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세계 Ⅰ
현대 세계불교㉗
스리랑카불교와 석가모니 부처님 치아
왕통의 정당성과 연관된 치아 사리
글 이치란 박사 (원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 강원불교대학장
(사) 종정협 부설 / 국제불교전법대학 총장
WFB 태국본부 전 집행이사 /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매일종교신문 기고가 / 땅끝 어룡도 해수관세음보살 도량 당제산 여의암 회주
다나TV 영어경전 강의 / 세계불교 TV에서 ‘세계불교를 가다’ 소개
(http://www.haedongacademy.org)
세계불교에서 인도불교와 가장 가까운 불교전통을 간직한 나라는 스리랑카이면서 또한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정통성은 계맥(戒脈)에 있다. 불교에서 정통성은 비구의 연속성에 있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핵심주체인 승가를 계승하고 있는 구성원은 바로 비구 비구니이며, 또한 재가 대중인 신남 신녀이다. 이를 사부대중이라고 한다. 사부대중 가운데서도 비구 비구니는 매우 중요한 불교 승가의 핵심요원이다.
이 핵심요원이 되기 위해선 어떤 종교적 통과의례인 의식절차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계맥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삼장(三藏=경율론)가운데 율장이 이에 대한 준거(準據)가 된다. 이런 법적 준거가 무너지면 승가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리랑카 불교는 엄청난 역사적 시련 속에서도 계맥을 잇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다. 실론(스리랑카)은 중세시대에 미얀마와 태국에 불교승가를 전파해주었다. 불교승가의 전파는 철저하게 율장에 따른 비구 비구니계맥의 전수였다. 이런 원칙이 있기에, 적당하게 비구계를 받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서구열강의 식민지화로 실론불교는 치명타를 입고, 비구의 씨가 말라 버릴 정도로 불교승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실론 섬의 정통성있는 왕통을 계승하고 있던 캔디왕조는 불교승가의 부활을 위해서 태국에서 계맥을 다시 이어 오도록 전폭 지원해서 실론 승가를 다시 재건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연을 지니고 있는 캔디에는 부처님 치아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불치사(佛齒寺)가 있다. 불치는 어떤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적어도 스리랑카에서는 왕통의 정당성과 연관되어 있다. 스리랑카 전설에는 부처님이 생존 시에 세 번 정도 실론 섬에 다녀갔다고 하는데, 종교적인 신앙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부처님 치아사리는 사실성에 입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기원전 483년에 입적(죽음)하였는데, 인도 쿠시나가라에서 화장되었다. 팔왕분골(八王分骨)이라 하여 당시 인도의 8개 강국 왕들이 부처님의 사리를 분배하여 각기 자기 나라에 사리탑을 세웠다. 당시 부처님 제자가운데 비구 케마가 있었는데, 그가 화장터에서 부처님 치아(송곳니)를 발견하여 브라마닷따왕에게 헌증하였다. 이 치아사리는 브라마닷따 왕국의 왕실 보물로 보존되었는데, 이 나라는 오늘날의 인도 동부 해안의 오디샤(오리사 주)의 푸리이다. 이후에 누가 이 불치를 보호하느냐에 따라서 신성한 왕통성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800년 후에 이 지역에 전쟁이 발발하여, 불치보존의 위험성이 있게 되자, 이 불치를 실론 섬의 아바야기리(무외산사)에 이운하여 봉안. 보존하게 되었다. 이런 사연을 알게 된 미얀마의 바고 왕은 수만금을 주고 이 불치를 가져가려고 했지만 불발에 그치기도 했다.
실론의 아누라다푸라 왕조가 폴론나루와 왕조로 바뀌면서 이 불치도 함께 이운(移運)해 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캔디왕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불치는 왕통의 상징이었고, 이 불치를 소유해야 왕통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상징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 불치는 살아있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종교적 신앙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서, 하루 세 차례 공양을 올리고 의례를 행하며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는 종교의식의 승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치는 캔디 왕조의 왕궁에 불치사를 건립하여 캔디 왕조후예가 보호 의무를, 불교승가인 시암종의 두 사찰이 의식을 집전하고 스리랑카 정부의 불교부가 관리감독을 한다. 이로써 불치는 캔디왕조의 후예, 시암종과 불교부 장관이라는 세 곳의 보호와 보존 및 관리 하에 스리랑카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성보로써 불교도들의 신앙적인 친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치는 바로 살아있는 부처님이기에 시암종의 두 사찰에서 일정기간 번갈아 가면서 하루 세 차례
의식을 집전한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치(살아있는 부처님)에 차와 꽃과 공양을 올리는 일상적인 의식을 봉행한다. 그리고 일 년에 한 차례, 캔디 에살라 페라헤라 행렬인 불치축전 행사를 거행한다. 대개 7-8월에 열리는 이 불치행렬 축제는 스리랑카와 외국에서 온 불자와 관광객 수십만 명이 참가하여 장관을 이룬다. ‘페라헤라’는 행렬이라는 뜻인데, 이 행렬은 두 가지가 있다. ‘에살라’와 ‘달라다’가 있다. 에살라는 기원전 3세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살라는 기우제(祈雨祭)에서 비롯되었다. 달라다는 인도에서 기원후 4세기에 불치가 인도에서 실론 섬으로 이운되면서 시작된 행렬이었다. 이 불치이운 행렬은 헤마말라 공주와 단타왕자에 의해서 이운되었다. 이런 역사적 전통을 지닌 불치행렬은 스리랑카에서 지속되다가 한동안 중단되었다. 중단된 이유는 외세의 침입으로 도저히 이런 축제를 거행할 수가 없어서였다. 근대에 와서 다시 재개된 것은 키르티 스리 라자싱헤(1747∼1781) 라는 캔디 왕에 의해서 칙령을 반포하고 매년 불치 행렬 축전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1815년 브리티시에 의해서 캔디왕조가 멸망한 뒤, 불치가 승가로 이운되었고, 왕의 부재로 인한 불치에 대한 행정업무 등을 위하여 관리가 임명되었다.
스리랑카는 1814년부터 불치사 관리 장관을 임명해 왔는데, 현재 19대에 이르고 있으며, 불치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하고 있다. 불치를 친견하기 위해서는 캔디 왕조 후예, 시암종과 장관이 합의하여야 하고, 각기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열쇠가 있어야 사리함을 열 수 있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