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세계 Ⅱ
달마에 대한 단상
글 공일 스님
서울대학교 졸업,
인도철학자,
현재 서울 봉은사 포교국장
달마, 동아시아 문명의 최대 아이콘이었다.
이제는 퇴색했으나 한때는 그러했다.
달마를 되새겨 본다.
처연한 독살림의 그 끝자락에서 보여주는
달마의 일색과후一色過後는
결국 외롭게 총령고갯마루를 넘어서는 서늘함이다.
달마의 고단한 외로움은
바람과 물의 원형적 이미지에 의하여
달마의 풍수風水로 거듭난다.
달마는 무사히 타방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 듯하다.
불심천자 양무제는 달마를 찾아 외상값을 받고자
그의 무덤까지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외짝 신발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달마에게 남은 것은 원형적 물의 이미지이다.
설악무산은 달마십면목을 통하여
‘화적질’에서 찾아낸 불의 이미지와
날 선 바람 소리에서 제시한 바람의 이미지로
달마의 면목을 기묘한 선적 이미지로 그려내었다.
<달마 7>에 와서야
비로소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니는
달마의 이미지를 다음처럼 제시한다.
그 순한 초벌구이의 단단한 토질(土質)에
먹으로 찍어 그린 대가 살아남이여
그 맑은 잔잔한 물결을 거슬려 타고 가네. <물결을 타고>
달마의 일곱 번째 면목에서 “먹으로 찍어 그린 대”에서도 먹물의 원형은 어디까지나 물이다.
그럴 때 물은 생명을 담보하는 마법적 힘을 지닌다.
먹물로 그린 대나무이지만 생명력을 회복하고 살아나게 된다.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힘을 통해 자기복제나 자기회복을 도모한다.
물과 생명의 상관성은 원형에 대한 은유로서 낚시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황금 자라 한 마리 건지면 바다도 마를 것인데 공연히 작은 배를 유유히 띄웠구나.
오늘 파도에 낚을 길 없다면 새로운 달에 다시 낚을 필요는 없느니라.
<雲門杲頌>, 金鼇一掣滄溟竭 徒自悠悠泛小舟 今日煙波無可釣 不須新月更爲鈎
팔 끊기는 눈에 섰기보다 더 어렵거늘 마음을 찾을 수 없을 때 비로소 마음이 편하였네.
만경(萬頃)의 끝없는 갈대밭 속에 도사린 어부마다 낚싯대 가진 줄 뉘 알았으랴.
<智海逸頌>, 斷臂難於立雪難 覔心無處始心安 誰知萬頃蘆花境 一一漁翁把釣竿
맑은 물에 머리를 헹구어도 비듬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과도한 청결의식 때문이다.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며 생긴 부스럼이란 삶의 완전성에 도달하고자 시도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소양증(搔痒症)의 일환이다.
그리하여 피부병을 앓거나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성인의 표식이기도 하다.
성자들에게는 속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육신의 상태가 아니라 지상과 천상 사이의 괴리에서 도래하는 단절감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달마 8>은 이러한 지경을 보여주고 있다. 감아도 머리를 감아도 비듬은 씻기지 않고 삶은 간지러워 손톱으로 긁고 있네
그 자국 지나간 자리 부스럼만 짙었네. <삶은 간지러워> 달마의 풍수를 배우고자 한다면
그대는 구약성서의 욥처럼 온 몸을 피가 흐르도록 긁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방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스스로 가려워 온갖 도처를 막론하고 이전투구의 꼴을 보이고 있지 않나? 몇년째 우크라이나는 전쟁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또한 그렇고 남과 북,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풍수라도 배워야 할 판이다. 저 바람과 강물의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