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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4. 9,10월호] 불교와 서양사상 V - 글 이원익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11.04|조회수11 목록 댓글 0

 

 

부루나 칼럼 Ⅰ

불교와 서양사상 V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8. 정신분석학과 불교

정신분석과 불교는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으며 특히 선불교와는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 둘 다 마음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집착’이 얼마나 큰장애를 일으키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일상의 정신적 고난을 벗어나 고통의 소멸로 나아가려고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정신과 의사, 의학자, 생리학자, 심리학자,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랍비를 많이 배출한 유태인 집안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법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37세 때에 정신 분석의 이론 개발에 착수해 1899년 <꿈의 해석>을 출판하였으며 훗날 나치의 탄압이 가해지자 영국으로 망명하여 살다 죽었다.

 

프로이트

 

그는 거의 모든 이론을 성적욕구와 연관 지어 설명하였으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 그리고 무의식을 발견하였다. 이는 불교의 유식학과 비슷하다. 그는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인 것으로 통합한 합리주의의 완성자이며 정신분석이 강조하는 치료는 불교의 구원과 통한다.  불교와 서양 심리학의 가교자라고 불리는 프로이트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왜 우리의 마음은 고통을 받는지’,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해답을 모색했다. 그리고 붓다와 마찬가지로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다만 붓다는 마음의 본질이 무아이며 비어 있음을 통찰하라고 가르친 반면 프로이트는 마음속의 욕망과 도덕심 그리고 이 둘을 조정하는 자아, 이 세 요소의 균형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았는데도 기독교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을 그가 애독한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에서 찾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인간의 삶을 불교의 공, 노자의 무와 비슷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직접 불교를 접하고 공부한 것 같지는 않다.
- 정신이란 빙산과 같다. 정작 보이는건 1/7도 안된다.
- 30년간 연구했음에도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은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 무의식이 인간 행위의 진정한 장소이다.
 주요저서 : ≪히스테리 연구≫ ≪꿈의 해석≫

 

칼융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
스위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칼 융은 바젤대와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해 정신과 의사
가 됐다. 그는 심리학 연구를 하면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연구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불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했다. 또 만다라를 이용한 심리치료 등으로 획기적인 심리이론을 정립했다.
콤플렉스 심리학, 분석심리학의 선구자이다. 무의식을 개인주의적, 생물학적으로 해석하지 않고집단적, 역사적으로 해석하였다.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 무의식이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하였는데 이는 아비달마 불교의 심식설을 연상시킨다. 그는 다양한 불교사상 주석서를 발표한 바 있다. 스는 불교를 깊이 연구했으며 불교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해석은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과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 주로 의식세계의 성적인 억압에서 형성된다고 한 것과 달리 융은 발생론적으로 볼 때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개인 무의식이 발생 하고 그 이후에 의식이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유식불교의 삼전변설(三轉變說)에서 제8아뢰야식으로부터 제7말나식이 나오고 그 이후에 안·이·비·설·신·의 전육식이 나온다고 한 점과 상통한다. 경험의 억압 등에 의해 형성되는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모든 인간의 태어남과 동시에 지니고 나오는 보편적인 심리적 원형이 그가 탐방했던 원시종족의 원시 심성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 나는 저 위대한 인류의 스승 붓다가 인간 세상의 고통과 노, 병, 사의 고통에 관해 가졌던 견지와 방법을 배워 알도록 의사로서의 자신을 부추긴다.
- 서양은 하나의 새로운 병인 학문과 신앙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냈지만 동양에서는 종교와 학문 사이의 갈등이 없다. 
- 두 성격의 만남은 두 화학물질의 접촉과 같다. 반응이 있으면 둘 다 변형된다.
 주요저서 : ≪무의식의 심리학≫ ≪기억, 꿈, 사상≫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 1901~1981)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이자 구조주의 철학자, 정신과 의사이다. 프로이트의 사상을 이어 받아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재해석, 인간의 갖가지 욕망이나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이 철학, 문학, 예술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동양사상에서 영감의 원천을 발견, 이원론적 이성철학의 한계를 불교의 연기론으로 극복하고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원론적 이성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무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노장사상이나 연기론적 입장에 근거해 무아의 법리를 강조하는 불교사상에 흥미를 가졌으며 불상 조각의 미를 극찬한 바 있다.
욕망과 진리에 대한 불교의 변증법적 사고가 자신이 개념화한 욕망이론의 핵심이라고 설명하였
다. 라캉에 의하여 정신분석헉은 명확한 이론화에 성공하였으며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세 고리를 통해 무의식적 욕망을 설명하는 라캉과 불교의 사상에는 많은 닮은 점이 있다.
- 자아는 진정한 주체가 아니다.
- 사랑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 현실은 불가능하다. 
 주요저서 : ≪에크리≫

 

 

9. 과정철학 및 분석철학과 불교 
과정철학(유기체철학)이란 변화와 발전을 갖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밝히는 철학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후 철학자들은 영원한 본질에 근거하여 참된 실재를 영원한 것으로 가정, 과정이란 영원한 본질에 거부되거나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유기체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면서 창조적 과정에서도 서로가 협력적 유기적 의존 관계속에서 완전을 향하여 가는 과정적 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순수하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고 현실의 존재는 물론 추상적인 것들까지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였다.
분석철학은 철학 연구에서 언어 분석의 방법이나 기호 논리의 활용이 불가결하다고 보는 철학이다. 특정한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토대로 하여 고정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고 철학하는 방법이 논리적·언어적 초점에 맞추어진 학파를 지칭한다. 20세기부터 진술의 언어적 정확성과 이를 위한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의 사용을 주장하며 나타나기 시작한 분석철학은 주로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실존주의나 현상학, 막시즘 등과 같은 대륙 철학과는 대조적인 조류를 이루었다. 

