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미현불연재물

[미주현대불교 2024. 7월호] 불교와 서양사상 III - 글 이원익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08.20|조회수2 목록 댓글 0

 

 

_ 부루나 칼럼 Ⅰ

불교와 서양사상 III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6. 실존주의 이전의 서양사상과 불교

 

이번 편에서는 실존주의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로 글을 끊어서, 유럽에서 불교사상을 연상시키든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불교 사상과 상당히 관련이 있어 보이는 서양의 사상가나 철학자 몇을 추려서 짚어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실존주의가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중요성을 지녀서가 아니고, 그 시점으로 잘라서 일단 단락을 나누는 것이 이 글을 쓰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e)란 세계 대전을 겪고 난 유럽이 전체주의로 흐르기 쉬운 시대정신이니 하는 것에 질린 나머지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생겨난 철학적, 문학적 흐름인데 구체적인 것은 이 다음 편에서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1) 중세 신학자
전편에서 보았듯이 서양의 중세는 기독교 신학의 시대로서 철학은 신학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거의 머물렀지만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예외가 있으니 에크하르트다. 그는 현대에 와서 기독교 안에서는 물론이고 그 바깥에서도 진가가 재발견되어 탐구되고 있다.


독일의 진보적 스콜라 학자,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설교가로서 도미니크 수도원 출신이다. 마르틴 루터 등 후세의 종교개혁자들과 맥이 닿는다. 그는 1260년경 지금의 독일 튀링겐주에서 태어나 1302년쯤 파리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 이후 삭소니아 관구의 초대 관구장, 2차로 파리 대학교 교수 재직, 스트라스부르 관구의 총대리를 지냈다. 1323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쾰른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 대학에서 교수 활동, 이 시기에 이단 의혹을 받기 시작해 1326년 본격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이후 에크하르트는 ‘변론’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진 비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변론을 시작했다.
교황청은 60개의 항목 가운데 25개 항목에 대해 단죄 판결을 내려 1329년 3월 판결문이 나왔을 때 그는 아비뇽에서 이미 죽은 뒤였다.
이처럼 신과의 합일을 주장하는 등 범신론적 경향때문에 이단으로 기소되기도 하였으며 교단으로부터 경원시 당했고 지금도 정통 보수 기독교에서는 그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관장했던 독일 남부 라인강 지역의 여러 여자 수도원에서 수많은 설교를 독일어로 행했는데, 이를 받아적은 것들이 신비주의적 삶과 영성에 대한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독일 신비주의 발전의 전개에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는 불교를 공부하지는 않았으나 관상(觀想, contemplation, 명상), 정적(靜寂)과 무(無)의 경지에 철저하였는데 수행과 깨달음의 관점에서 선불교를 연상시킨다. 자기를 무로 돌려 하느님의 무와 합일하면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며, 모든 것, 하느님까지도 버리고 최고의 덕을 달성하고자 함은 선불교의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殺佛殺祖]’를 떠오르게 한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혈연상 동질성을 이야기한 것은 중생은 본래 부처이므로 견성성불(見性成佛) 해야 한다는 불교와 통한다.
다음은 그의 어록인데 상당히 불교적 내지 동양적이며 당시의(지금도?) 제도 교회에서 싫어했을 만한 내용이다.

 

- 너는 신을 여기서도 저기서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네 마음의 문 바로 앞에 있다. 그것에서 그는 서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 신을 특정한 형태로 찾으려 하는 자는 그 형태를 만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신은 만나지 못한다. [금강경: 목소리나 형태로서 나를 찾는 자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 신은 늘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가 적을 뿐이다.
- 진실은 너무나 고귀하며, 만약 신이 진실에서 멀어진다면 나는 진실을 간직하고 신을 놓을 것이다.
- 영혼의 말씀은 침묵에서만 들린다.

