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나 칼럼 Ⅰ
불교와 서양사상 Ⅰ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 ~ 1975)는 20세기의 가장 뜻있는 사건으로 불교와 서양의 만남을 꼽았다. 불교는 기독교와 더불어 세계 2대 종교로서 각각 동서양을 대표하는 크나큰 정신적 흐름이요 그 문명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 지구상에 있는 각 종교의 신도수를 비교하면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에 이어 불교는 네 번째이지만 이슬람은 유태교, 기독교와 함께 아브라함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종교로서 크게 보면 서양 종교로 뭉뚱그릴 수 있다. 그리고 힌두교는 불교와 그루터기를 같이 하지만 주로 인도사람들만 믿으며 인도문명과 너무 꼭 맞물려 있어 보편적인 세계종교라고 일컫기에는 모자람이 크다.
그런데 동양문명이라고 하면 크게 보아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대표적인데 중국문명에서 생겨난 유교와 도교같은 종교는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나 하는 문제가 있다. 어쨌든 이들 중국 종교는 아무래도 그 종교성에 있어서나 현재의 교세에 있어서 불교만큼 동양의 종교를 대표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어 뒤로 밀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렇듯 기독교와 불교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종교이지만 지리상의 발견과 산업혁명을 먼저 겪은 서구의 팽창으로 서세동점의 거센 물결에 밀려 한 때 거의 그 교세가 꺾이고 묻힐 뻔했던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다시피 인류문명은 전지구적 서구문명의 확산과 산업화로 인한 환경파괴, 인구폭발, 자원고갈, 기후변화 등의 시대를 맞아 공멸의 막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어 불교는 이들 서양종교나 사상을 보완하거나 대신할 수 있는 뒷받침이거나 대안이 되어 가고 있다.
이에 우리는 불교와 서양사상의 만남을 듵어 봄으로써 그 동안 서양이 불교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차리고 어떤 점을 눈여겨 왔으며 어떻게 그들의 생각 속에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상 형성에 이바지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서구에 알려진 불교
불교와 서양의 접촉은 생각보다 오래다. 기원전 4세기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Magnus, BC 356 ~ BC 323)은 그리스를 차지한 후 동쪽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내쳐 인도의 서북부에 이르렀는데 이때는 이미 불교가 퍼져 나가고 있었으므로 아마 처음으로 불교의 동서양 접촉이 거기에서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알렉산더를 따라와 눌러앉은 그리스의 장군들이 세운 여러 나라가 이 간다라 언저리에서 생겨났다 없어졌다 했는데 그 가운데 한 왕국을 다스렸던 기원전 2세기경의 미란다(Menandros) 왕과 인도의 나가세나(Nagasena, 龍軍, BC 150년경) 스님 사이에 있었던 대담이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Milindapañha)이라는 불경 속에 전해오고 있다. 다음은 불교의 ‘무아설’에 관한 두 사람의 대담이다.
나가세나를 만난 메난드로스 왕이 그의 이름을 물으니 나가세나가 이르되,
- 왕이시여, 나는 나가세나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이름에 지나지 않고 거
기에 인격적 개체는 없나이다.
- 나가세나로 불리는 존재는 그럼 도대체 누구요? 머리카락이 나가세나인가요?
- 왕이여, 그렇지 않나이다.
- 몸에 있는 털들이 나가세나인가요?
- 그렇지 않나이다.
왕은 이빨, 살갗 등 몸을 이루는 온갖 부위 하나 하나를 들어가며 따져 묻지만 나가세나는 모두 부정한다. 왕은 마침내 나가세나가 거짓말을 했다고 나무라니 나가세나가 되묻는다.
- 왕께서는 여기에 오실 때 무엇을 타고 오셨나이까?
- 수레를 타고 왔소이다.
- 수레를 타고 오셨다면 무엇이 수레인가요, 수레
의 채가 수레이나이까?
- 스님, 그렇지 않소이다.
- 수레의 굴대가 수레이나이까?
- 아니오.
이런 식으로 멍에인가, 바퀴인가, 채찍인가 하고 따져 묻지만 왕은 잇달아 아니라고 했다.
