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이름, 노가비!
글 공일 스님
서울대학교 졸업,
인도철학자,
현재 서울 봉은사 포교국장
알지도 못하는 그곳
그 멀리서
웃음짓던 그 미소가 꽃으로 피어나기에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을 가져오는 것이라니 봄의 꽃들은 눈물겨운 사연을 지닌다.
멀리서 빈다
나 태 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꽃처럼 아침이 오고 풀잎처럼 저녁이 된다?
범부들에겐
세상을 이해한다는 게 도무지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처님은 가능하다고 보는 게 불교다.
그래서 부처님을 지칭하는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가 세간해(世間解) 또는 지세간(知世間)으로
Knowerofthe world의 의미가 있다.
빨리어로는 lokaㅡvid,
어떤 불전에서는 이를 음역하여
노가비(路迦憊)라고도 적고 있다.
석가모니께서 여래십호, 즉 열 가지의 이름으로
불려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저 기호로 사용되는 게 여래십호이고
이에 대하여 궁금증도 없고
나아가 온갖 상징이 기호로 전락되어 버린 현실이니
몇 자 적는 것이
궁시렁대는 소음처럼 소비될까 저어스럽다.
바람보다도 빨리 누워버린다는 풀잎,
이는 민초를 지칭하는 기호이다.
민초인 이 땅의 백성들은
고단한 발걸음을 끌며 지쳐간다.
밝은 세상을 어둠 속으로 잠기게 하여
고요 속으로 이끌어 간다지만
사실은 밝음이 사라진 어둠의 영역에서
망각의 시간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꽃과 풀잎, 아침과 저녁, 너와 나
이러한 이원성을 바탕에 두고
온갖 무늬가 만들어져 역사가 쓰여지고
문화가 꽃피고 진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절집에서 다반사(茶飯事)처럼 열리는
천도재의 마지막 결론부의 게송은 간명하게 지적한다.
산승의 말후일구(末後一句)는, 사대각리여몽중(四大各離如夢中).
지수화풍의 사대가 모여 몸을 이룬 것이지만
각각 꿈속에서
그러한 것처럼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노래한다.
욕식불조회광처(欲識佛祖回光處)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회굉처를알고자 한다면
고개 들어 먼산을 보라고!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
서산으로 지는 저녁 해가 있어야
달은 빛을 머금고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그대와 나,
멀리서 빌어야 할 것이 있다면
꽃과 풀잎처럼 되기를 바래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침과 저녁을 가져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