● 주요저서: ≪삼부작 ≫ ≪설교논문집 ≫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Johannes Eckhart, Eckhart von Hochheim, 1260년경~1327년경)

 

 

 

(2) 대륙의 이성론자들
우리가 진리를 어떻게 알아채느냐,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 인식론인데 근대의 인식론에 있어서 한 무리의 철학자들이 이성(理性 reason)을 앞세웠으므로 이들을 이성주의(理性主義), 합리주의(合理主義) 또는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의 철학자라고 한다. 경험론자와는 달리 감각이 아니라 이성을 앎의 가장 밑바탕으로 본다. 연역적인 방법론이나 이론을 쓴다. 연역법이란 어떤 전제를 걸어 놓고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에는 어떤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며, 인간의 지성은 이러한 진리를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성론자들은 이성에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경험적인 증거나 물리적인 증거는 진리를 획득하는 데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셸링 등이 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5)
스피노자(Baruch Spinoza,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5)

 


스피노자는 고독과 신비, 지조의 철학자다. 너 자신과 너의 삶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비난과 저주를 받은 사람은 없으며 그토록 초연했던 사람도 없다. 그는 윤리학의 제왕이자 철학의 지존이다. 그리고 굴복을 모르는 정신력의 소유자다.
단언컨대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주의자다. 그는 종교재판을 피해 에스파냐에서 포르투갈로, 그리고 다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1632년에 태어났다. 친할머니는 포르투갈에서 마녀로 지목, 화형을 당해 죽었다. 네델란드로 오기 전 프랑스에서 유대교를 버렸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네델란드에서 죽은 다음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신에 포경수술을 했다. 이 일은 네덜란드의 품에 안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얼마나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 준다.

스피노자는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유대인 사회에서 앞으로 랍비가 될 기대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대교를 불신하여 스물네 살 때 파문과 추방을 당한다. 본래 빛에 심취했던 그는 그 후 독신으로 렌즈를 갈며 살았는데 이 유리 먼지 때문에 규폐증에 걸려 마흔세 살에 죽었고 교회에 두었던 주검도 아마도 그를 저주한 무리에 의해 도난당하여 찾지 못하고 친구에 의해 귀중한 윤리학(에티카)의 유고만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유대 신앙의 유일 절대 신과 데카르트의 필연성을 종합, 일원론을 세웠다. 신은 곧 자연이라고 하였다.
서양의 일부 지식인들은 불교를 스피노자식 범신론으로 보았다. 불교는 내재이며 초월인 밀교 대일여래의 경우를 보더라도 범신론이라기보다 범불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은 인과의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고 낱낱의 자유는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불교의 인연소기의 법칙과 비교된다. 불교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지혜의 길을 강조한다든지 기본적 관심사는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적 문제에 있지 않고 윤리적인 문제에 있는 점, 그리고 괴로움의 실체에 주목하는 점이 서로 닮았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며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 죄악은 자연 상태에서 생겨날 수 없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만장일치로 판단하는 시민사회에서 결정된다.
-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
-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 주요저서: ≪데카르트 철학의 제원리≫  ≪윤리학 ≫

 

 

독일의 다재다능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공학자,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 뉴턴과 함께 미적분을 발견하였으며 낙관주의자로서도 유명하다. 그가 얼마나 천재인가 하면 그의 관심과 업적은 미적분, 이진법 분만 아니라 위상기하학, 물리학, 지질학, 발생학, 생명과학, 고생물학, 심리학, 공중 위생학, 경제학, 사회학, 공학, 계산이론 및 도서관학에까지 이른다.
그는 신을 옹호했는데 이 세계는 실체적 존재인 단자(모나드)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배후에는 영원한 실체인 신이 존재한다는 변신론을 주장하였다. 주역(周易)의 괘(卦)가 000000부터 111111까지 이르는 2진법 숫자와 연관성이 있음을 주목하였고, 이는 철학적 수학의 한 종류로서 중국인들이 도달한 중요한 업적이라고 보았다. 중국철학이 자신의 철학과 비슷하다고 보았으며 유럽인들의 신앙에 유학적 개념을 수용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중국 문명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인 최초의 유럽인이며 동양의 불교 또한 인식하였다.
-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다.
- 영혼에서는 명료함을, 물질세계에서는 실익을 찾아라.
● 주요저서: ≪이진법에 관한 설명 ≫ ≪모나드론 ≫

 

 

 

(3) 영국의 경험론자들
근대 경험주의(經驗主義 Empiricism)는 주로 17세기~18세기에 영국에서 발달한 철학 사조이다. 존로크가 창시자다.
경험주의란 인식론에 있어서 사람이 겪고 느낀 감각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증거를 가지고 앎이 생긴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듯이 과학의 이념과 매우 닿아 있다. 이성론자들과는 달리 귀납법을 쓴다.

