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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4. 8월호] 시방삼세 제 1강 동서 사상의 만남(2) - 글 김용정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11.01|조회수5 목록 댓글 0

 

 

 

불교의 과학, 철학적 이해
제1강 동서 사상의 만남(2)

 

 

글 전 동국대 교수 김용정 박사 

1981년 볼티모어 성불사 강의록에서

 

 

 

 

김용정 교수 (오른쪽)

제 1강. 동서 사상의 만남
제2강. 불교의 중도사상
제3강. 불광과 초능력
제4강. 독일 마인츠 Mainz 대학 국제 칸트 대회 참석 후기:
어떻게 사는 것이‘실체화’를 떠난 참다운 삶인가?
제5강. ‘장’의 개념으로 보는 불성
제6강. 현대물리학과 불교

 

 


 

 

4. 동서양의 믿음의 의미


흔히 믿음을 의미하는 말로 산스끄리뜨어 ‘쁘라사아다’ 1) (prasāda / prasädaù—the symbol of mercy)가 있다. 이 믿음은 은총 (Divine Grace), 은혜, 친절 , 자비 , 연민 , 불교의 적정 (寂靜: prasādaḥ, calmness, tranquility, composure, serenity, 온갖 고통이 사라진 참으로 고요하고 안온한 상태), 광명(光明), 청정 (clarity and purity) 등을 함축하는 그런 의미의 믿음이다.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보면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은혜가 되는 것이 너무도 많다. 공기, 물, 태양 등...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무엇인가가 나를 도와줘서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이 그렇고 우정이 그렇고... 자연 모습 하나하나가 은총이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불교의 적정이요 자비이다. 전부가 벗이요 사랑이요 연민이다. 지나가는 사람끼리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은 상대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고 또 그래야 내가 평안하고 행복하다. 
산스끄리뜨어에 믿음이란 의미에‘쓰라다’ 2) (śraddhā,trust, faith, belief, confidence)란 말도 있다. 이것은 신뢰, 신앙, 친밀, 친화, 존경, 열망 같은 것을 의미하며 불교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을 함축한다. ‘쁘라사아다’가 수동적인 (passive) 믿음인데 반하여 ‘쓰라다’는 능동적(active)으로 자신이 판단하는 믿음을 뜻한다. 그래서 쓰라다는 자칫 오염되기가 쉽다. 이것이 쓰라다의 큰 문제이다. 신앙에 faith(신앙)과 belief (신념, 믿음)이 있다. 가령 기독교 신자가 자기 신앙이 전체인양 그것을 무조건 강요한다거나 불교도가 자기 나름의 믿음이 부처님이고 전불교의 내용인양 믿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다. ‘쁘라사아다’의 믿음만이 진정한 믿음이다.
‘쁘라사아다’의 어원을 보면 ‘pra’는‘forward, onward, ∼로 향하다’를‘싸야’(śaya)는‘숙면(熟眠,
sleeping, reposing)을 의미한다. 즉 어디로 향하는 마음이 깊이 숙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숙면은 실제의 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앎을 의미한다. 갓난아기의 숙면은 일 점의 오염 없이 절대적으로 부모에게 의존된 상태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믿음은 수동적이고 절대적 편안함을 가져온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나를 그런 절대적 편안함을 주는 상태로 이끌려야 한다. 기독교에서도 믿음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맡기고 자기 생각이나 의지가 들어가지 않은 믿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진정한 믿음의 상태는 동일하다. 다른 말로 티끌만한 잡념이나 의심, 의념이 있어서는 안된다. 갓난아이의 수동적인 믿음이 절대적인 평안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권리는 선험적 (先驗的)이다. 선험적이란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 이전의 명제를 말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믿음도 일 점의 의심이 없을 때 저편의 아미타 부처님과 대화가 되는 것이다. 

