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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4. 7월호] 불교의 과학, 철학적 이해 제1강 동서 사상의 만남 - 글 전 동국대 교수 김용정 박사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8.21|조회수6 목록 댓글 0

 

 

시방삼세

불교의 과학, 철학적 이해

제1강 동서 사상의 만남

 

 

 

글 전 동국대 교수 김용정 박사 1981년 볼티모어 성불사 강의록에서

 

 

 

 

김용정 교수 (오른쪽)

 

 

 

머리말

 

이 글은 고 김용정 박사(1930~2019)가 1981년 재임 중이던 동국대학교에서 연구년을 맞이하여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 연구교수로 체류 중이었던 시절, 뉴욕 맨해튼의 원각사에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 당시 매달 한 번씩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성불사 불교 정기법회에 초대되어 강의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이다. 무려 42년 전에 녹음된 낡은 테이프를 가까스로 MP3 파일로 전환하여, Mrs. 김 박사님이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안승신 박사의 도움을 받아 공동으로 어렵게 적어내고 주석을 단 글이다. 비록 오래전의 강의 내용이지만, 오늘날의 과학이나 철학의 인식 논리 기준으로 비추어, 놀랄 만큼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을 볼 때, 김 박사의 시공을 꿰뚫는 혜안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마치 인드라망에 알알이 박힌 무궁무진의 진주알을 캐어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공부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당시에 불교학은 물론, 서양 철학, 물리학, 과학철학을 전공하시고, 산스끄리뜨 원전 초기 불교를 섭렵하신, 독실한 불교학자인 김 박사님 가르침에 모두 열성적으로 도취하여 강의 후에도 밤늦게 문답 토론했던 기억이 눈물겹게 새롭다. 특히 과학적, 논리적 이성에 근거한, 예리한 통찰력에 바탕을 둔 통섭(統攝)적인 학자로, 시인의 문학적 표현까지 능란하게 활용하여 매우 즐거웠던 강의였다고 기억한다. 우리는 불교를 과학과 철학에 연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 불교와 현대 과학의 관계는 오랜 세월 많은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어 왔다. 특이한 점은, 일련의 전형적인 과학적 사고 원형이 이미 시작부터 불교의 필수 구성 요소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초기 불교 경전,「잡아함경」에 극명하게 드러나는 말이 있다.“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이 말은 불교가 현대 과학의 기본 원리, 즉 보편적 적용성, 방법론적 타당성, 검증 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은 붓다의 선언은 설득력 있고 타당한 방식으로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하여 길을 밝혀주는 동시에 추리력을 충분히 확대할 수 있도록 사실상의 지침을 내려준다. 김용정 박사의 일련의 성불사 강의는 특히 논리적인 교육을 통하여 지식이 넘쳐나는 현대 지성인이 거부감 없이 진리에 접근하는 합리적 방법을 체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흔히 난해하고 틀에 박힌 문어체 논문이 아닌, 평범한 구어체 글이라 얼핏 매끄럽지 못한 면이 없지 않지만, 김 박사님의 논리적인‘사고의 흐름’을, 시공을 뛰어 넘어 바로 앞에서 직접‘듣는 것처럼 읽기’위하여, 친숙한 일상의 용어로 정리하여 보았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믿음을 증장시키고, 수행과 증득의 순으로 닦아가는 시아 본사 석가세존의 온전한 수행 과정이 정립되기를 기원하면서,인연 있는 분들과 김 박사님의 희유한 가르침의 일부라도 공유하고자 한다.

 

 

 

윤최범산(尹崔梵山),
미국 마취학 & 통증학 전문의.
Jay J.
Choi, MD, DABA & ABPM
주 반야 Banya Hyun Choo, PhD

 

 

 

제1강. 동서 사상의 만남
제2강. 불교의 중도사상
제3강. 불광과 초능력
제4강. 독일 마인츠 Mainz 대학 국제 칸트 대회 참석 후기:
어떻게 사는 것이‘실체화’를 떠난 참다운 삶인가?
제5강. ‘장’의 개념으로 보는 불성
제6강. 현대물리학과 불교

 

 

 

 

1. 불교의 정토사상:
아미타불과 미륵보살

 