 

 

화이트 헤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이며 수리 논리학(기호논리학)의 대성자이다. 그의 과정철학은 과정신학자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남부의 켄트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로 사립학교 교장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역사·종교·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을 함양시켜 주었다. 188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였으며, 이어 장학금 연구원으로 선발되었고, 강사가 되었다. 1910년에 런던 대학교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기까지 버트런드 러셀과 10년간에 걸쳐 협력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논한 고전 <수학 원리> 3권을 완성하였다.
 1924년 63세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담화의 명수였으며, 그의 집은 계속 찾아드는 학생이나 동료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또
전 생애에 걸쳐 사회와 정치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졌다. 1947년 미국에서 죽었다.
 헤라클레이토스를 비롯하여 화이트헤드와 같은 철학자들은 존재의 물리학과 생성의 물리학을 구별하였다.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원리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원리이지만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철학에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발견한 진리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 [一切衆生 悉有佛性]. 화엄 불교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상은 바로 화이트헤드의 존재 원리의 요약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양철학 : 주류 (이원론, dualism)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아퀴나스(Aquinas) 등
 비주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유브리데스(Eubrides), 에크하르트 등

동양철학 : 서양철학과 주류, 비주류가 반대

- 고정 불변하는 실재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철학적 개념(또는 안목)만으로 이해되는 우주는 진정한 우주가 아니다.
- 내 사상의 고향은 아시아이다. 
 주요저서 : ≪수학원리≫ ≪과정과 실재≫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출생한 유태계로서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을
다룬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이다. 세계를 마음의 산물이자 연기론적 관계로 파악하였다.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아무도 문제라고 보지 않는 것을 문제로 인식,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로 평가된다.
제철업을 하는 갑부 집안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에는 브람스 등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의 경향을 보였다. 두 형제가 자살하였고 자신도 자살충동이 가끔 일었으나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계공학을 배우고 항공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화이트헤드의 <수학원리>를 읽고는 수학에 흥미를 느껴 영국 케임브리지의 러셀에게 가서 논리학을 배우고 친한 사이가 되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회의가 들어 대학을 떠났다. 그 후 이때까지의 모든 철학적 문제를 자신의 언어 그림이론으로 해결하고 평정하였다고 느껴 유산도 다 기부해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시골 국민학교 선생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몇 해 뒤 자기가 현지에서 겪은 바로 자기의 이론에 문젯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갔고 이후 게임이론을 발표하였다. 런던에서 62세에 죽었다.
그는 청년기에 발표한 그림이론과 장년기에 발표한 게임이론으로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언어의 게임이론은 나가르주나의 중론 사상과 유사하다. 그는 장년에 자신의 청년 시절 이론과 러셀의 철학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나가르주나가 아비달마 철학을 비판한 것을 연상시킨다. 그는철학적 언어의 형이상학적 사용을 일상적 사용으로 돌려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이론도, 나가르주나의 공개념도 모두 형이상학에 사로잡힌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치료제라고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적감각에 대하여 그랬던 것처럼 중관철학도 다르마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 자기의식이란 개념 자체가 삶과 무관한 허구적인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 보일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다. 주요저서 : ≪논리철학논고≫ ≪철학적 탐구≫

 

 

아소카 왕의 돌기둥

 

 

10. 나가며
위에서 대략적으로 훑어보았듯이 동양과 서양은 지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멀리 가까이 떨어져
있었으나 결코 혼자서 따로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사뭇 옛날에도 그러하였고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다만 정도의 차이, 속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이러한 상호 교류와 영향력 주고받기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옛 생각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편의 문화나 정신적인 업적에 대해 맹신하며 배타적인 우월감을 갖거나, 그 반대로 자기 편에 대한 지나친 열등감이나 상대편에 대한 눈먼 선망을 갖고 있다면 역사와 세계를 대하는 기본이 잘못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특히 이 자리를 빌려, 혹시라도 자기의 종교만이 최고라며 공격적인 선교로 상대를 말살
하려는 종교인이 아직도 있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도 적었듯이 그 옛날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대왕을 다시 불러 모셔야겠다. 수많은 생명들에게 고루 진리를 수레바퀴를 돌리고자 했던 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제국 곳곳에 세웠던 돌기둥에는 이런 글귀가 남아있다.
 “자기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그것이 눈먼 충성심에서 나왔
든 제 종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든 결국 자기 종교에 더 큰 해악을 끼칠 뿐이다. 
 조화가 최선이라, 모두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도 귀를 기울이고 서로 존경하도록 할지라.” 

- 불교와 서양사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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