 

산스끄리뜨 어원에서 살펴본 이러한 언어의 기술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저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위탁된 도구에 불과하다. 나중에는 소용이 없어서 버려야 한다. 언어에는 언어 기술이 있어야 하지만 그 목적이 달성된 기술은 버려져야 한다. 가령 강을 건너기 위하여 뗏목을 만들어 그것으로 강을 건넜는데 마지막에 가서 뗏목에 연연하여 한발을 육지에 대고 다른 한발을 뗏목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강을 건넌 것도 아니고 안 건넌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뗏목을 발에서 떼어 내어야 강을 완전하게 건너게 된다. 부처님 말씀도 이러한 뗏목에 비유되어 인류가 모두 잘사는 구원의 경지에 이르면 그말씀은 버려져야 한다. 
불교의 경전은 항상 여시아문(如是我聞)3) 으로 시작한다. 여시아문은 ‘내가 이처럼 들었노라’가 아니라, ‘나에게는 이처럼 들렸노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능동적으로 (active)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주관이나 판단이 들어가지 않고 부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즉 자기 주관이 섞이지 않은 말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무당에게 신이 내릴 때도 제일 먼저 어떤 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앞서고 뒤에 환영이 뒤따른다고 한다. 청각이 먼저이고 다음에 시각이 뒤따르는 하나의 예이다.4) 

 

5. 서양사상에서의 숫자 4의 의미
심리학자 융과 물리학자 파울리는 동시성(Synchronicity)5) 이라는 연구를 함께했다. 나중에 융은 자기가 연구한 것 만을 따로 『Synchronicity』라는 책으로 발표하였다. 그 연구에 의하면 공간, 시간, 인과 외에 동시성 등 네 개의 크로스 네트 즉 십자를 연결하여 세계를 본다. 보통은 우리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과율의 세 가지 범주를 가지고 일상생활이나 우리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이것을 하나의 법칙이라고 보고 이것 이외에 또 하나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synchronicity 법칙이라고 했다. 그런데 먼저 이것이 동서남북 네 방향을 가리키는 4수와 관계가 있어서 (아인슈타인도 4차원 공간을 얘기했다.) 4라는 수가 신비의 수로 되어 있다. 이 3과 4, 두 수 사이에는 묘한 관계가 있다. 3인 그리스어의 트리아드(triad)와 통합을 말하는 하나를 더하여 3+1= 4, 즉 테트랙티스(tetractys)6) 가 생기게 된다. 이 둘은 이처럼 중요한 관련을 맺는다. 슈레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도 공간, 시간, 인과를 넘어선 또 하나의 질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마치 철학에서 형이하학이 있고 존재를 넘어서 관계를 말하는 형이상학이 있는 것과 같다. 신학의 삼위일체도 성부, 성자, 성신의 셋 이외에 이 셋을 하나로 묶어주는 또 하나의 통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상적으로 남, 여, 사랑의 셋에 이것이 합해진 또 하나를 더하여 4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트리아드와 테트라드가 상하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럼 관찰대상 물질과 관찰자 정신 간의 괴리 내지 양극적 대립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마음과 세계가 하나인 말하자면 우리가 파악할 수 없고, 또 공간, 시간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은 존재의 질서와 형식이 있을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슈레딩거는 아인슈타인이 공간, 시간, 인과를 넘어선 또 하나의 질서가 있다고 말한 데에 큰 공헌이 있다고 하였다. 실제의 세계는 진리를 증명하거나 거짓을 입증하는 것 같은 세계가 아니다. 만일 증명되고 안 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하찮은 것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역시 슈레딩거가 한 말인데 과학자들이 뭘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즉, 어떠한 주장이 확실히 증명되지 않으면 과학적 성과로 이어질 수 없다. 증명한 많은 과학적 결과가 인류에게 여러 가지 많은 이익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만약 증명된 것만으로서 인간을 규정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참 규정이 될 수 없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살아낸 일들이 모두 증명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 시간, 인과의 범주를 넘어선 또 하나의 질서가 우리의 삶에는 존재한다. 
동시 발생(simultaneity, synchronicity)의 다른 말로서 우연한 기회(chance)란 말이 있다. 가령 길을 가다 우연히 옛 전우를 만났다면 이것은 우연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실제로 그날 어머니가 시골에서 오실 수 있다. 꿈의 사건이 실제 현실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이것을 동기성(同起性)이라고 한다. 시간상으로 앞서거나 뒤서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단지 어떤 기간(term)이 같은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믿음이란 말도 공간, 시간적인 범주에서 생각되는 그런 의지를 나타낸다면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와 준다. 가령 내가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하는 걱정은 시간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시간상으로 종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일호의 생각도 섞이지 않은 갓난아이에게는 공간, 시간이라는 의식이 없다. 그래서 갓난아이는 평화로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無)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갓난아이 상태와 같이 시간, 공간을 넘어서서 실재하는 존재의 세계가 있다. 

