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문화
사경의 미학
김경호 사경장의 예일대학교 전시회와 강연
글 이주성(예일대학교 박사과정생)
고려사경은 고려자기, 고려불화와 더불어 한국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문화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경호 사경장은 고려 이후 억불의 조선을 거치며 700년 가까이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사경의 전통을 이 시대에 되살린 인물이다. 김 사경장은 40년 넘는 세월을 오로지 고려사경의 전통복원을 위해 바쳤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는 사경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신규 지정하고 김경호 작가의 고려사경 복원에 대한 노력과 실력을 인정하고 사경장 보유자(인간문화재) 1호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수 많은 전시를 한 김 사경장의 전시는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2005년 뉴욕한국문화원을 비롯하여 2010년 켈리포니아 LACMA에서 하였고, 미주현대불교와 사단법인 뉴욕한국문화재단 주최로 2012년 뉴욕시 플러싱 타운 홀, 2014년 뉴욕 갤러리 HO, 2019년에 뉴욕시 티베트하우스에서 사경전시회와 강연을 하였다. 김 사경장은 그간 미국에서 전시, 특강, 시연, 워크샵을 30여 차례 하였다.
고려사경을 세계화시키는 일을 하는 김경호 작가 작품이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2월 19일부터 8월 11일까지 6개월간 전시된다.
종교 경전을 손으로 쓰는 사경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하였다.
이번 예일대학교 전시가 기존 전시와 다른 것은 세계 주요 종교 경전이 함께 전시 된다는 것이다. 불경, 성경, 코란, 유대교 경전이 예일대학교 중앙 도서관에서 동시에 전시 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전시로 평가 받을 것이다. 이 전시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편집자 주 -
김경호 사경장의 전시회와 강연이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열렸다. 이는 예일대학교 도서관, 종교학과, 그리고 동아시아연구소가 2022년부터 공동으로 준비해온 매우 의미 있는 행사이다. 먼저 “사경-영적인 수행(Copying Sacred Texts: Spiritual Practice)”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는 2월 19일부터 8월 11일까지 예일대학교를 대표하는 도서관인 스털링 메모리얼 도서관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경호 사경장의 작품 7점과 예일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던 고려사경 1점, 중국 및 일본 불교의 사경 각 2점씩이 함께 전시된다. 또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불교의 사경 자료와 더불어 기독교의 성경, 유대교의 토라, 그리고 이슬람교의 코란 등 여러 종교의 사경 자료 2점씩이 함께 전시된다는 점이다.
종교 경전을 손으로 옮겨 쓰는 사경이라는 전통은 불교와 기독교 등 동서양을 막론한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의 사경 자료가 함께 전시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이번 김경호 사경장의 전시회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를 두고 김경호 사경장 역시 “여러 종교들의 사경에서 많은 영감을 얻으며 이를 나의 작업에 적용 시키려 노력한다. 여러 종교의 사경 자료들과 내 작품이 함께 전시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끄는 스털링 메모리얼 도서관에서 전시회가 개최되었기에, 이번 전시회의 특별함이 예일대학교 소속 학생들은 물론 예일대학교를 방문한 모든 여행객과 방문자들에게 충분히 공유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김경호 사경장의 강연은 2월 27일 화요일에 역시 스털링 메모리얼 도서관에서 “사경과 강연(Sagyŏng and Lecture)”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본 강연에 앞서, UCLA에서 티벳 불교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예일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고 있는 Meghan Howard의 15분 남짓의 짧은 발표가 먼저 진행되었다. Howard는 경전을 필사하는 행위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음을 지적하며 사경이 불교의 전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종교 전반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행위임을 밝히며 발표를 시작했다. 사경은 성스러운 종교 경전을 필사하는 행위로,“특수성”을 지니면서도 대부분 종교에 공통으로 존재해왔다는 “일반성”을 또한 지녔다고 강조되었다.
Howard는 불교 삼보의 법(Dharma)을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을 부처님의 법신(The Buddha’s Dharma Body)으로 해석했다. 또한, 불교의 초기 경전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고, 외우고, 후대로 전달하는 등의 구전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지적했다. Howard는 이러한 구전의 전통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모든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여시아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글귀는 문자 그대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으로,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경전이 부처님의 법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음을 방증하는 글귀이다. Howard는 경전이 단순한 문자들의 집합체가 아닌 부처님의 성스러운 상징 그 자체라고주장 했다. 이처럼 성스러운 불교 경전은 이를 필사하는 사경이라는 행위를 매개로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불교의 전파 그 자체와 다름 없다. 한반도로의 불교 전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Howard는 해인사의 필사된 경전들을 그 예로 들며 발표를 마무리 하였다.
다음으로, 김환수 (일미 스님) 예일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소장의 짧은 축사가 이어졌다. 김경호 사경장을 "한국에서 온 마스터"라 칭하며 청중들에게 그를 우선 소개했다.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김경호 사경장의 교육적 배경도 간략히 언급되었다. 또한 축사 중에 2020년 한국에서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그를 문자 그대로 "한국 문화의 전형(화신)"이자 "걸어 다니는 한국의 보물"로 표현한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김환수 소장은 또한 사경이 종교의 영역을 넘어 영적인 수행의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사경에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은 물론 성과 속의 경계까지 뛰어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와 강연을 위해 힘써준 예일대학교 도서관 전시팀과 동아시아 연구소 직원들 그리고 특히 예일대학교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사서인 Jude Yang (주드 양) 박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축사가 마무리되었다.