프랜시스 베이컨, 토마스 홉스, 존로크,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 등이 있으며 분석철학을 비롯한 현대 영미철학의 먼 시조가 된다.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란드 에든버러 북쪽에 위치한 천사이드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로서 영국의 경험주의를 완성한 계몽주의자다. 이후의 공리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에든버러 대학교에12살의 나이로 조기 입학하였나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이후 철학을 공부하였다. 1744년 도덕과 정치에 관한 논문으로 에든 버러 대학교의 교수직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했는데 당시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이 흄을 무신론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흄은 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았으나 친분 있는 젊은 성직자들의 변론으로 재판까지 받는 일은 피했다. 그러나 흄의 형이상학에 대해 애버딘의 토머스 리드와 같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흄은 글레스고 대학교의 철학 수석 교수직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흄은 1752년 에든버러로 귀향하였다. 1752년 에든버러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1763년 주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루소와 사귀었다. 모든 앎은 강렬함(생생함)으로 느껴지는 감정적 ‘인상’에 불과하다, 이성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관념조차 사실은 인상에서 왔다, 지식은 이성적 추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얼마나 더 그럴듯한가'에 대한 개연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도덕의 선악 판단은 ‘그 도덕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유용한가’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학설에는 선불교나 유식학의 기본 교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자아의 실체에 대하여, 붓다의 ‘없다’와 흄의 ‘알 수 없다’의 차이가 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 사람들은 연속적 관계를 필연적 관계로 오해한다. [→ 연기설]
- 모든 앎은 강렬함(생생함)으로 느껴지는 감정적‘인상’에 불과하며, 이성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관념조차 사실은 인상에서 왔다.
- 인간은 상이한 지각들의 다발이거나 묶음에 불과하며, 이 지각들은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서로 연결되어 영속적인 흐름과 운동을 만들어 낸다. [→ 유식학: 오온설]
- 도덕의 선악 판단은 ‘그 도덕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유용한가’에 달려있다. [→ 천수경: 죄란 본성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만약 마음에서 사라지면 죄 또한 잊히리라 罪無自性從心起 心 若滅是罪亦忘] [반야심경: 더러움도 깨끗함도없다 不垢不淨]
- 지식은 이성적 추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얼마나 더 그럴듯한가’에 대한개연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 인생의 방향을 잡아 주는 끈은 이성이 아니라 습관이다.
-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증거와 조화시킬 줄 안다.
● 주요저서: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인간 지성에 관한 연구≫

 

 

(4) 독일의 관념론자들
관념론(觀念論, idealism)에서는 마음, 정신 혹은 관념을 중시하거나 근본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적 입장을 가진다. 오직 정신, 마음, 관념 혹은 영혼만이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18세기 말 당시의 독일을 보자면 통일국가란 이름 뿐이며, 프랑스나 영국에 비하여 근대화가 상당히 뒤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독일 지식인들이 볼 때 자국의 봉건제와 정면으로 싸울 힘은 없었고, 근대화와 민족 독립은 서로 모순이 되어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선진국들이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실현했던 것을 정신적, 논리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것이 독일 관념론의 시발인데 일종의 정신승리(?)라고나 할까 모르겠다.
아무튼, 독일 관념론의 주요한 주제는 정신, 곧 사유의 자립성 문제, 의식의 능동적 활동성 문제였다.
피히테, 셸링, 헤겔 외에 라인홀트, 횔덜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이 있다.
참고로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입장들과 종종 비교되고는 한다.

 

