바깥에서나 흙발로 아무데나 짓밟
고 다니는 행인에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게 맞다면 나를 날마다 태워 준 나룻배는 누구일까요?
집안 식구들일까요, 벗들일까요, 가깝고도 먼 이웃들일까요?
아니면 이 한낱 중생이 언젠가는 깨우칠 것을 기다리며 잔잔히 미소를 머금고 계시는 부처님일까요?
한 해가 저물어 가는군요.
바다 저 건너, 나를 건네다 주고는 되돌아가 기슭에 쉬고 있는 낡은 배들이 보입니다.
이미 부서져 흩어지고 모래에 묻혀 버린 아버님의 배
그리고 이제 그만 주저앉으려는 뱃전과 놓여나려는 삿대를 그러잡고 있는 어머님의 배가 보입니다.
당신은 나룻배
나는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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