김경호 사경장은 청중들에게 양손을 모아 합장 인사를 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이미 많은 강연을 해봤지만, 대본을 쓰고 고치고 완성하는 수고스러운 작업을 거쳐 강연을 준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말했다. 이번 강연을 대하는 그의 특별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먼저 경전에 담긴 고귀한 가르침을 전해 준 많은 성인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을 사경이라는 형태로 이어 내려준 많은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김경호 사경장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눈부신 업적들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들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아닌 사경이라는 전통을 이어 내려온 많은 이들에게 돌리는 그의 모습에서 겸손함의 미덕을 느낄 수 있었다.
김경호 사경장에게 사경이란 무엇일까? 그에게 있어서 사경은 불교 수행과 다름 없다는 것을 강연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번의 출가 시도가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록 승려가 되지는 못 했으나, 다른 방식으로 불교를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인연을 맺었음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 최상의 인연이란 물론 사경이다. 그는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년이 걸리는 기간 동안 하루 8시간 이상씩 사경 작업에 매진한다고 밝혔다. 작품을 완성하는 기간 동안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두문불출 사경에 매진한다는 그의 삶의 모습은 출가와 다를 바 없었다.
더불어 그는 사경이 때로는 고행의 일환이라 설명했다. 붓끝의 도료가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흡사 습식 사우나와 같은 환경에서 사경 작업은 진행된다.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0.1밀리미터의 붓끝에만 오롯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극한의 작업 환경과 집중을 요하는 작업 덕분에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어금니 하나씩이뽑혀 나갔고, 지금은 남아 있는 어금니가 없다고 말했다. 왜 사경을 고행의 일환이라 표현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고행의 끝에 얻는 것을 김경호 사경장은 “자유로움”이라고 했다. 작용이 클수록 반작용이 크듯, 더 많이 웅크릴수록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듯, 고행에 가까운 긴 사경 작업 끝에 찾아올 자유로움은 범인인 필자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또한, 김경호 사경장은 사경을 느림의 미학이라 설명했다. 그는 0.1밀리미터의 한 획을 그으려 할 때 숨 한 번을 잘 못 내쉬면 0.2 내지 0.3밀리미터의 획이 그어진다고 말했다. 숨조차 조절하며 그어내야 하기에 사경 작업은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 0.1밀리미터의 한 획 한 획이 천천히 모여 작품이 완성되는 셈이기에 김경호 사경장의 작품은 느림의 미학을 담고 있다. 차를 타고 쌩쌩 달릴 때는 보이지 않지만, 멈춰서면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멈춰서면 꽃이 보이고, 꽃의 꽃잎도 보이며, 꽃잎에 내려 앉은 벌까지도 보인다. 김경호 사경장은 느림이 성찰로 이어지며, 그것이 삼매요 명상이라고 강조했다. 화살같이 빠른 현대사회에서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져보길 그는 청중들에게 권했다.
멈춰 서면 한숨, 두숨, 숨 쉴 수 있는 공기에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며 말이다. 예일대학교 학생들은 입학 전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 왔을 것이며, 소위 말해 명문대생이 된 후에도 경쟁의 연속인 바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론 느리게 가도 된다는, 느리게 갈 때만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김경호 사경장의 말은 모든 학생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강연에 이어 진행된 사경 시연에서 그가 말한 사경이 갖는 느림의 미학을 엿볼 수 있었다. 직접 붓을 들고 사경 시연을 하자 뒤로 몸을 젖히고 앉아있던 청중들이 몸을 한껏 앞으로 기울여 김경호 사경장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로 확대를 해서 보여줘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꽃봉우리와 꽃잎이 김경호 사경장의 느리지만 정확한 붓끝에서 완성되어갔다. 사경 시연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롭고 세상의 소음이 사라진 듯 고요했다. 필자는 빠른 스포츠를 좋아한다. 한쪽 코트에서 반대쪽 코트까지 눈깜짝할 사이에 달려가 시원하게 덩크슛을 내리꽂는 농구 선수의 모습에 전율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김경호 사경장의 붓끝이 빚어낸 느림의 미학에서 필자는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사경의 미학이었으며, 느림의 미학의 정수였다. 이어서 짧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먼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하루 8시간 이상씩 작업을 하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김경호 사경장은 붓끝에만 마음을 집중할 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라디오와 음악을 틀어 놓고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라디오의 소리와 음악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외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함이라 덧붙였다. 이어서, 0.1밀리미터의 붓끝을 다룸에 한치의 손 떨림도 없는 게 신기하였는지 손 떨림을 방지하는 노하우가 있냐고 물은 학생에게는, 고요와 평화가 있으면 손이 떨리지 않는다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답변을 주었다.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는, 붓을 잡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도록 노력한다고 답했다. 매일 사경을 하며 흐림이 끊기지 않게 유지해야, 다음 날 붓을 잡았을 때 불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루를 쉬었다 다음 날 붓을 잡아도 90점짜리 사경 작품을 만들 수 는 있겠지만, 99점짜리 사경 작품을 만들 수는 없지않을까라는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이미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경지에 올랐음에도 보다 완벽한 100점짜리 작품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는 김경호 사경장의 모습은 청중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