시간, 공간을 넘어서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다른 예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들 수 있다. 눈이 오는 날 어린아이를 통해 우리는 공간, 시간을 넘어서서 존재를 나타내는 세계가 있음을 알수 있다. 어린아이가 눈이 오는 날 ‘눈 온다!’라고 외칠 때 이것을 장(場)의 묘사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한 진행을 그 순간이라고 하는데 이 순간이 고립되거나 대상화된 것이 아니고, 나와 눈이 내리는 광경이 무의식중에 동시에 자기가 눈이 되고 눈이 자기가 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의 찰나적인 즐거움이 온다. 어린아이는 이때 마냥 즐겁다. 그냥 기뻐 밖으로 뛰어나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것은 어떤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눈이라는 대상이 있고 하는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이 순간의 장의 묘사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시간, 공간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나와 그때의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 생각하게 된다. 가령 ‘이 분필은 희다’고 말할 때 주어인 분필은 그것이 놓인 공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주체와 속성을 나
누어 그 속성이 희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시간, 공간은 우리 판단의 전제 조건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공간, 시간, 인과율에 구속된 것으로서 그런 안경을 끼고 세계를 보니까 세계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유시유종(有始有終)에 의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어린아이가 ‘눈 온다’고 즐거워 외치는 말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같은 것이 없는 판단이다. 즉 주어가 없는 무주판단(無主判斷)이다. 그러므로 그때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순수성이 사라진 세계를 볼 때는 공간, 시간이란 제한 속에서 대상을 보기 때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유시유종의 의식과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실세계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이런 시간, 공간, 인과율을 근거하여 내리는 것이다. 시간, 공간, 인과율에 함축된 그런 제한 속에서의 판단은 우리에게 즐거움이 아니라 불안을 가져와준다. 인류가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시간, 공간의 제한을 넘어서서 해방될 수 있는가를 연구해 왔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시간, 공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 발생적이고 우연한 기회 같은 것을 말하지만 이런 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종교는 이런 공간, 시간적인 제한을 넘어서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시간, 공간을 제거하고 저편의 질서를 찾는다. 불교에서는 공간, 시간, 인과 관계에서 보이는 세계를 환상(幻想, illus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환상이라고 해서 완전히 버려야 하는 허무한 것은 아니다. 환상은 한편으로 아름답기도 하지만 우리가 환상을 넘어 저편의 세계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제한하는 시간, 공간, 인과율로부터 비로소 자유스러움을 누릴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이 볼 때는 우리를 구속하는 시간, 공간, 인과율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이런 제한적 세계는 세계의 한 부분의 질서이지 이것이 전 우주의 질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를 제한하는 질서를 넘어서 이것을 재배하는 전 우주의 질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간, 공간, 인과의 질서를 지배하는 전 우주의 질서를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스러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종교는 우리를 구속하는 시간, 공간, 인과를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사는 세계가 환상과 같다는 것을 느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느끼는 세계는 엄청나게 다르다. 

