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불교
내가 죽으면 눈물이 되어라
글 김소연(나성거주, 약사)
우린 누구나 죽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는 어떠한 것인지, 죽은 후 나의 영혼은 또 어디로 날아가는지, 내가 알았던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은 나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지 등등, 죽음에대한 의문은 수없이 많다. 더욱이나 죽는구나 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 짧은 순간에 만가지 생각이 오고 감을 느껴 보았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슴을 죄어오는 괴로운 순간들을 지나고 나면 아! 이젠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새삼 생의 희열에 쌓여 보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종교를 철저히 믿는 사람 중에는 천국을 경험해 보았다는데 그것이 정말로 영혼이 천당까지 갔다온 것인지 아니면 사경을 헤매이면서 환각상태에 빠져 죽음의 공포를 없애기 위한 우리몸의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엔돌핀이 무섭게 분비되어 상상의 세계를 나열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충분한 엔돌핀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에게 이러한 죽음의 공포와 사후의 행복을 추구하는 희망이 있기에 종교는 어느 사회나 있어왔고 또 영원히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이야기한다. 돌고 또 도는 것이 생명이란다. 올챙이가 호랑이가 되고 호랑이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또 벌레도 되는 끝없는 생명의 탈바꿈, 그것이 윤회이다. 이러한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불교의 핵심이기도 하나 생명의 시비는 아득하기만 한다.
얼마전에 코피를 무섭게 쏟아내고 순간적으로 이것이 바로 죽는 순간이구나 하는 공포에 떨고 난 후, 그동안 심각하게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넌 죽으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으냐 하는 자문을 해 보았다. (물론 나의 의지가 작용할 수 있다면). 어차피 석가모니처럼 깨달은 이가 되지 못했으니 다시 윤회의 틀바퀴를 돌고 돌 터이니 과연 무엇이 되어 태어나면 좋을까? 그렇다. 나는 죽으면 물이 되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
물은 생명이 없으니 다시 태어난다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물 그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일 수 있다. 그러길래 물 역시 얼음, 비, 구름, 강물 또는 눈물이 되어 이 모습, 저 모습으로 윤회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물 중에서도 눈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슴에 철철히 넘치는 눈물을 흘려보지 않았던 사람은 진정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한다. 나는 나의 유일한 분신인 딸을 잃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눈물이 어디에서 솟아 났는지 모를 일이다. 며칠 몇밤을 울고 또 울고, 불면증에 시달렸던 숱한 나날들. 그때 나에게 눈물이 없었다면 난 아마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 아픔을 눈물이 있었기에 슬픔을 바깥으로 토해낼 수 있었고, 아직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눈물은 나를 정화시키고, 오만했던 나를 꺾어버리는 채찍이 되었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고 어떤 환경이 주어져도 깊이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그리하여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커다란 교훈을 얻게 되었다. 고통의 원인이 집착(아이에 대한 욕심)에서 생긴다는 석가모니의 말씀이 나를 흔들었고, 불교에 빠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지금 이렇게 불교 잡지에 글을 쓰는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비극, 즉 눈물은 인간을 순수하게 하는 좋은 약효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슬픔을 이기는 방법으로 눈물을 많이 흘릴 일이다. 남자들은 여자와는 달리 여간 슬퍼도 엉엉 소리내지 않고,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며칠이고 계속하지도 않는다. 여자보다 강한 탓인지 아니면 울어서는 사내답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싶어도 꾹꾹 참는지 모른다. 한방에서 말하기를 슬픔이 깊으면 간이 상한다 한다. 그 슬픔을 표출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간의 상처는 더욱 클 것이고 간이 상하면 여러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런 이유인지 모르나 강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다. 남자들도 여자처럼 눈물을 쏟아낼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지 모른다. 눈물은 고통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필요불가결이다. 남자들도 여자처럼 눈물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마음도 여자처럼 정화될 것이고 좀더 욕심없는 순수한 인간이 되어 이 세상은 한층 아름답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디 그 뿐이랴! 기쁨의 극치도 눈물이요, 불안이나 공포후 안도의 순간을 맞이할 때도 저절로 눈물이 쏟아진다. 신나게 깔깔거리고 웃고 난 후에도 틀림없이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음을 누구나 경험한다.
극한에 이른 웃음은 눈물로 되어지고, 극한에 이른 눈물은 말라 결국 허탈 웃음으로 바뀌고, 아무리 울어도 이미 지나간 일을 되살릴 수 없다는 엄연한 시간의 흐름에 숙연해 지면서 울고 있는 스스로를 자조의 웃음으로 토닥거리면서 다시 생활 속으로 찾아 들어오는 것이 우리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웃음이 즉 울음이요, 울음이 즉 웃음인 것이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그 본질이 같은 것이다.
물은 맛이 없어 좋다. 시인 유안진 씨는 죽어서 짠맛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는데 난 아무 맛도 없는 밋밋한 맛이 되고 싶다.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는 사람, 별로 인정 받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향기도 멋도 맛도 없는 그렇게 덤덤히 살다 갈 사람, 물처럼 그냥 시간에 따라 흐르다 가고 말 그러한 사람, 유명하지 않아도 부자가 아니더라도 미인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나의 길을 소리없이 빛깔없이 살고 갈, 그렇게 물처럼 살다 갈 것이고 또 죽고나면 그러한 물이 되고 싶다.
내가 죽으면 물이 되어라. 그 중에서도 눈물이 되어라. 그리하여 슬픔이 강물이 되어 가슴을 적시고 아픔을 쏟아내는 두 뺨 위에 흐르는 눈물이 되어라.
신나게 실컷 웃고 난 후에 눈가에 서리는 웃음의 눈물로 되어라. 또한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와 가슴에 안겼을 때의 그 벅찬 감동의 순간에 흐르는 기쁨의 눈물이 되어라. 그리하여 그때 그때 인연에 따라 흐르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 되어 눈물의 윤회를 돌고 돌아라.
미주현대불교 1995년 11월호
제 66 호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