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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4.5-6월호] 다가오시는 사랑 그득한 미륵부처님 2_글 무상법현스님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7.22|조회수35 목록 댓글 0

 

 

 이달의 명상

다가오시는 사랑
그득한 미륵彌勒부처님 2

 

글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미륵불상

 

 

인도말로는 보디삿따, 보디삿트바. 이것이 중국에서 한역하면서 보리살타라고 했는데 보리의 bodhi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삿따 satta 이것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태어나서 삶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태어나서 삶을 유지하고 있다면 부처가 아니고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된다면 씨앗이 부처씨앗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는 것이죠.

 

보성론에서는 보배스러운 성품이다는 것을 가지고있다 해서 <보성론(寶性論)>이라 하고 불성론 쪽에서는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해서 <불성론(佛性論)>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중국에 가상 길장(嘉祥吉藏,549~623)스님의 논에 의하면 초목까지도 즉, 풀이나 나뭇가지도 성불한다는 그런 이론 초목성불론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 보살사상과도 맞다으면서도 엄청난 확대가 됩니다. 그저 존재 중에서도 사람만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데 동물을 넘어서 식물까지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죠. 정말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는 자기 자신이 따져 보아야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인간 중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이 있고,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보다 더 아래 지능을 지닌 존재들, 어쩌면 지능 자체가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나무나 풀 까지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획기적이고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 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초목성불론을 보고 우리가 티베트나, 중국, 우리나라도 일부 항의표시로 길바닥에 걸어가면서 절을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항의표시로 절하는 것은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마는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데몬스트레이션 퍼포먼스지요. 자기 혼자 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에서 절하면서 만나는 모든 존재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분들께 절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부처님이 된다는 것, 이것이 일체중생이 다 같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닌 일체불, 실유불성(一切佛, 悉有佛性)이라고까지 가는 것입니다. 가상 길장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이 믿고 따르는 경전이 <법화경> 곧 <나무묘법연화경>입니다. 이 경에서는 그동안 도저히 성불할 수 없는 존재, 이런 사람들을 일천제라고 했습니다. 이찬티카(icchantika)의 인도 말을 한자어로 일천제라고 우리나라고 우리나라 큰 스님 중에는 당신의 상좌이름을 천제라고 지은 분이 있습니다. 천제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가 들어있지만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런 사람까지도 내가 교화해서 성불시키겠다는 그런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아주 적극적인 작명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미륵부처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그 미륵부처님은 보통 부처님과는 다른 분이냐. 아니면 보통 부처님과 같은데 미래에 오는 분이냐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들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초기 불교경전인 우리말로 하면 깃발경이라고 할 수 있고 인도말로는 <다작가숫따>라는 경이 있습니다. 술래잡기 할 사람 여기 모여라 하고 어려서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고, 또 군대나 이런데서 그 장소 부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깃발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게 종교 어떤 사상에서도 자기의 특징을 드러내는 깃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깃발경입니다. 이 경전에 보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단, 승가, 스님들의 특징이 다른 종료의 지도자 가르침 대중의 색깔과 내용과 특징과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깃발보다 뛰어난 깃발이고 믿고 따라가 볼 필요가 있고 가보면 부처님처럼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같이 그분 세존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아라한이고 완전히 깨달은
분 즉 정등각이고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 명행족이고 피안으로 잘 가신 분 선서이고 세상 세간을 잘아신 분 세간해이고 사람을 잘 길들이는 가장 놓은 분 무상사 조어장부이고 신과 인간의 스승 천인사이고 깨달으신 분 이고 세상에서 존귀하신 분 세존이시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반 용어로는 여래구덕,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아홉 가지 덕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여래구덕이라고 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십호(如來十號), 여래의 열 가지 이름이라고 해서 불과 세존(세상에서 높은 분)을 나누느냐, 같이 보느냐 등의 차이만 있을 뿐 초기불교에서 했던 말들과 다른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들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따라가는 부처님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를 보살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보상의 덕성은 자비희사라고 우리가 말씀드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다만 한자말이기 때문에 원어 인도말로는 메따,까루나, 무디따, 우뻬까입니다. 우리말로는 사랑함, 슬퍼함, 기뻐함, 고루함(고르게 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의 모든 덕성이죠. 모든 존재들을 나처럼 내 몸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슬퍼함, 이것은 연민이라고 한자어로 얘기할 수 있는데요 우리의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의 아이들이 뭔가 괴로운 일을 겪고 있으면 슬프지 않습니까. 그럼 그저 슬프니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고 이 아이가 어려움에서 벗어나서 좋은 상태로 행복한 상태로 가게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연민에는 반드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함, 우리 아들이 회사에 취업을 하면 기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아들이 회사에 취업을 하면 그저 그럴 수도 있지요. 모두를 우리 아들처럼,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그 사람의 아이잖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똑같이 보는 마음이 기뻐함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아지기 때문에 골고루 하게 된다하는 의미입니다. 보통은 평온하다는 의미로 해석을 해왔었습니다. 보살의 특성가운데 미륵보살의 특성이 사랑함입니다. 이 사랑함,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보통은 사랑 슬픔 기쁨 고름 이런 명사형으로 얘기하는데 저는 덕성이고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사형으로 표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륵보살님의 특성이 사랑함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초기불교의 언어 중에 보살의 특성 사무량심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라는 뜻인데요 그 중에 맨 앞에 것인 사랑, 인도 말 메따, 한자말 자(慈)라고 볼 수 있는데 메따라는 말이 또 다른 언어로는 메떼이어라고 합니다. 인도 말이죠. 인도에서 조금 건너가서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는 메티아라고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발음이 비슷하죠. 거기서 더 왼쪽으로 서쪽으로 가게 되면 팔레스타인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나라가 나눠지는 바람에 굉장히 다투고 있죠. 거기에 가나안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이웃종교인 크리스트교인들은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미래 구세주는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마이뜨레아, 또는 메떼이어, 메따 이것이 인도 고어이고요 그것이 옆에 동네인 페르시아 등이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메티아가 되고 팔레스타인 또는 가나안 땅에서는 메시아가 되는데 이 셋의 어원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과 신약성서>를 지은 한양대 불문학과 교수였던 민희식교수가 쓴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종교에서는 메시아라고 나왔는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라고 하죠. 우리 개념과는 조금 다르지만 믿음과 소망은 사람의 일이고 사랑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사랑은 내리사랑만 있지 치사랑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랑은 사랑을 제대로 할 수없다. 창조자인 하느님만이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상선생이 쓴 에세이에 기자정신으로 범죄자를 대하는 매일신문 편집국장이야기가 있습니다. 범인이 잡히기 전에는 경찰편,잡힌 뒤에는 범인 편에서 기사를 쓴다는...그리스도인이 아닐 텐데 어찌 그런 사랑정신이 있을까라고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사랑한다는 말이니....