 

6. 동양사상에서의 숫자 4의 의미
그러한 형상들을 보면 동양도 서양과 같이 4라는 수와 관계가 깊다. 불교에서는 색(물질)이 4대종(四大種, Four primary elements)7) , 즉 지(地)수(水)화(火)풍(風) 의 네 가지 원소에 의해 구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을 공대종(空大種)이라 한다. 그러한 공대종을 포함하면 즉 5대종(五大種)이 된다. 지수화풍에서 색(色)이 일어나고 분필을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것은 땅의 에너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공간에는 전기에너지가 있어서 무엇을 서로 비비면 불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공간에서, 땅에서, 불에서, 핵에서 오는 이러한 여러 에너지가 사대종에서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집합해 있다고 본다.
4라는 수가 기본이 된 것으로 불교에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불교는 해탈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통일 뿐이라 본다. 그 고통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무엇을 통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사성제이고 팔정도이다. 먼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의미하는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고성제(苦聖蹄), 집성제(集聖蹄), 멸성제(滅聖蹄), 도성제(道聖蹄)를 말한다. 먼저 고제란 사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이며, 집제는 그 고통의 원인이 우리의 아집에서 오는 것이고, 멸제는 그 고통을 멸하면 평온함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고, 도제란 고통을 멸하기 위한 길(수행 방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이다. 즉 고통을 벗어나 해탈하기 위한 수행 방법의 여덟 가지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 (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정견은 바르게 보기, 정사유는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는 바른말 하기, 정업은 바른 행동을 말하며, 정명은 바른 생활하기, 정정진은 깨달음을 향해 바르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정념은 바른 의식을 늘 갖는 것이며, 정정은 바른 명상을 통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4를 기본으로 하여 우리가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수행해서 고통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기본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4를 기본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서양과 마찬가지이다. 삼위일체설도 성부, 성자, 성신에 이들 셋이 합친 ‘일체’가 더하여서 4가 된다. 4를 기본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이와 같이 동양이나 서양이나 유사하다.
삼위일체와 유사하게 우리를 제한하는 공간, 시간, 인과에 이것을 합친 동기성을 더하면 4가 된다. 우리가 이런 4의 세계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속박의 현상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동서 종교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4를 기본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연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형상(Eidos)과 질료(Hyle)가 나온다. 형상은이상이고 질료는 현실, 혹은 물질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질료를 갖고 이상의 형상을 만들려 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질료를 갖고 형상을 만들려 한다. 물질 속에는 귀재를 기다리는 정신이 있다. 모든 존재는 거룩한 희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베다 경전에도 나온다. 가령 분필이나 칠판 같은 물질도 일종의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정신이 있어서 이상의 형상을 만든다. 사람이 물질에 마음을 보내면 물질이 이상적 형상이 된다. 이것이 연금술사의 심리적 종교적 사상이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부합된다.
오늘날에 보면 과거에 생각했던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인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을 집중하여 물질을 고도의 정신적 실체의 세계로 이끌 수가 있다. 과학자가 컴퓨터에 고도의 산술을 하도록 설정(formatting) 해 놓으면 컴퓨터는 인간이 하지 못하는 고도의 산술을 해낸다. 독일에서 나온 최근의 인공두뇌학(cybernetic) 관련 책을 보면 예를 들어 냉장고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 얼마 안 되는데 자동제어장치인 냉장고가 간단하게 말하면 모터와 냉동기로 되어 있는 것인데 전기에너지를 주면 모토가 돌아가면서 일정한 온도까지만 냉동시킨다. 그러면 자기 스스로가 멈추어서 더 이상 가동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것을 만들 때까지는 기계였는데 일단 만들어져 가동되면 스스로가 조절한다. 물론 전기에너지를 주는 조건이 있지만 에너지 자체가 어떤 정신성을 갖고 있다. 자동제어로 작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신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어느 공간을 막아주
고 거기에 전기를 주면 자동제어가 되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컴퓨터나 냉장고 같은 자동제어의 기계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일체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제유불성(諸有佛性)을 떠올린다. 