불교는 너무 철학적이고 말들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불교가 종교인가?’하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국사를 가보면 미륵 사상과 아미타 사상이 불교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는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유명한 불교학자들이다. 불교의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확대하여 말한 것이 화엄사상인데, 화엄사상은 불교학에서 가장 어려운 이론 중 하나로 신라시대 불교학의 기초가 된 이론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중들에게 나타난 불교는 어째서 아미타 불교나 미륵불교인가? 이것은 불교가 단지 철학이 아니라 종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불교가 어렵고 이론적이고 체계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철학이 아니라 종교임을 말하려면, 우리는 정토사상(淨土思想)을 말해야 한다. 정토사상이란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나 미륵보살과 같은 보살들이 거주하는 불국토 혹은 극락에 대해 말하는 대승불교 사상으로서, 일반 재가 신도들이 스스로는 교법(敎法)을 이해하기 어려워 부처의 자비로 구원을 받아 이러한 정토에 가고 싶다는 종교적 욕구에 응한 사상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일본에서 현실 불교는 정토사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흔히들 ‘불교’라 하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말하고, 오래 불교 신앙을 가져온 신도 중에도 막상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라고 게송 하면서도, 그 게송이 무슨 뜻인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사실 불교의 게송들은 진언처럼 해석할 수가 없다. 우리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끝낸다. 그런데 그 반야심경의 끝 구절은 본래 산스끄리뜨어 (梵語)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바)하’인데, 이것이 한자, 이두 문자 등을 거쳐 그렇게 된 것이다. 산스끄리뜨어로 된 그 진언의 의미를 새긴다면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가자.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주소서’라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불교의 모든 게송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언이 되어 번역하거나 해석할 필요가 없다. 반야심경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전까지는 철학이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게송은 진언으로 신비의 세계로 넘어간 언어인 것이다. 마지막에는 모든 언어가 다 단절되고 우리의 인식의 틀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이 다 소멸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불교의 종교성과 철학성

 

그러나 불교의 특징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교에서 철학이 배제된 신앙만의 종교를 말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다. 서양에서도 중세 기독교 교리가 성립할 때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하는 말이 있었다. 믿는 게 먼저냐 아는 게 먼저냐?라고 할 때 믿는 것 마저도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할 정도로 앎을 앞세웠다. 사실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있을까? 앎과 믿음의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기독교에서는 지금까지 두 파가 갈리어 다투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앎과 믿음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 불교는 철학 즉 종교, 종교 즉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종교적 함축성을 가진 철학이요, 철학적 함축성을 갖는 종교인 셈이다. 사실 불교에서 철학과 종교는 상호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성장했고, 그래서 결국 불교는 진언처럼 마지막 단계에서는 언어가 단절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로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불교만큼 경전이 많은 종교가 없다.
이를테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신수대장경은 한국의 팔만대장경을 기본으로 된 것이다. 일본이나 대만에 유학하여 불교공부를 한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이 엄청난 것임을 알게 된다. 팔만대장경의 경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자 (誤字)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왜 불교는 가장 언어를 단절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가장 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많은 철학체계를 세워서 말하는가?
여기서 아미타 사상과 정토 사상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스끄리뜨어의 분석이 필요하다. 산스끄리뜨어의 ‘아미타유수(Amitāyus, 무량수(無量壽)’란 ‘아빠리미타유수’ (Aparimitāyus)와 같은 말인데, 여기서 ‘a’는 ‘부정’을 의미하며, ‘pari’는 ‘완전히’를 의미하며, ‘mitā’는 ‘계량하다’를 의미하고, ‘yus’는 ‘목숨(생명)’을 의미한다. 곧 ‘아빠리미타유수’란 ‘완전하게 계량할 수 없는 목숨’이란 의미가 된다. 그러니 ‘아빠리미타유수불’은 곧 ‘계량의 한계를 벗어난 끝없는 하나의 생명을 가진 부처’ 즉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의미한다. 이 무량수불이 곧 아미타 부처님 (阿彌陀佛)인 것이다. ‘나무 아미타불’은‘귀의하다’란 의미의‘南無, Namo’가 붙여진 것으로서‘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아미타불이 따로 하나인 것만은 아니다.