- 유물론: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
- 심신 이원론: ‘물질과 정신이 둘 다 존재한다.’
- 실재론: ‘우리 바깥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
- 유아론: ‘우리 바깥에 객관적인 실체가 없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서양철학의 제왕으로 역사상 칸트처럼 많은 존경을 받는 서양 철학자는 없다. 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은 소련령 칼리닌그라드)의 경건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안장을 만드는 장인. 열한 명의 아이 중 넷째. 155cm의 키에 몸무게 50kg. 대학 졸업 후 가정교사, 대학 강사로 좋은 머리에다가 박학다식의 인기 강사로 철학, 논리학, 수학, 물리학, 윤리학, 법학, 신학, 천문학, 지리, 역사, 화학, 광물학 등을 두루 가르쳤다. 마흔두 살에 쾨니 히스베르크의 왕립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가 마흔 여섯에 드디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철학 정교수가 되었다. 그의 전반생은 생활고, 후반생은 강의 지옥으로 점철된다.
1781년, 57세 때 자신의 철학의 집대성이자 대표작 그리고 3대 비판서의 첫 번째인 <순수이성비판>을 출간했다. 칸트의 3대 비판서가 <순수이성비판>,<실천이상비판>, <판단력비판>이다. 각각 존재론(인식론), 윤리학, 미학이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지나쳤기에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독일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하였으며 데카르트로부터 이어지는 합리주의와 존 로크로부터 이어지는 경험주의를 종합한 철학자이다. 종래의 경험론 및 독단론을 극복하도록 비판철학을 수립하였다.
인식 및 실천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 형식에서 찾고, 사유가 존재를, 방법이 대상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에서 찾고,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그는 상세하게 인도의 지리학을 연구한 최초의 철학자(자연물리지리학)이며 불교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불교도의 타종교인에 대한 관대성을 찬양하였다. 중국 불교의 고도의 철학성에 대해 언급하고 일본불교가 실제 생활에 있어서 적용성이 탁월하다고 찬탄하였다. 신비에 싸인 티베트에 매혹되었으며 석가의 종교개혁과 티베트의 종교적 영향력을 주시하였다.
영혼의 윤회에 이끌리어 윤회야말로 동양인이 가진 아름다운 개념으로 동양인의 몽상적 근원이라고 하였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 법규에 맞도록 행위하라.
-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을 지키고 선도덕법칙이다.
- 내 자유의 한계는 바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까지이다.
- 인간의 지식은 모두 직관으로부터 시작하여 개념으로 나아가서 아이디어로 끝난다.
- 지구가 멸망해도 옳은 일을 하라.
● 주요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서양 관념론 철학의 종결자이자 대륙 철학의 완성자인 헤겔은 근대의 화신으로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운송 회계사 고문이고 어머니는 뷔템베르크 고등법원 변호사의 딸인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이었다. 1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설교사가 되기 위해 18살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한다.
3인실 기숙사에 배정받았는데, 룸메이트가 훗날 시인이 된 횔덜린과 당시 13살밖에 안 된 신동, 훗날 철학자가 된 셸링이었다. 셸링은 불과 23살의 나이에 예나 대학교의 철학과 정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셸링의 추천으로 1805년, 헤겔은 드디어 예나 대학에 원외 교수로 가까스로 채용되었는데 월급도 나오지 않는 비정규직이었다. 1818년에는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헤겔은 늦게 주목받았는데 그의 철학은 방대하고 정밀하게 철학의 모든 테마를 논리적 모순 없이 완벽한 피라미드로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상도, 저서도 늦게 나왔지만 한 번 명성을 쌓고 나서는 절대자의 지위를 얻었다. 헤겔은 서른이 될 때까지 셸링에게 철학을 배우다시피 했다. 하지만 대기만성형인 헤겔이 대성하자 셸링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폄하하는 저술과 강연을 하며 돌아다니는 초라한 생애를 마친다.
아무튼 헤겔은 독일 관념론을 완결한 철학자로서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Dialectics)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 역사, 사회 및 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 간다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일체의 사물은 개념이라고 보는 관념론과 세계를 절대자의 자기 전개라고 보는 범신론적 관점에서 근세 정신을 자기 내화하였다.
그는 칸트, 피히테, 셸링 등의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여 완성시켰다. 존재와 사유, 주관과 객관의 모순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일치시키려고 했으며, 논리학과 법철학, 역사철학, 미학, 종교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체계를 구상해, 후대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헤겔로 인해 서양인들은 동양에 대한 우월감의 근거를 확보했다. 신은 세계 안에서 세계와 더불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불교를 ‘자신 안에 있음[내자존재]’의 종교로 규정, 불교의 제1 원리인 정지된 무를 신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감각적인 의식에서 출발하여 절대정신의 입장에 이르는 모든 과정의 변증법적 전개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며 모든 변증법적인 과정은 그러한 비과정적, 초과정적인 이법의 자기은폐적인 자기 현시에 의해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고 필연적인 원리가 작용하여 세상은 변증법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변해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인 것 같다) 이는 공은 무자성이며 연기 유무의 양극단을 초월한 인식만이 참된 인식이라는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의 중론과 대비된다.
아무튼 헤겔의 철학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헤겔은 불교의 승려 매개와 미신화를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불교를 가장 낮은 단계의 종교로 규정한 바 있다.

