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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4. 2,3월호] 소신공양은 부처의 가르침에 반한다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6.19|조회수39 목록 댓글 0

 

 

 부루나 칼럼 Ⅱ

 

소신공양은
부처의 가르침에 반反한다

 

글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불교는 ‘비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면서 ‘나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비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자력신앙이다. 부처는 자기 아버지며 계모, 그리고 아내며 아들에게 도를 깨치게끔 해주지 못했다. 도를 닦는 것은 각자가 해결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부처에게 빈다고 해서 도가 저절로 깨쳐지는 게 아니다. 부처에게 ‘나 부자 되게 해주세요.’하고 빈다고 해서 부처가 나에게 부자 되게 해주는 종교가 아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내가 스스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운명을 갖고 태어나야 한다. 다음 세상에 좋은 운명을 갖고 태어나고 싶으면, 지금 5계를 지키면서 부지런히 생활하면 된다. 지금 게으르고, 5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다음 생(生)에서 좋은 운명을 갖고 태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신공양

 

소신(燒身)이나 분신(焚身)은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살라 죽는 것을 말한다. 부처에게 자기 몸을 바치는 경우를 소신공양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신 자살이다. 한국의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지낸 자승스님이 지난 2023년 11월 29일에, 69세의 나이로, 소신(燒身)했다. 조계종 본사에서는 자승스님의 입적은 소신공양이라고 발표했다.
1963년에, 월남정부는 불교국가를 가톨릭국가로 만들려고 했었다. 불교를 탄압했다. 항의 차 틱꽝득(Thich Quang Duc)스님이 사이공 한 복판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자살했었다. 이것은 불교를 탄압하는 정부에 대한 항의로서 분신했었다. 이것은 분신자살이지, 소신공양은 아니다.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은
불살생(不殺生)이다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먹기 위해서는 살생해야 한다.
공양기도에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道業)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음식은 살생을 의미한다. ‘도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불도(佛徒)들이 해야 하는 일은 도를 직접 닦아나간다.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소신공양은, 우리 몸에 불을 태워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우리가 도를 닦아나갈 것이며, 또 어떻게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겠는가? 부처께서 살아계셨을 당시 만약 소신공양에 대해 알고 계셨더라면, 소신공양을 결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부처가 살아 계셨을 당시에는 소신공양이라는 게 없었다.

 

 

수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한 공덕은?

 

<금강경제13분>에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자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수많은 목숨을 바쳐 널리 보시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경전 가운데서 네글귀만이라도 받아 가지고 남을 위하여 설명해주었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심히 많으니라.”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수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한 것보다는 금강경의 네 글귀를 남을 위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부처님께서, 인간에게 소신공양이 참된 공양이라고 칭찬하시겠는가? 오히려 크게 화를 내셨을 것이다.
소신공양을 하면, 소신하는 순간 죽어버리고 만다. 죽어버리면, 어떻게 도를 닦아나가고, 그리고 어떻게 중생을 제도해줄 수가 있단 말인가.

 

 

부처가 세상에
태어나신 이유?

 

태어남은 고통이다. 왜 고통이냐고?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병들어야하고 죽기 때문이다. 죽어서 없어져버리면 괜찮은데,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게 문제이다. 업에 따라 동물로도 혹은 지옥에 태어난다.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부처는 인간을 생과 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인간을 구제해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던 것이다. (우리말 팔만대장경, 방등경법문).
부처는 “내가 모두 다 교화하여 해탈의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 제2분과 3분). 그런데 부처께서 소신공양을 바라시겠는가? 소신공양이란, ‘너 자신을 불을 태워 죽어서 너의 몸뚱이를 나에게 바치라’는 말인데, 이런 소신공양을 부처가 바라시겠는가? 결코 바라지 않는다.
부처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심히 수도(修道)해서 도를 깨치고, 동시에 중생을 제도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에 소신공양을 부처들이 찬양하는 대목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한번 알아보자.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나온
소신공양

 

때는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 때의 일이다. 일체중생희견(一切衆生喜見) 보살은 고행을 즐겨 익히고 일월정명덕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정진하고 수행하여 1만 2천 년 동안 일심으로 부처님을 구하였다. 마침내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이 삼매를 얻게 되어 크게 환희했다. 보살은 일월정명덕 부처님과 <법화경>에 몸으로 공양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몸으로서 공양하리라 하고, 곧 여러 가지 전단· 훈륙· 도루바의 향과 필력가· 침수· 교향들을 먹었다.
또 1천 2백 년 동안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또 몸에 발랐다. 일월정명덕 부처님 앞에서 하늘 보배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발원력으로써 몸을 태웠다. 그 광명이 80억 항하의 모래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느니라.
그때에 그 세계 부처님들께서 동시에 찬탄하시었느니라.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야, 이것이 참된 정진이니라, 또한 이것이 여래께 드리는 참된 공양이니라.
(중략). 왕국이나 처자를 보시하더라도 또한 이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그 일체중생희견 보살의 몸이 1천 2백 년 동안을 탄 뒤에야 몸이 다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일체정명 덕불의 국토 가운데 정덕왕 집에 결가부좌하고 홀연히 화생(化生; 어머니의 태를 거치지 않고 홀연히 태어남)하였다. 그리고 게송으로 그의 아버지께 말하였느니라.

