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나 칼럼 Ⅱ
아픔 없는 죽음
글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
<주삿바늘·기도관으로 연장하는 삶은 ‘존엄’한가>(신동아, 2023년 8월호)라는 글에서 내과 전문의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여줘··· 죽여줘···. 의사가 되고 나서 인턴 신분으로 처음 콧줄(L-tube)을 삽입하던 내가 환자에게 들었던 말이다. 환자는 뇌졸중으로 보행과 삼킴이 불가능한데, 말만 조금 할 수 있는 상태다. 게다가 침대에만 누워있다 보니 엉치 쪽에 욕창이 생겼다. 욕창 소독을 할 때면 가득 찬 고름 사이로 엉치뼈가 보일 정도였다. 기저귀로 배변을 하면서 욕창에 변이 묻어 아무리 항생제를 써도 낫질 않았다. 결국 항생제 내성균이 발생했다. 소독할 때마다 괴성을 지르며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는 외침이, 이제 ‘의사놈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바뀌었다.”
닥터 박은식은 “조력 존엄사 도입 주장은 결코 ‘삶에 대한 비하(卑下)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예찬도 아니다’. 한번 뿐인 소중한 삶에서 고통을 줄이려는 것이기에 도리어 진정한 생명 존중에 가깝다.”고 말했다. 나도 닥터 박의 의견에 동의한다. 죽을 때만이라도 아픔 없이 죽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게 나의 의견이다. 고통 받으면서 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아픔 없이 죽게끔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도리(道里)가 아니겠는가.
닥터 박은, 국회에서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된 상태라고 했다. 발의된 법안에, ① 말기 환자에 해당할 것, ②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하고 있을 것, ③ 신청인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조력 존엄사를 희망하고 있을 것 등, 세 가지 요건을 갖춘 경우로 규정했다고 했다. 조력존엄사를 도운 담당 의사에 대해서는 형법상 자살방조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했다고 했다.
나는 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래도 누가 알아? 내가 더 늙어지고, 내가 내 몸을 더 이상 가눌 수가 없을 때에는, 나도 안락사 죽음을 하고 싶어 할지? “늙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 살아도 스스로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안락사 죽음을 가질 수 있도록,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조력자살을 반대하는 주교
닥터 박은 조력자살을 반대하는 글도 여기에 실렸다.
“그런데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톨릭생명윤리자문위원장 구요비 주교는 ‘존엄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며 ‘우리의 삶은 젊음과 건강을 누리기도 하고 질병과 노화로 고통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순간도 삶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임종 과정에 있는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은 조력자살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살아낼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살아낼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함께하는 것”이라는 주교의 말에 나도 찬성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도 다양하다. 암으로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편안하게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우리도 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 가능성은 전연 없고, 통증도 없애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노년환자인 경우, 그리고 본인이 너무 아파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야훼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인간더러 아픔의 고통을 받으면서 살라고 만드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을 만들어놓고, 인간더러 ‘잘 살라’고 축복까지 해주셨다. 예수는 병들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환자들을 손수 치료해주셨다. 아픔을 없애주셨다. 인간은 어느 정도 살다가 늙어지면 혹은 병들면 ‘죽게끔’ 만들어졌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죽을 때 편안하게, 고통 없이 죽어주게끔 도와주는 게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편안하게 죽도록 도와주는 게 인간의 도리(道理)가 아니겠는가.
내 아내는 가톨릭이다. 내 집에 가톨릭 십자가가 몇 개 있다. 2천 년 전에 로마제국 병정들은 잔인했었다. 사람을 죽일 때 목을 잘라 쉽게 죽이지 않았다. 심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예수를 십자가에 일부러 못으로 박아놓았다. 이때의 아픔을, 당신은 한번 상상 속에서라도 견디어 보시라. 이처럼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가게끔 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죄악인 것이다. 예수도 못에 박히어 있었을 때, 얼마나 아팠으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27;45)하고 신음(呻吟) 하며 울부짖었다.
이때 죽어가는 예수를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경우 “오래오래 사세요.” 하고 빌어주어야 하나? 가톨릭 생명윤리자문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말한 대로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살아낼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함께해야 하겠는가?” 물론 예수와 ‘함께’는 해주어야 한다.
물론 로마 병정이 지키고 있으니까,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을 수는 없다.
