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삼세
불교의 과학, 철학적 만남③
제2강 불교의 중도사상 (상)
글 전 동국대 교수 김용정 박사
1981년 볼티모어 성불사 강의록에서
제 1강. 동서 사상의 만남
제2강. 불교의 중도사상
제3강. 불광과 초능력
제4강. 독일 마인츠 Mainz 대학 국제 칸트 대회 참석 후기:
어떻게 사는 것이‘실체화’를 떠난 참다운 삶인가?
제5강. ‘장’의 개념으로 보는 불성
제6강. 현대물리학과 불교
1. 중도의 개념
오늘은 불교의 근본 사상인 중도(中道)에 대하여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불교사상에서는 흔히 중도를 말하고 중국 유교에서는 중용(中庸)에서 중용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중도와 중용은 다르지만, 여하튼 동양사상이 중도 (中道), 중용(中庸), 중론(中論), 중관(中觀) 등에서 가운데 중(中)자를 많이 쓰고 있다. 장자(莊子)의 응제왕(應帝王)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중앙(中央)의 황제인 혼돈(chaos)으로부터 북해(北海)의 황제와 남해(南海)의 황제가 큰 은혜를 입어서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둘이 상의한 결과 혼돈인 중앙제가 갖고 있지 않은 감각기관 오관(五官: 眼耳鼻舌身)−불교에 서는 여기에 의식작용인 의(意)를 넣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주장함−을 중앙제에게 만들어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혼돈인 중앙제가 우리와 같이 눈·귀·코·입·몸의 감각기관을 갖게 되었다. 혼돈이 감각기관들을 갖게 된 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티를 벌였는데 이미 이때 혼돈은 죽어 없더라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자연의 실상은 ‘혼돈’인데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해, 눈으로 보아서 어떤 존재가 개체적으로 어떤 존재가 있다[有]는 생각이 일어나서 그 것에 대한 탐욕이 생기고, 그것을 갖고 싶은 소유욕이 생기게 된다. 원래 자연의 진[眞, 참]존재인 혼돈은 이것저것, 나와 너, 나와 자연 등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인데 분리하는 마음이 생기는 분별지가 감각기관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설명은 붓다나 노자나 장자나 다 유사하다. 이처럼 동양 사람들이 분별적으로 보는 생각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나 생각해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어 불교 행사에서 항상 독송하는 반야심경에 무(無) 안이비설신의라고 나온다. 이처럼 혼돈인 원래 자연의 실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한 분별지로 인하여 존재가 따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가짜의 세상이 나타난다. 장자의 이 응제왕 편 이야기는 간편하지만, 실상의 세계를 말해주는 좋은 비유(analogy)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후 다섯 비구를 만나 최초로 설법하신 내용1)이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이다.2)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말씀이셨다.3) 말은 보통 ‘이다/아니다’,‘있다/없다’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인 이단법(二段法)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이분법을 사용하지 않고 항상 삼단 논리인 삼단법(三段法)을 사용한다. 세상을 유/무(有無)의 두 극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비유비무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두 극단이 부정되는 논리로 본다. 이것이 바로 오늘 강의하려는 중도의 개념이다.
2. 불교의 제행무상과 플라톤의 장 이론
불교의 근본 교리를 이루는 세 가지 진리를 삼법인(三法印)4)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이중 제행무상이란 모든 현상은 잠시도 정지하지 않고 변화하므로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행(行)이란 행동을 의미하기보다 조작한다5)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조작된 것은 상주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장자에서 혼돈에게 감각기관을 만들어 주었다는 비유와 같이 우주의 진 실재의 세계는 혼돈인데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하여 하나의 개체가 존재한다는 지각이 일어나므로 이렇게 본 존재는 실은 감각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지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자연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다. 불교에서는 자연을 누구의 창조가 아니라 항상 만들어지고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본다.
이 세계를 만들어져 가는 과정(process)으로서의 진행만 있는 것으로 보아, 영어로는 발생하기 (happening), 되어가기(becoming), 사건(event)과 같은 용어로 설명된다. 여기서 사건이란 것도 그냥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변화하는 진행과정으로서의 사건을 말한다.
서양 사람이라고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현대 과학 철학에서도 많이 읽히고 있는 그의 대화편인 티마이오스(Thimaios)6)편을 통하여 그의 우주론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리스어로 코라(chora)7)는 영어로 광경(spectacle)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공간(space), 장소(place), 장(field)으로 번역되었다. 즉 공간의 뜻도 되고, 장소란 뜻도 되며, 장(場)이란 뜻도 된다. 이런 용어로 자연이 설명되는 방법을 한마디로 ‘장에 의한 기술 방법’이라고 한다.