 

부지런히 큰 정진 행하려는 뜻
아끼던 내 몸까지 선뜻 버리고
거룩하신 세존께 공양을 하니
위없는 큰 도(道) 구하기 위함이었나이다.

 

 

나의 해설

 

위에 써진 것을 보면, 세계부처님들은 보살의 소신공양을 보고서 찬탄하시었다. “이게 참된 정진이니라. 또한 이것이 여래께 드리는 참된 공양이니라.” 라고 소신공양을 찬탄하시었다. <법화경>에 써진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은, <법화경>에서 소신공양한 분은 사람이 아니고, 보살인 것이다. 보살은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다. 보살은 신(神)에 가까운 분이시다. 보살은 어찌 보면 신이다. 여기서 보살은 1천2백 년 동안 꽃 향유를 마시고 몸에 발랐다고 했다. 휘발유를 몸에 뿌려 태운 것이 아니다. 보살은 신통력의 발원력으로 몸을 태웠다고 했다. 신통력으로 몸을 태웠기에, 1천2백 년 동안 몸을 태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몸이 1,200년 동안 살 수가 있겠으며? 또한 탈 수 있겠는가? 몸이 타고 있는 동안 보살은 살아계셨을까, 혹은 죽어있는 상태에서 몸이 탔을까?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신통력으로 몸을 태우고 있었기에, 몸이 타고 있는 1천2백 년 동안 보살은 분명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몸이 불에 타고 있었을 때의 뜨거움은? 발원력으로 타고 있는 불이기에, 견디어 낼 수 있을 정도의 뜨거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보살은 몸이 다 타고 난 후에는, 정덕왕 집에 ‘결가부좌하고서 홀연히 화생했다’고 했다. 몸이 타고 있는 동안, 살아계셨기에 보살은 결가부좌하면서 도를 계속 닦아나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보면, 보살은, 몸에 불을 태워놓고, 그리고 살아있는 채, 결가부좌하면서 도를 닦아나가고 있었던 같다. 그래서 “세존께 공양을 하니 위없는 큰 도를 구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부처는 결코 인간에게 소신공양이 최고의 보시이고 최고의 정진이라고 말하지를 않았을 것이다. 보살이기에, 죽지 않는 보살이기에, 몸에 불이 타고 있어도 계속 도를 닦아나갈 수 있기에, 보살에게 소신공양이 좋은 공양이라고 칭찬했었던 것이다.

 

 

자승스님의 열반송

 

1) 생사(生死)가 없다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2)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1)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라고 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서는 생(生)과 사(死)가 없는 곳이 없다. 하지만 진여(眞如)의 세계는 다르다. 우리가 자주 독송하는 <반야경>에는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다”고 했다. 혜능대사도 도를 깨치고 나서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生滅) 없음을 알았으리요.”라고 말했다.
<금강경, 제29분>에도 “여래는 어디로조차 오는 바도 없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 하는 때문이니라.”라고 했다. ‘오는 바도 없으며 가는 바도 없다’는 이 말은 태어남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진여의 세계에서는, 태어남도 없고 또한 죽음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계에서는 엄연히 태어남도 있고 또한 죽음도 있다. 자승스님은 현상계의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2)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라고 했는데, 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까? 사람들은 ‘죽지 않기를’ 바란다. 건강하게 영생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자승스님은 이미 죽음을 초월해버렸기에,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 와 있었다는 말일까? 그래서 소신(燒身)했었을까?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스님은, 수도를 열심히 해서 도를 닦아야 하고, 동시에 중생을 제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소신해버린다면? 중생을 제도해야할 의무를 저버리고 만다. 소신공양은 부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난 행위이다.

 

부처의 마지막 말씀

 

부처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내 몸은 이미 늙었다. 나의 나이는 지금 80에 들려고 하지 않느냐? 형상이 썩은 수레와 같으니, 이제는 더 굳고 강하기를 바랄 수가 없다. 나는 것과 죽는 것은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난 사람은 죽지 않을 수가 없다. 아난다야, 너는 계율을 지키면서, 법(부처의 가르침)에 의존해서, 너 자신이 스스로 도를 닦아 나가라. 결코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너 자신이 스스로 도를 닦아 나가라.”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부처님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법에 의존해서 우리 스스로가 도를 닦아 나가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소신공양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한 행위이다.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수행덕목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이다. 우리가 도를 닦아서, 우리가 보살이 되어서,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게 대승불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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