도저히 살려낼 방도는 없다.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어야만 할 운명이었다. 문제는, 하루·이틀 더 오래 살라고 기도해주어서, 저런 심한 고통을 하루·이틀 더 받도록 해주어야 하나? 혹은 하루라도 편안하게 천국에 가시라고 빨리 죽어달라고 기도해주어야 하나? 만약 당신이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에 박이어 기둥에 세워져 있다면? 당신은 하루 이틀 더 살고 싶어 하겠는가? 혹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서 빨리죽기’를 바라겠는가? 만약 내가 목에 박혀 있는 예수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서 빨리 죽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자, 만약 당신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예수를 보고 있다면, “예수여, 오래 오래 살아주소서!” 하고 빌겠소? 혹은 빨리 죽도록 기도해주시겠소?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이게 또한 불교의 자비이기도 한다.
부처 이야기를 해보자.
다음은 <증일아함경>(제40권)에 써진 이야기이다.
부처는 병을 앓아 누워있는 비구(스님)을 찾아갔다. 비구(환자)는 “병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때 붓다는 손수 비를 들고 더러운 티끌을 치웠다. 다시 자리를 깔았다. 환자의 옷을 빨았다. 그를 물로 목욕시켰다. 돌 평상 위에 그를 앉혔다. 그리고 손수 밥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난 후, 부처는 비구들을 전부 모이게 했다. 서로서로 보살피도록 했다. 만일 앓는 비구로서 제자가 없다면 대중에게 차례를 정해 병자를 간호하도록 했다.
“병자를 간호하는 것 보다 그 복이 더 훌륭한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누가 내게 공양하거나
과거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내게 베푸는 그 복과 덕은
병자 돌보는 것과 다름없으리.
부처님은 병자를 돌보는 일이 가장 훌륭한 일이며 또한 큰 복을 받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의사들은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아픔을 덜해주고 있기에, 다음 후생(後生)에서는, 자연 큰 복을 많이 갖고 태어날 것이다.
자살을 허용한 붓다
박칼리는 세존에게 사뢰었다. (<잡아경> 제47권)
“세존이시여, 내 몸의 고통은 도무지 견딜 수 없나이다. 칼로 자살하고 싶나이다. 괴로워서 살고 싶지 않나이다.”
세존은 박칼리에게 물었다.
“물질은 항상(恒常)된 것인가? 항상되지 않는 것인가?”
박칼리 : “항상되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요“
붓 다 : “항상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괴롭지 않는 것인가?”
박칼리 :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요”
붓 다 : “만일 그 몸에 대해서 탐하고 욕심낼 만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마침(죽음)이요 뒷세상도 또한 좋은 것이다”
붓다는 예언하셨다.
“너는 좋게 목숨을 마치고 뒷세상도 좋은 것이다”
붓다의 허락을 받고서, 그날 밤에 박칼리는 해탈을 생각하고, 칼을 잡아 자살하였다.
그 당시는 진통제도 없었다. 박칼리는 위암(?) 말기쯤 되었을까? 부처는 ‘심한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 더 살라고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으면 죽을 병, 그 심한 고통을 견디면서 더 살게 하지 않았다. 자살을 하도록 허용하셨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안락사(安樂死)하도록 허용하셨던 것이다.
안락사의 필요성
나는 안락사법이 제정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한국 국민의 70%가 안락사 법이 제정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심한 통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 진통제로도 통증을 제거할 수 없는 경우, 현대의학으로도 생명을 살릴 수 없을 경우, 이런 경우에는, 물론 개인적인 선택이겠지만, 안락사가 허용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락사는, 첫째는 죽어가는 환자들의 심한 통증을 없애준다. 그리고 오랫동안 질질 끓다가 의식을 잃은 채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의식을 가지고, 존엄을 가지고 죽을 수가 있다. 둘째는, 가족들에게 간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경제적인 부담도 덜어준다. 셋째는 안락사함으로서 의료비를 절감(節減)한다. 이 돈으로 다른 환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 이삼일 앓다가 죽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은 사람이 죽는 것인데, 사람이 죽어가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자기가 아닌, 무언가에 의해, 죽어지는 대로 죽어진다. 자기의 죽음에 자기의 선택권이 전연 없다. 자기 죽음인데, 자기 죽음을 왜 자기가 자유로이 죽을 수가 없단 말인가. 그래서 안락사는 우리의 죽음을 우리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
좋은 죽음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