 

- 변화 자체만큼 영속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
- 모순은 모든 운동과 생명의 뿌리이다.
- 세계의 역사는 다름 아닌 자유에 대한 의식의 진보에 있다.
-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 주요저서: ≪역사철학≫ ≪정신현상학≫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란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 사회, 정치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 또는 이러한 사회 형성을 목표로 삼는 형식적, 실질적 정치 운동에 관한 사상이다. 마르크스가 창시자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철학자로 지목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프로이센 왕국에서 유대계의 중산층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8세에 본 대학으로 갔고 1843년 프로이센 하급 귀족의 딸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였다. 1836년 베를린 법대 시설 이용권으로 강의를 들었는데 법학보다 철학에 관심이 갔다. 이때 헤겔학파를 접했으며 혁명사상에 물든다. 1843년에 파리에 망명하면서부터 파란만장하고 곤궁한 생활이 이어지는데 벨기에를 거쳐 1850년 런던에 망명한다. 혁명 활동과 함께 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다시피 하여 박학다식을 갖춘 그는 1860년, 세계를 뒤흔든 근간이 된 '자본론'을 저술한다.
마르크스 부부는 일곱 아이를 낳았는데 가난과 핍박 속에서 성년이 되도록 살아남은 아이는 딸 셋뿐이었다.
본래 공산주의적 사고는 전근대 사회에도 존재했으나 오늘날에 통용되는 공산주의라는 의미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관한 것을 뜻하며, 변증법, 역사주의, 유물론이 핵심 사고로 자리 잡고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유물론자인 그는 가이스트(Geist 정신)가 아닌 물질적 조건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헤겔의 역사 발전 모델에서 절대정신을 빼고 그 자리에 자본, 노동, 이윤, 잉여생산물을 넣었다. 시대정신은 분배 정의로 대체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적 동지 엥겔스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정반합으로 진보하는 변증법적 역사관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돈했다.
우리가 헤겔 철학을 이만큼이라도 쉽게 이해하는 데엔 역설적이게도 마르크스('거꾸로 선 헤겔'이라고도 일컫는다)의 덕이 크다.
이 사상이 현실 정치에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시점은 19세기 유럽의 산업화 시기와 겹친다. 이 당시 유럽은 급속한 산업 발전에 따른 갖가지 사회병리 현상을 겪고 있었는데, 공산주의는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주창되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공산주의(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이다. 본래 청년 헤겔학파에 심취하였는데 무신론의 주장과 목표를 향한 정진을 강조한 점에서는 불교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여겨 비난하였다.

 

-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진단만 했다. 진정으로 중요한 일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 인간 해방을 위한 두 가지 강력한 무기는 인간의 두뇌와 심장이다.
● 주요저서: ≪공산당선언≫ ≪자본론≫

 

 

(5) 현상학파
이 세계가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그 자체를 '현상'이라고 하고 이렇게 주어진 현상의 보편적인 특징과 조건들을 탐구하는 철학을 현상학이라 한다. 곧 나의 밖이나 안의 무엇이 내 마음이나 생각에 '떠오름'이 현상이며 그게 뭔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밝히는 학문이 현상학이다. 후설이 그 체계를 놓은 철학자이다.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영국의 경험론자인 흄은 심리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실증주의와 결별하였으며 의식의 지향성에 주목하였다. 중세 신비주의 철학이나 근세초월 철학이 그러한 인간 내면의 초월성 내지 영성에 관심을 가졌는데 후설은 그런 초월성을 체계적으로 논하여 초월적 관념론(초월적 현상학)으로 완성시켰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수학자로 출발하여 철학으로 전향하였다. 불교와 후설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진리로는, 자아와 세계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객관세계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성에 의해 그렇게 바뀌어 나타나고 구성된 것이라는 것, 세계로 바뀌어 나타나고 세계를 구성하는 우리의 심층 마음은 우리의 표층의식보다 더 깊고 더 크다는 것, 그 더 크고 더 깊은 심층 마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표층의식이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서로 소통하고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불교의 유식학과 상통한다.
그런데 동양에서의 철학은 불교든 유교든 도교든 인간과 우주의 실상에 관한 이론적 논의는 언제나 관하는 자의 심성을 맑히고 영적 수준을 높이는 실천 수행론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이론이 곧 실천이고, 철학이 곧 종교인 데 반해 서양철학에서는 인식론, 존재론, 심지어 윤리학까지도 수행을 전제하지 않음이 다른 점이다.

 

- 의식은 현상을 창조한다.
- 현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한다.
-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진다.
- 모든 인식의 기초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 이해는 존재의 노력이다.
● 주요저서: ≪논리연구≫≪내적 시간 의식의 현상학≫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