 

 

우리 불교에서는 그런 존재를 넘어선 우리존재가 사랑을 행한다면 그분들을 넘어선 부처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미륵 부처님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세계관, 시간과 공간으로 나눠봤고, 두 번째는 삼세불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봤고, 세 번째는 방서(방위)불로 해서 이곳에 부처님은 석가모니 타방의 동서 남북 중앙에 계시는 부처님, 네 번째는 신체 불을 나눠봤습니다. 그래서 법신불보신불 화신불 우리가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분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비로자나부처님은 태어난바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분들, 이름 있는 분들은 모두가 신불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미래부처님도 역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부처가 되실 것인데 그런 사상을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합니다.
처음엔 무성이라고 했다가 불성이라고 하고 나중에서는 초목까지고 그런 가능성이 있다. 즉 누구나 부처님이다. 이렇게 보는 경향이 있었고 우리가 보는 부처님을 그 특성이 과연 무엇이냐고 할까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초기불교에 <다작가숫다, 깃발경>에 여래구덕이나 대승불교의 여래십호를 이야기합니다. 다작가숫따에 나오는 그분의 덕성을 마음에 간절히 담고 기리는 것 새기는 것 이것을 인도말로 붓다어누삿띠라고 합니다. 우리 한자어로는 불수념(佛隨念)이 나옵니다. 부처 불, 따를 수, 생각 념자. 그런데 불수념의 수를 빼고 불념이라고 했을 때 그 불념이 앞뒤로 바뀌면 염불이 됩니다.

이 염불은 부처님의 덕성을 정말로 진실하게 가슴 깊이 간절하게 새기면서 새기는 것인데 그 양반의 이름을 명호를 부르면서 새기는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을 염불이라고도 하고 정근이라고도 하죠. 이 정근은 부지런한 근자를 썼지만 나아갈 진자를 쓴 정진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부처님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또는 열반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어떤 것들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들은 생겨나지 못하게 누르고 이미 생겨난 것은 잘라버리고 도움이 되는 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나오도록 하고 이미 생겨난 것은 더 자라도록 하는 것. 이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인도말로는 위리아라고 하는 것이죠. 미륵에 관해 좀 더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냐 하고 했을 때 중생에서 보살 단계를 건너서 부처가 된 것인데 부처라는 말은 인도말로 Buddha 영어식 발음인데 붓다죠. 우리 발음으로 부처입니다. 붓다와 부처는 전적으로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붓다라는 말의 뜻이 눈을 뜬 사람 또는 안 사람,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一 切 佛 悉 有 佛 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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