왕은 채와 굴대를 비롯한 여러 부속물이 어울려 수레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가세나는 메난드로스 왕에게서 몸을 이루는 여러 요소에 의해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생기며, 인격적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유도해 낸다. 왕은 나가세나에게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한편 기원전 3세기경, 인도대륙을 거의 다 정복한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 대왕(Ashoka, BC 304 ~ BC 232)은 정복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칼링가 전투의 비참함을 보고 나서 크게 발심하여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다. 그는 사방으로 전법사를 떠나보내어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동쪽으로는 미얀마,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스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이렇게 서쪽으로 간 불교의 전파는 그곳 정신문화의 심층에 얼마간 영향은 끼졌겠지만 여러 까닭으로 다른 방면들과는 달리 별로 성공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고 표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서양인들 가운데 먼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제대로 불교를 만나고 찾은 것은 19세기초가 되어서였다. 그러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영국과 프랑스 등이 다투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며 그들이 빼앗은 땅과 주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인도학을 비롯한 동양학의 연구를 뒷받침하였는데 이에 덩달아 근대불교학도 싹이 텄다.
1844년, 프랑스의 뷔르누프(Eugène Burnouf 1801~ 1852)는 <인도불교사 입문>을 지었으며 불경을 비롯한 동양고전을 여러 편 번역하여 서양의 첫 불교학자가 되었다. 그 후 서양의 여러 철학자, 사상가들은 불교를 접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영광된 일은 불교를 만난 것이라 공언할 정도가 되었으며 미국의 초월주의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 ~ 1882)과 쏘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도 불교 사상에 젖어 들었다. 독일인인 막스 뮐러(Friedrich MaxMüller 1823 ~ 1900)는 2차대전 때 영국으로 귀화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방성서를 편집,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우파니샤드를 비롯하여 사서삼경, 힌두교 경전 등 총 50권에 이른다. 에드윈 아놀드(Sir Edwin Arnold 1832 ~ 1904) 경은 1879년, 부처님의생애를 담은 서사시집인 <아시아의 빛>을 펴냈는데 서양에서는 이 책이 이때까지 스테디 셀러로 팔리고 있다.
한편 올코트 (Henry Steel Olcott 1832 ~ 1907)와블라바츠키 (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 ~1891)가 세운 신지학회 (神智學會 Theosophical Society)는 불교와 인도 종교뿐만 아니라 동양종교 전반을 연구하면서 특히 동양의 신비주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큰 영향을 끼쳤으며 리즈 데이비드 부부는 1881년에 팔리성전협회를 설립했다.
신지학회는 1875년,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의 신비 사상가, 철학자, 직공, 상인인 블라바츠키와 미국의 군인, 저널리스트, 변호사인 헨리 스틸올코트에 의해 뉴욕에 자리잡은 단체다. 미군 대령이었던 올코트는 스리랑카에서 1873년에 열린 기독교와 불교간의 논쟁인 ‘파아나두라 대논쟁’(Panadura Wadaya / Panadura Debate)에서 불교측이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자극 받아 신지학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둘은 사양인 최초의 불교신자가 되었다.
신지학회는 뉴에이지 운동을 시작한 기관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보수파 기독교에서는 백안시하기도 한다.
신지학회는 막대한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후 분파로 수많은 뉴에이지 종교가 생겨나는 밑바탕이 되었다. 신지학회의 다음과 같은 사고와 추구는 많은 추종자를 불러모았다.
- 인류의 우애는 피부 색깔,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다.
- 비교 종교의 성립, 철학의 심도 있는 연구를 촉진시키며 인간의 복지 실현을 위해 기여한다.
- 인간의 수많은 잠재력을 발굴하여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끔 노력하고 구명한다.
