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나 칼럼 Ⅱ
시는 말(言語)이다
글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
나의 시 쓰기 공부 시작
나는 2017년 9월에 ‘뉴욕중앙일보 문학 동아리’에 참여했다. 김정기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자주 받았다. 그 당시, 나는 시를 자주 썼다. 매주 김정기 선생님에게 시를 한편 씩 보냈다. 2년이 지난 후부터는 2주에 한편의 시를 보냈다. 동시에 많은 시집을 읽었다. 6년이 지나서 <시문학>월간지를 통해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된 후, 내 시집 <바위의 언어>를 발간했었는데도, 그래도 시를 씀(작법)에 있어서 자신감이 없었다. 내가 시를 써 놓고도, 이 시가 정말 괜찮은 시인지 혹은 엉터리 시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한편의 시를 써놓을 때마다, 즐거워하기는커녕, 불안이었다.
무엇이 시인가?
문덕수 시인은 그의 저서 <오늘의 시 작법> (59쪽)에서 “시인지, 격문인지, 정치적 메시지인지···, 예술성이나 미적 효과가 없으면··· ” 시가 아니다 라고 했다. “예술성이나 미적 효과가 없으면?”
이 말이 은근슬쩍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오규원 교수는 “작품이 좋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나중의 문제이지만, 시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면 그것은 모두 시이다”(현대시작법, 77쪽)라고 말했다. 오규원 교수의 말대로, 쓴 사람이 ‘이것은 시다.’ 라고 우기면 그것은 시이고 또한 시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내가 쓴 시가 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李箱, 1910-1937)의 <오감도(烏瞰圖)>
란 시를 보자. 그 당시 독자들은 이상의 시는 시가 아니라고 우겼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게 시는 시인데, 우리들이 이해를 못하는, 난해한 시라고 여기고 있다. 난해한 시도 시다! 난해한 시는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일반 대중은 난해한 시를 외면해버린다. 대중이 시가 아니라고 우겨대도, 쓴 자가 시라고하면, 시는 시다.
시란 무엇인가
몇 년 동안 시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갑작스럽게, “아, 시란 바로 말(言語)이로구나. 시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 형태로 써놓으면, 그게 바로 시가 되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고 싶은 것을 시의 형태로 쓰면 그게 시다.” 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나니, 시라는게 별개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긴다. 시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편지 쓰듯, 하지만 시의 형태로, 내 말(의견)을 독자에게 전달만 해주면 된다. 이렇게 “시는 말이다.”하고 정의를 내리고 나니, 시에 대한 감(感)이 잡힌다. 감을 잡고 나니, 이제 시를 쓸 수 있다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
시는 생각에서 나온다.
내가 쓰고자 하는 시(詩)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속마음에서 나온다. 속마음은 무의식이다. 우리의 지식이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 속마음에 쌓여있다. 좋은 지식을 속마음 깊숙이 많이 쌓아놓기 위해서는, 독서도 많이 해야 하고 그리고 사색도 또한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을 속마음에서, 내 마음대로, 끄집어낼 수가 없다. 생각이 저절로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는 산책할 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있을 때, 혹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혹은 아침마다 30분 좌선을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좋은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좋다고 생각되는 생각이면, 나는 얼른 종이에 적어놓는다. 종이에 적어놓지 않으면 그 생각은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종이에 적어놓은 내 생각을 시의 형태로 쓴다. 써놓은 후 여러 번 교정하고 수정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意圖)가 제대로 표현되어 있는가를 살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내 시에 잘 표
현되어 있다면, 그 시는 나에게 있어 좋은 시인 것이다.
반 고흐와 고갱의 다툼
프랑스의 남부에 아를(Arles)이란 마을이 있다. 여기에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일 년 동안 산 적이 있었다. 반 고흐는 폴 고갱(1848-1903)을 무척 좋아했었다. 폴 고갱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여기서 2달 동안, 둘이는 함께 거주하면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두 사람은 이름 없는 화가였었다. 반 고흐는 집 밖, 들판으로 나가서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집 안에서 그림을 그렸다. 사용하는 색깔도 서로 달랐다.
무명의 화가들이었기에, 다른 유명한 화가의 이론을 앞세워, 그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그려야 한다고 우겨야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 다 유명하지도 않는, 초보의 화가였었는데도, 다른 화가의 이론을 앞세우지 않았다. 자기네 화법이 옳다고, 두화가가 열렬이 다투는 것을 영화에서 보았다. 둘 다 살아있었을 당시에는 가난한 화가였었다. 그런데 죽고 난 후, 두 화가는 엄청 유명해졌다. 두 분은 기존의 화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기네가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표현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말은 그들의 그림이 되었다.
여기에 나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계란의 소리
냉장고의 계란은
살아있나 죽어있나
죽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계란을 프라이하는 아침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익는 소리
생을 마감하기에 슬프다는
계란의 마지막 울부짖음일까
아니면
익혀졌기에
즐겁게 먹어달라는
기쁨의 부르짖음일까
지금의 극락·천당은 어떨까
1)
부처·예수가 살았을 때
극락이나 천당에
자동차도 없었고 비행기도 없었다
전화, 냉장고, 텔레비전, 컴퓨터도 없었다
골프도 야구도 농구도 없었다
극락이나 천당에
지금은 이런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을까
없다면?
그렇다고 지옥에 갈 수는 없잖아
극락·천국에 가자니 고민이고
안 가자니
고통이로구나
2)
무어가 고통이고 고민이란 말이야
없으면
우리가 가서 전등불도 켜주고
현대화시켜놓으면 될게 아냐
하느님이 되레 화를 내신다
산 물건이 내 마음에 안 든다
상점에 찾아간다
군말 없이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준다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내가 늙어있다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으면서
하느님께 찾아간다
젊음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기가 차네
젊음을 돌려받지 못한
내가 분노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레 화를 내신다
새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새
너를 보니 네가 부럽다
나는 나르려고 해도 날아다니지 못하는데
너는 아주 쉽게 허공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구나
나르는 것도 타고난 복이지
배운다고 해서 배워지는 게 아니야
너의 영혼도 나를 수 있을까
물론, 나르겠지
너는 죽으면
시신을 여기에 남겨두고
직접 천국에 날아갈 수가 있어서
너는 참 좋겠다
늙었기에 기댈 사람은
‘여보’, 우리는 늙었어
아주 많이 늙었어
더 늙지 않으려고 은퇴를 했었지
더 늙지 않으려고 운동을 하고 있는 거야
골프를 치는데도
늙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잖아
자란 자식들은 떠났고
집에는 당신하고 나뿐이야
집안의 화분들
당신이 바빠 물 줄 시간이 없으면 내가 주고
당신이 밥하면 나는 설거지 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었지
늙었기에 기댈 사람은
당신은 나뿐이고
나는 당신뿐이야
시의 내용은?
나는 87세이다. 냉장고 안의 계란처럼 살아있기는 살아있다. 평균 이상으로 많이 늙었다. 얼마안 있으면 죽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시를 많이 쓸 것이다.
죽으면, 저승에 가서 태어날 것이다. 저승에 대한 시도 쓸 것이다. 늙었기에 괴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늙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도 또한 있다. 늙음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쓸 것이다.
지금까지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했었다. ‘좋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또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