 

7. 공가중의 논리
마지막으로 불교에서 공가중(空假中)8) 의 논리가 있는데 이것을 나가르쥬나 (龍樹)의 중론(中論) 사상과 법화경의 방편품의 설명을 합하여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어느 존재를 생명이라고 하면 반드시 그것은 색상(色相)과 심상(心相), 신체의 세 가지의 양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가제(假諦), 공제(空諦), 중제(中諦)라 하는데 가제란 어떤 존재의 형태와 모습을 말하며, 공제란 그것의 성분을 말하고, 중제란 그것의 기체(identity)를 말한다. 가령 진달래를 예로 들면 분홍 꽃이 피어 있는 형태와 모습인가제를 갖고, 그런 꽃을 피우는 진달래 고유의 에너지인 공제가 있고, 진달래가 꽃을 피웠거나 시들었거나 진달래임에 변화가 없는 중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존재의 이 세 종류가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하지 않는 사고에서 비롯된다. 형태와 모습인 가제에도 공제와 중제가 있고, 성분을 의미하는 공제에도 가제와 중제가 있으며, 기체를 의미하는 중제에도 가제와 공제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말한다. 제법실상이란 우주의 모든 존재와 사물이 있는 그대로 진실한 면모를 보인다는 말이다. 이것도 4로 설명이 되는데 공(空), 가(假), 중(中)의 셋에 이것들이 통합해진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더하면 4가 된다. 따라서 생명의 여시상(如是相) 즉, 응신여래(應身如來)는 가제(假諦)를 의미하고, 여시성(如是性) 즉, 보신여래(報身如來)는 공제(空諦)를, 여시체(如是體) 즉, 법신여래(法身如來)는 중제(中諦)를 의미한다.

 

 

용수

 

 


1) Sanskrit Dictionary, https://www.wisdomlib.org/definition/prasada#mahayana
 Prasāda refers to “faith”, according to Mahāprajñāpāramitāśāstra (chapter 41)
 산스끄리뜨에서 Prasāda는 ‘clarity’ (평화로운 의식 상태) or‘trust’(信賴) 를 의미. 한자로는 澄淨징정. Prasāda는 faith/belief의 의미
로 śamatha (serenity or calmness)를 고취시키는 chanda (열정, desire to act)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불교 수행의 중
요한 술어로,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의 가피를 청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언급된다. Princeton Dic of Buddhism.
2) https://www.wisdomlib.org/definition/shraddha

 

3) 여시아문(如是我聞): 대다수의 초기 불교 경전은 산스끄리뜨어 ‘Evaṃ mayā śrutam’ (Pali: Evaṃ me sutaṃ) ‘Thus have I heard’
로 시작한다. ‘나는 이처럼 들었다’는 뜻으로, 아난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로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불교
용어이다. ‘Evam’ 은’thus’ or ‘in this way’, ‘maya’는by me’ or ‘by myself, ‘srutam’은 ’heard’ or ‘studied’를 의미한다. ‘쁘라사아다’
의 개념으로 보아 ‘Evaṃ mayā śrutam’는 ‘Thus, by me, it has been heard’ 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고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청취자에게 들려지는 그대로 정보나 가르침에 성스럽거나 믿을만한 존경의 의미를 부여한다.
4) 의학 연구에서 깊은 수면이나 무의식 상태로부터 의식이 돌아올 때는 청각이 먼저 활성화되고, 사라질 때는 제일 나중까지 존재하
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5) 분석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 1875~1961)과 양자물리학자 파울리(Wolfgang Pauli, 1900~ 1958)는 우연히 발생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의미 있는 사건들은 마음과 물질의 통일을 근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동시성을 확신하였다. 융은 동시성을 원형 (architype)과
집단 무의식 개념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제공하는 원리로 생각하였으며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정신적 기저를 지배하는
원동력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파울리는 심오한 통찰력을 가진 양자역학의 선구자 중 한사람으로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락과 함께
양자역학의 정통적인 ‘코펜하겐 해석’의 주요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1945년 노벨 물리상을 수상하였으며 중성 미자(neutrino)의 존
재를 처음으로 예측하였다. https://blog.naver.com/kbs4547/220473257566

