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명상
다가오시는 사랑
그득한 미륵彌勒부처님 3
글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붓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깨달음’, ‘앎’, ‘눈뜸’, ‘번뇌 없음’, ‘벗어남’, ‘깨끗함’, ‘윤회 없음’ 이라는 뜻이 됩니다. 제가 있는 열린선원에는 ‘윤회금지(nosamsara)’라는 표지판을 달아놓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저와 함께 수행을 하면 부천님처럼 윤회가 없어지는 지속이 가능한 행복 삶을 살게 된다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죠. 우리 미륵부처님의 이름을 살펴보면 메따, 메떼이어, 마이뜨레아입니다, 중국에서는 미륵(彌勒)이라 써놓고 우리 한국 발음이 미륵입니다.
그분이 사는 곳은 또시따데와라고 인도말로 돼 있는데 우리 한자어 한국발음은 도솔천입니다. 욕계의 제 4천이죠. 그런데 왜 도솔천에 사느냐?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솔천에 계실 때 호명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 호명보살로서 지구 땅 사바세계에 내려올 꿈을 꾼 것이죠. 마찬가지로 미륵보살님은 도솔천에서 딱 이번생만 보살로서 수행하면 다음생에는 부처가 되는 그런 보살이기 때문에 거기에 살고 계십니다. 지금 도솔천에서 십바라밀을 닦고 있습니다. 5십6억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온다고 합니다.
서 있는 경우는 교화하는 모습이고 앉아 있는 모습은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수행,교화하는 모습 손의 모양이 수인 또는 결인(結印), 무드라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문두루라고 했습니다. 당나라 100만 대군이 쳐들어 올 때 명랑스님이 문두루 비법을 시행했답니다. 오른 손에 왼손들을 올려놓고 왼손가락끼리 마주대고 있는 수행인, 선정인입니다.
왼손 등으로는 왼쪽 무릎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바닥을 향해 늘어뜨린 것을 항마촉지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그런 순간의 모습입니다. 내안의 마귀 곧 번뇌,죽음을 누르고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당시 땅의 신 곧 대지 신이 그걸 봤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동안에 그냥 빛이 환하게 발광을 했다는 것이죠. 그런 걸 우리가 화광삼매도 이야기 하지만 후광으로서 부처님 뒤에 조성을 하지 않습니까. 미륵보살은 참선하고 있는 모습으로도 나오고 재미있는 것은 반가사유상으로도 나타난다는 것이죠. 로댕의 생각하는 상과 형태는 다르죠. 미륵부처님의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잘 발전했고 반가사유상을 일본으로 억지로 보셔가서 그 나라의 국보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미륵부처님처럼 하는 분들이 있지 않느냐? 중국인들이 생각한 분이 포대화상입니다. 배가 나오고 뭐를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모습을 설명할 때 뭘 넣어도 자루가 얼마나 큰지 안 들어가는 게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에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다. 뭐 그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덕성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교화하고 있는 입장의 서서 손이 위로 올라갑니다. 한 손은 더 위로, 한 손은 아래로 향하는데 엄지손가락이 어느 손가락을 향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검지를 향하느냐 중간 장지를 향하느냐, 새끼손가락을 향하느냐에 따라 상중하의 상중하 곧 상에의 상중하, 중의 상중하, 하의 상중하로 아홉 단계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서있는 분들은 성불했다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비가, 어떤 경우는 지혜가 부처님의 특징이거든요. 사랑과 슬기가 부처님의 특징인거죠. 사랑해야 슬기롭다. 슬기로운 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전생이 나의 부모 형제 아닌 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배기느냐 하는 것이죠. 식물까지도 우리가 어제 먹었던 식물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도 결국은 나와 같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이 비권(悲拳)입니다. 무드라, 수인을 예기했을 때 자비를 뜻하는 손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오른손으로 왼손의 엄지를 감싸고 있는 것을 비권이라고 하고 왼손으로 오른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것을 지권(智拳)이라고 합니다. 지권은 주로 비로자나부처님을 상징했고 비권은 주로 미륵불을 상징했었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의 생각이 왔다 갔다 한 것인지, 조성하는 불모의 생각이 왔다 갔다 한 것인지, 둘 다를 포섭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부처님들 가운데 미륵부처님과 비로자나부처님이 어떤 경우는 오른쪽 손이 올라가 있고 어떤 경우는 왼쪽 손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자료에 나옵니다. 본래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이고 미륵불은 비권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조금 다릅니다만 중국에서는 음향오행사상에 의해 왼손이 중심이 되어서 왼손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 예를 들어 군대를 보면 지휘부는 맨 뒤에 있죠. 헤드쿼터라고 해서, 보병들이나 낮은 수준의 부하들이 맨 앞에 가서 전쟁을 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적은 것이 지(智)입니다.
움직임이 많은 것이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뜨거운 열정이지 않습니까? 태양과 같은 것이라서 따스하고 활발발하지요. 그래서 권인이 이렇게 달랐었다는 것입니다.