그러나 불교가 서양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1893년 시카고의 세계종교회의에서였다. 여기에서 스리랑카의 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 ~1933)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연설하였는데 여러 종교인들과 일반의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청년불자회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였으며 인도인들의 무관심 속에 폐허가 된 부처님의 유적들을 보존하는 데에도 정성을 바쳤다. 그는 신지학회의 블라바츠키가 팔리어 불경 연구를 강조하는 데에 자극받았으며 뒷날 인도의 암베드카르가 일으킨 불교부흥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즈음하여 중국계과 일본계의 스님 및 불교인들이 유럽과 미국에 속속 발을 들여놓기 비롯하였다. 이리하여 1차대전 이후에는 각국의 신심 있는 불자들이 불교단체와 사찰들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는 1915년, 아
그반 도체(Agvan Lobsan Dorzhiev 1853 ~ 1938) 스님이 유럽의 첫 불교 사찰을 세웠다. 1924년 파울달케(Paul Dahlke 1865 ~ 1928)는 동베를린에 불교인의 집을 세웠고 험플리는 1926년, 런던에 대각회 분원을 세웠다/
그 후 불교는 조금씩 서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비트와 히피 시대에 이르자 특히 선불교에 큰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였다. 서양에 선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이는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츠(鈴木 大拙 貞 太郎 Suzuki Daisetsu Teitarō 1870 ~ 1966)인데 그는 많은 불교 서적을 영어로 펴내어 서양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일본의 스즈키 순류(鈴木俊隆Suzuki Shunryū 1905 ~ 1971) 스님도 그가 지은 <선심초심> 등 저서와 가르침으로 특히 미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케루악 (Jean-Louis Lebris de Kérouac 1922 ~ 1969), 긴스버그(Irwin Allen
Ginsberg 1926 ~ 1997) 등은 비트 소사이어티를 이루어 선불교 스님들과 교류하며 20세기를 이끌어 갈 대안사상으로서 불교에 심취하였다.
이러한 서양의 선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바람도미국 불교를 살펴보자면 몇 갈래 유형이 있다. 그 첫째는 수입불교다. 미국인들 중에 어떤 계기로 불교를 알게 되고 이에 이끌린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해외로부터 받아들이거나 직접 찾아가서 배워 오는 불교다. 따라서 사회의 중상류층 출신들에 의한 엘리트 불교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불자들은 보통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명상 수행서를 읽고 벽을 향해 몇 십분 동안 명상 수행을 하므로 침실조명등 불교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밖에 책방 불교도, 구매자 불교도, 혹은 여기저기 찾아 다니므로 메뚜기 불교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음은 아시아 국가의 불교 단체나 스님들이 적극적으로 수출한 수출불교다. 기독교의 선교활동과 비유되어 복음주의적 불교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경우 창가학회 계통이 가장 뚜렷하며 적극적인 포교의 양상을 드러내지만 그 밖에도 몇몇 종파와 스님들의 진출이 있었다.
중국과 태국, 한국, 베트남 등에서도 비교적 드러나지 않는 불교 교단들의 포교 사례가 뒤따르고 있다. 타이완의 성운(星雲 Hsing Yun 1927 ~ 2023)스님이 캘리포니아에 세운 서래사, 그리고 태국의 아잔차(Ajahn Chah 1918 ~ 1992) 스님, 베트남의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1926 ~ 2022) 스님, 한국의 삼우(三友 1941 ~ 2022) 스님과 숭산(崇山 行願
Seungsahn Haengwon 1927 ~ 2004) 스님, 캄보디아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1913 ~ 2007)스님 등이 유럽과 미주 곳곳에 세운 여러 절과 수행처들이 이러한 수출불교의 대표적인 거점들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의 경우 본국이 독립을 잃고 교단마저 인도로 망명을 가 있는 불행한 경우이지만 전화위복이랄까, 달라이 라마(14th Dalai Lama, Tenzin Gyatso 1935 ~) 등 고승들의 지도력과 신도들의 헌신으로 일본불교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서구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불교 수입의 큰 원천이자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정체성 유지의 본거지가 되고 있다.
마지막이 수하물 불교, 곧 짐보따리 불교인데 본래 불교도였던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이민 보따리에 싸들고 온 불교다. 위의 수출불교와 일정 부분 겹치는 불교로서 이민불교라고도 불린다. 본국에서 종교적인 탄압을 받거나 해서 온 것은 아니고 대부분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문화의 한 부품으로서 짐보따리에 넣어져 왔기 때문에 현지에서 비슷한 배경의 이민자들과 서로 돕고 어울려 살아나가기에 절실하므로 계속 지니며 후세에게도 어느 정도 전수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익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판단되거나 정신적 정체성 유지보다는 주류사회 적응을 우선하고 선호하여 이에 실질적인 도움이 별로 없다고 여겨지면 쉽사리 버리고 타종교, 특히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는데 한국인의 경우가 아주 현저하고 유별난 그런 실례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