 

6) Tetractys or tetrad (테트랙티스 또는 테트라드)는 피타고라스 (Pythagoras, 기원전 570년 ~ 기원전 495년)에 의하여 설계되었고,
네 개의 행에 정렬된 열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등변삼각형 모양의 도형으로 우주 생성의 순서를 나타낸다. 각 행에 하나 (0차원), 둘
(1차원), 셋(2차원), 그리고 네 개(3차원)의 점이 있으며, 테트라드는 네 번째 삼각형수의 기하학적 표현이다: T1 또는 Monad는 단일
성을 상징하며, T2 또는 Dyad는 힘을 상징하며, T3 또는 Triad는 조화를 상징하며, T4 또는 Tetrad/Tetractys는 우주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학파들에 따르면 테트랙티스는 전체 우주가 건축된 기하학적, 산술적 및 음악적 비율을 나타내며 피타고라스학파들에
신비한 의미가 있다고 알려졌다. https://symbolsage.com/tetractys-origins-and-meaning/
 불교에서 중심사상인 중도(中道)는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하는 데 피타고라스의 테트랙티스는 불교의 중요한 개념인
중도 사상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7) 『아함경』 『아비달마구사론』 등의 초기 불교 경전에 기술된 대종(大種, mahabhuta, primary elements)은 보편적 존재, 기본 존재 또
는 근원 존재라는 뜻이며, 4대종(四大種):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은 각각 견고하고(堅性) · 습하고(濕性) · 따뜻하고(暖性) · 움직
이는(動性) 성향으로 분류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4대종을 다 갖추고 있는데, 여러 조합에 의해 어느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물질의 현재 상태의 본질적 속성(自相)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물은 습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물질이지만, 낮은 온도로 견
고성이 두드러질 때 얼음이 되거나, 혹은 끓는 물, 혹은 증발하여 기체로 되기도 한다.
 https://abc.dongguk.edu/ebti/c2/sub1.jsp, https://ko.wikipedia.org/wiki/색_불교

8) 공가중(空假中)의 논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802, 
 중도의 여러 가지 설 가운데 초기불교의 중도설, 용수 중관파(中觀派)의 팔부중도설(八不中道說), 천태종의 삼제원융관(三諦圓融
觀)에 의한 중도가 있다. 초기불교의 중도설은 팔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지탱되는 불교의 가장 근본 입장이고, 팔부중도
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생(生)·멸(滅)·단(斷:끊어짐)·상(常:항상함)·일(一:같음)·이(異:다름)·거(去)·내(來)의 여덟 가지 잘못
된 견해(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하여 그대로의 실상(實相)의 도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천태종에
서는 삼제원융관의 중도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밝히고 있다. 삼제는 진제(眞諦)로서의 공(空), 속제(俗諦)
인 가(假),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진리인 중(中)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삼제설은 중국의 지의(智顗)가 제법의 실상은 공 · 가 ·
중이 서로 원융(圓融)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공제는 진리의 측면에서 이 세상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공이고, 가제는 세
속의 측면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중제는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입장에서 제법의 실상을
중도의 입장에서 진리를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가의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번뇌가 많은 세계이나 그 거짓된 모습을 파헤쳐
공(空)임을 깨달을 때, 중도(中道)가 그곳에서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중은 상대적인 상황에 있는 진과 속을 가장
분명하게 이어주는 것이므로 이 셋의 관계를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고 한다. 『불교학개론(佛敎學槪論)』(김동화, 보련각, 1980) 
 중도(中道)는 열반경에서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불성 비유비무 역유역무 유무상통 시명중도(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
無相通 名爲中道,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이
름하여 중도라고 한다. 涅槃宗要 (Vol. 38, No. 1769 元曉撰), 大般涅槃經 (Vol. 12, No. 0374 曇無讖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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