미륵부처님의 구제는 용화수라는 나무 아래서 세번 설법에 96억 중생, 94억 중생, 92억 중생을 구제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미륵부처님도 세단계로 나눠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상생, 하생이 있습니다.
상생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미륵부처님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 그리고 사랑 더하기 나머지 덕을 합친 십바라밀의 실천을 통해서 중생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부처가 된 데까지 수행해서 성불하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륵상생경입니다. 미륵하생경은 그 단계로 내려와서 중생들과 함께 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생경에서는 어떻게 수행을 하고 부처가 되고 중생을 구제한다고 설명할까요? 모든 중생들이 이미 성불해있고 부처님만이 마지막으로 가서 나머지 한 사람을 채움으로 인해 교화가 완성된다고 하는 아주 재미난 표현이 있습니다. 즉, 누구나 이미 부처님이라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의 몸이 아주 크게 된 때가 법이 많은 사상과 함께 우리 부처님의 모양도 크게 하게 됩니다.
충남 관촉사에 미륵부처님 같은 경우 너무나 커가지고 바위인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부처님 조성을 고민하고 있는 그러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스님의 꿈에 어린아이들이 나타납니다.
모래놀이를 하면서 관촉사 부처님 모시는 놀이를 하자고 하더랍니다. 세 단계로 나눠가지고 일 단계까지 모래를 비스듬하게 채우고 비스듬하니까 굴려서 올라가고, 그 다음에 이단계로 채우고 또 삼 단계 올라가고 하는 것을 보고 아, 저렇게 했구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정확하게 기중기 같은 것을 통해 들어 올려야 하는 거죠. 백제가 그 당시 그런 공학이 발전해 있다는 의미인데 스토리텔링하면서 재미난 전설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미래의 부처님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영화 중에 또는 소설 중에 미래영화나 재난영화를 보면 주제가 거의 똑같습니다. ‘지금, 여기. 그리고 사랑’입니다.
만일 어떤 문제가 있다면 여기를 벗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 여기. 참선에서는 현금 즉시(現今卽時,now and here)라고도 합니다. 지금여기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방법이고 바른 방법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는 게 미륵사상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미래 부처님으로 나타나서 미래 사람들을 구제할 것인가? 현재에도 이게 가능한 것이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 또는 구제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인도와 중국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실천이 가능했고, 중국에서는 포대화상(布袋和尙)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불교만이 희생을 통해 전파를 한 역사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포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유일하게 신라에 불교가 들어갈 때 희생자
가 나옵니다. 이차돈 성자입니다.
이차돈의 희생이 소중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신라에 이미 불교를 막을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사상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따라가는 낭도들을 용화낭도라고 하고, 화랑도라 했는데 그들이 바로 현실속의 구제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륵부처님을 섬길 때 우리의 덕성으로 기리고 실천하고 새길 것들은 지금 여기 사랑이라는 말씀이고 한 줄로 표현한다면 ‘사랑하는 이는 슬기롭고 슬기로운 이는 사랑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이는 관계와 시간의 흐름을 아는 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사랑과 윤리가 가득한 것이 황금시대라고 합니다. 세기말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뭔가 혼돈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이끄는 세기말 지도 사상들이 생겨납니다. 그 때 그 때 미륵사상이 생겨난 이유, 배경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지도이념은 강력하게 누구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대중들 존재들 구성원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며, 어떤 경우는 싸움하는 상대방조차도 아끼고 이해하고 보듬는 것입니다. 미륵사상을 현실적으로 구세대비의 사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륵하생사상이 현실 미륵으로 된 배경이죠. 화순 운주사의 천불 천탑(千佛千塔)도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안성이나 양주에 나오는 임꺽정이야기도 바로 그런 사상들이 들어있습니다. 미륵불은 사랑얘기고, 약사불은 치유를 얘기하고, 아미타불은 ‘태어남이 없는’ 아미타불, 아미타유스, ‘생명이 없는’, ‘중생이 아닌’, ‘생명이 없어야 영원한 삶을 산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을 딴 생각 없이 열 번만 하면 그 어느 누구도 극락세계 왕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된 미륵부처님 가운데 영강(寧康)7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금동미륵존불도 있습니다. 미륵사지의 무왕과 그 부인의 신하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난 이야기들도 우리 중생들, 민생들 역사 속에 얼마나 가까운 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화랑도 향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죽지랑과 미륵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정보의 시대에도 윤리가 대동되어야 바르게 성장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문제인 정부 시절 제가 활동했던 4차 산업혁명과 윤리민관 협의체에서 4개월 간 연구하고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했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슬기롭고, 슬기로운 사람 사랑한다. 미륵이라는 말 그 자체가 사랑이고 배려였다는 뜻, 관용이고 용서였다는 뜻이었다라고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을 실천하는 슬기로운 부처님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