이 세계 모든 생명체의 존재는 우리의 개념으로 계량하거나 측량할 수 없는 존재이다. 즉 우리의 계량의 한계를 벗어난 시공을 초월한 신비로운 무한의 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심지어 여기 분필도 아미타불이라 할 수 있다. 분필도 우리의 인식으로 측량할 수 없는 무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립자 물리학에서 물질의 기초적인 입자가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분석해보니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원자핵과 전자로,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또 중성 미자로 분석하면 할수록 더 복잡해지고 결국 그 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지로 간다. 즉, 존재란 무한한 것이다.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먼지 같은 한 존재도 계량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까닭으로 이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먼지 하나도 부처라고 한다.
계량할 수 없는 무량의 신비한 존재라는 뜻이다.
중생들이 그 뜻을 잘 모르고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지만 철학적으로 그것을 분석해 보면 이런 의미가 된다. 이 세계의 먼지알 하나도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런 무한의 존재일진대 우리가 그런 무한의 세계로 귀의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즉 일체 즉 佛인 것이다. 붓다란 산스끄리뜨어 ‘budh’의 ‘깨달음, 앎’ (to awaken, to understand)이라는 의미에 ‘ha’의 과거분사 어미가 붙어서 ‘깨달은 자’ (Awakened one or Enlightened One) 즉 부처님이 된다. 이와 같이 아미타불 사상은 그러한 무한의 세계를 열어 놓는 데에 기초하고 있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부처님은 아미타 부처님이다. 신라인들은 철저하게 아미타 사상에 기초해서 정토사상을 세웠고 그 최고의 상징이 바로 석굴암 부처님이라 할 수 있다.

 

아미타 사상은 또 하나의 특징을 갖는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肉化하여(incarnation) 오시듯이, 불교에서도 아미타 부처님이 직접 오시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의인화하여 관세음보살의 형태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다. 천수경(千手經)의 천수는 천 개(많은 수)의 손을 가지신 관세음보살이 이 세상 구석구석 어디에도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도록 천 개의 손을 갖고 오신다. 구원의 손길이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우주 안에 관세음보살의 손길이 못 미치는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양측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신다. 관세음보살은 실천의 보살이고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보살을 뜻한다. 대웅전을 보면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고, 양측에는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계신다. 보현보살은 실천의 보살이고 문수보살은 이론, 철학의 보살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유사하다. 이와 같이 종교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상징적으로 표시되듯이 과학에서는 이론과 실험이 중심이 된다. 아마도 이것이 인류가 생각하는 기본적 패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불교의 궁극적 목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통 함께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아미타불은 앞에서 알아보았듯이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한량없는 수명을 지닌 부처로서 (서방)정토에 머무시며 중생을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이시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화신으로서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온 중생의 고통 소리를 들으며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로 인도하는 분이시다. 이렇게 중생을 정토로 이끄시는데 둘은 서로 돕는 분이다.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함께 목표로 하고 계신다. 종교의 목표가 이것 아니겠는가?
정토(淨土)는 산스끄리뜨어로‘쑤카바띠(sukhavati)’이고 중국어로는‘극락’이라 번역한다. 여기서
극락은 반드시 내세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고 어원 그대로를 분석하면 쑤카(sukha)는‘즐거운’, 바띠(vati)는 ‘소유하다’를 의미한다. 즉 정토란 ‘즐거움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내가 가장 즐겁게 있는 것, 가장 잘 있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 아닐까? 그럼 무엇을 즐거워하는가? 그러면 그 쑤카바띠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 있는데, 그것은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그리고 아미타경(阿彌陀經)이다. 이중 아미타경에 ‘쁘라니다남 까스따비얌’ 이란 말이 있다. 중국어로는 ‘응당발원 원생피국 (應當發願 願生彼國: 마땅히 서원을 세워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함)’ 이라 하며 영국의 막스 뮐러(Max Müller)는 ‘붓다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강렬한 기도(fervent prayer)를 해야 된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정토국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마땅히 발원해야 하는데,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즉 간절한 기도가 원(願)이라는 것이다. 즐거움이란 모든 인류가 다 같이 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큰 원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명이란 즉 원이 없다는 말과 같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류가 다 같이 잘 살아야 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철학에서 당위(當爲) 윤리가 형상화된 것이 법인데, 칸트의 윤리학에 정언명법(定言命法)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정언명령을 의미하는 말로서 아무 조건이 없이 이유를 묻지 않고 무조건(categorical statement) 따라야 하는 지상명령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령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제일 즐거울 때는 무조건적으로 누구를 도와주었을 때이다. 불교에서는 조건이 함축되어 있으면 오염되는 것으로 본다. 친구, 부부, 형제, 사제지간 사이에서 사랑에 조건이 붙지 않아야 하듯이 모든 도덕 명령은 무조건적인 정언명법이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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