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꼰대
글 덕일스님(법보선원장)
덕일스님은 해인사에서 원인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다. 출
가후 10년간 봉암사, 수도암 등에서 수행하였다. UCLA에서
지난 2015년부터 학위과정을 시작하여 2024년 6월에 ‘중국
어 번역본 의족경(義足經 )과 빨 리 어 본 앗 타 까 왁 까
Atthakavagga의 비교 연구 및 완전 주석 번역’으로 철학박
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4월에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법
보선원장에 취임하였다.
한때 한국에서는 ‘꼰대’라는 은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당시 젊은 세대들이 기성 세대들을 비판하며 썼던 용어입니다. 즉, 그들의 눈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젊은 세대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죠. 이제 50대 중반의 스님인 저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대학교 수업에서 9급 공무원 시험에 몰려들었던 당시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대학은 학생들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장이 되어야 하고, 대학생들은 많이 방황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먹고 살 길을 찾아 고단하게 살아가던 한국 학생들이 제 말을 들었으면, 저는 현실과 유리된 너무나도 이상적인 가치관을 가르치려는 꼰대로 보였을 겁니다. 저의 이런 주장은 386으로 불리던 연배가 대학생활을 할 때에 형성했던 개인적인 가치관을 일반화해서 30여년이 지난 지금 세대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찰이 저에게 특히 뼈아팠던 이유는 바로 제가 좋아하던 경전인 금강경의 주제가 고정관념의 극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에서 수보리 존자가 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 가짐에 대해서 여쭙고, 부처님께서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보살이 상(相)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상’이란 산스크리트로는 ‘상즈냐(saṃjñā)’ 혹은 빨리어로 ‘산냐(saññā)’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앞 부분인 ‘상(saṃ)’은 ‘많은 것을 모은다’는 뜻이고 ‘즈냐( jñā)’는 ‘안다(to know)’는 의미입니다. 즉 ‘상(相)’이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모인 정보를 사람의 뇌가 효율적으로 분류하여 만든 인지 체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골든리트리버, 치와와, 진돗개 등 다양한 품종의 개들을 보고서 개라고 인식하는 데에는 우리 뇌 속에 ‘개’라는 상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개와는 다른 고양이를 분명히 구분해 냅니다.
상(相)은 한편으로는 오온 (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중에서 다른 정신적인 활동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작동합니다. 즉, 상은 자신의 감각기관에 들어온 정보를 특정한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인지(識) 하게 하며, 더불어 감정(受)을 불러 일으키고 또 의도(行)를 촉발시키며 우리의 정신을 지배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 자신의 발바닥을 아랍인들에게 보였다면, 아랍인들은 모욕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모욕을 준 사람과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이어지겠지요. 발바닥이 몸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랍인들에게 형성된 문화적인 상은 이렇게 그들의 감정과 의지와 함께 작동합니다.
이 상(相)은 인간이 진화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상이라는 인지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똑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며 에너지를 낭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뇌가 세상을 단순화시켜서 상이라는 형태의 시냅스의 연결망을 만들게 되면, 비슷한 상황이면 그 상이 개입하여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빠르게 인지하고 대처하게 합니다. 그래서 뇌는 상을 통해서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 할 필요가 없이, 주어진 에너지를 더 가치 있는 곳에 쓸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상이 없이는 인류가 지식을 축적하고 문명을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相)도 우리가 그 상의 속성을 잘 알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면, 우리를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금강경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무상하여 계속 바뀌고, 그런 흐름에서 각자의 마음 속에 만들어진 상들 또한 무상한 것인데, 우리는 이 상들을 마치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양 여겨서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상의 무상함은 앞에서 다룬 발바닥에 대한 상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는 다리를 꼬고 앉아 상대방에게 발바닥을 보이는 것이 아무런 터부가 되지 않습니다. 상은 이렇게 문화에 따라 판이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18세기 조선에 서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상이 아주 강력하게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은 21세기 한국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금수저와 흙수저의 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러한 상의 속성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상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을 독특한 논리 구조로 반복하여 전달합니다. 즉, “A는 A가 아니라, 이름하여 A라 한다”는 형태의 가르침이 거듭되는데, 이는 “A는 A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아니라 단지 이름하여 A라 하는 ‘상’일 뿐이다”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경 제 25분에 “범부자 여래설 즉비범부 시명범부凡夫者 如來說 卽非凡夫 是名凡夫”라는 구절은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범부라는 변치않는 실체가 아니고 이름하여 범부라 하는 상일 뿐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그런 상들에 집착하여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죠.
사람들은 대부분 젊을 때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상으로 평생을 삽니다. 그 후에는 어떤 충격적인 경험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회의 변화가 적고 느렸던 과거에 맞춰진 사람의 일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21세기에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회 문화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기성 세대가 젊었을 당시 만들었던 상들은 너무나 빠르게 그 쓸모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세상의 변화에 뒤쳐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삶에서 ‘고정관념의 극복’이 무척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조기 퇴직이 많은 세대일수록 삶을 길게 보고 평생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상으로부터의 자유’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 옵니다. 우선 자신의 인식체계를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상들이 무상한 세상속에 만들어진 무상한 것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연한 사고로 새롭게 변하는 세상에 대해 늘 지적인 호기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속된 표현으로 정리해보면, 평생 꼰대가 되지 않고 변화된 세상에서 늘 새로운 상을 자유롭게 만들어 쓰라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