비가 온다(It rains), 눈이 온다고(It snows) 할 때 영어 문장에서 주어가 동사 자체에 들어가 있으니 주어가 필요 없는데 왜 주어가 들어가는가? 치통(toothache), 두통(headache)과 같은 의미의 영어낱말을 보면 명사 속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주어+술어’로 표현되는 구성체이므로 우리의 언어생활에는 술어 없는 주어가 있을 수 없고, 주어 없는 술어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주어+술어’의 언어의 특성 때문에 할 수 없이 형식을 갖추기 위하여 날씨를 표현하는 말에 가주어 it가 등장하고, 통증을 표현할 때 동사 have를 사용하여 I have a toothache(headache)와 같이 표현한다. 영어의 시간 hour라는 말이 원래 그리스 말로 ‘계절’이
라는 말이었다. 인도네시아 같은 열대지방에서는 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아 계속 자라기만 하고, 원주민들은 보통 나이를 모른다고 한다. 확실히 시간 인식은 변화에서 오는 것인데 여기에서 공간 시간 문제가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진실한 실재와 만남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플라톤은 고민 끝에 ‘코라’라는 말로 제일 먼저 ‘장’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묘한 것이 발견된다. ‘비가 온다, 눈이 온다, 바람이 분다’와 같은 자연 현상을 나타내는 말들은 모두 무주판단(無主判斷)이란 것이다. 주어가 없는 말들이다. 플라톤은 자연의 진실과 만나는 표현을 하기 위하여 어떤 개체를 딱 떼어서 주어화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면 속에
내가 들어가서 발생하고 있는 (happening) 어떤 운동을 목격하고 그때의 장면을 묘사해야 말이 되지, 어떤 한 개체가 주어가 될 수 없음을 파악했다. 치통, 두통과 같은 낱말은 아프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이 먼저 지각되므로 주어를 넣기가 애매해지고 그래서 주어를 피하려니 치아라는 장소, 혹은 머리라는 장소에서 지금 아프다는 지각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주어를 내세우기 애매한 표현으로 ‘장 이론’을 도입하여 전개했다. 이와 같은 장이론의 도입은 오늘날의 양자역학8)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현대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뉴턴의 절대공간이란 개념도 플라톤에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유(有)를 떠나야 함을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진실한 세계와 만나려고 하니까 이런 도입을 하게 된 것이다.
3. 불교의 삼법인과
용수의 중론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 행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조작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한자어 행(行)이 ‘행동(behavior)하다’라는 행위(act)를 나타내는 말인데, 실은 이것이 어떤 개체의 물적 실체성을 떠나서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happening), 우리의 지각에 의하여 조작되어 가고 있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발생하고 있는 어떤 사건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상(無常)할 수밖에 없다. 계속 변화하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개체라 하면 개별적인 존재(individual entity, self)가 다른 것과 달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른 말로 실체(substance)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여기 분필이 따로 있고, 칠판이, 내가, 타우슨 대학이, 모든 개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각각 명사를 붙여서 그 개체 명사를 주어로 놓고, 즉 분필은 희다는 둥, 술어를 붙이는 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판단이 진실한 실상이 아니고 모두 변화하는 가짜이므로 (제행무상), 자아라는 실체도 없고(諸法無我), 이것을 깨달아야 궁극적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체의 잡념과 망상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용수(龍樹, Nāgārjuna, c.150-c.250)의 중론 사상을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중국의 종파가 삼론종(三論宗)9)
이다. 삼론종의 『삼론현의(三論玄義)』10)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개체가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이 유(有)인데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개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니 유에 집착하고 사는 사람은 병이 든 것이다. 그런데 유를 치료하는 약이 있으니 그 치료 약이 공(空)이라고 한다. 공은 용수가 쓴 『중론(中論)』1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용수가 말하는 공의 근거는 사물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 즉 일체는 무자성(無自性)이므로 공하다(無自性 故空)12)
라고 설명한다. 공(空)이라는 약(藥)을 통해 ‘있다’고 하는 생각 없어 졌다면 병(病)이 없어진 것이다. 병이 없어졌다면 약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이러한 말을 상즉상입 (相卽相入)13)
이라 한다. 즉 논리적으로 보면 유(有)를 떠나 공(空)이 있을 수 없고, 공을 떠나 유가 있을 수 없다. 병이 있어 약이 있고 약이 있으니 병이 있다. 이처럼 약과 병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용수의 중론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상관관계 논리형식이 전개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유명한 비유 중의 하나이다: 1) 연료와 불이 동일한 것이라면 기체화 작용이 하나로 된다. 2) 연료와 불이 별개의 것이라면 결국은 연료가 없이도 불이 존재한다. 이 말은 연료와 불이 동일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별개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보통 우리는 연료와 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개가 별개의 개체로서 각각이 독립된 실체(substance)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연료 떠난 불이 어디 있으며, 불 떠난 연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한자로 탈 연(燃)이고 신(燊, 성한 불꽃)일진대, 탄다는 것이 불이 없이 어떻게 탈 수 있는가? 이것은 논리 형식을 구체화해서 요소를 집어넣으면 이렇다는 말이다. 여기 분필과 사람의 관계에도 분필이라는 지각상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그 지각을 떠나서 분필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말은 우주의 어떤 삼라만상도 상호관계이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주의 삼라만상 어떤 의식 현상도 서로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따로 떼어 놓고 그것을 집합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럴진대 별개의 따로인 존재라 할 수없다. 이처럼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이런 논리를 불교의 이중부정(二重否定)이라고한다. 형식 논리에서는 만약 p → −p이고 –p →−−p라면 이건 도로 p → p가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이중부정 형식이 되니까, 이것도 부정되고 저것도 부정이 되어서 둘이 합이 되는 것이다. 즉 변증법적(辨證法的)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이다.14) 즉 정이 있고 반이 있고 합이 있다. 그런데 불교의 변증법은 부(否)와 부(否)의 두 개가 있고 이것이 합이 되는 변증법이다.
요새 서양에도 ‘술어 논리’라고 하여 주어를 도저히 밝힐 수 없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도 하느님의 실재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문제는, 물론 언표로 불가능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아무튼 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어가 없는 말, 즉 플라톤이 말한 ‘눈이 온다’고 할 때 사실은 눈이 주어가 아니고 ‘눈온다’는 술어만이 있다. 실제는 눈이 오는 광경 (spectacle) 즉 ‘장면’만이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장’의 개념을 도입하여 주어 없는 말들을 설명한다. 불교에서도 주어가 사실은 있을 수 없다. 원자론자들도 주어를 찾아 atom이다 particle이
다 electron이다 neutron이다 하고 찾아 들어가 보았지만 계속 입자가 쪼개져 나가니까 주어가 되는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주체(subject)를 찾을 수 없다. 계속 우리는 그 주어를 찾아 추적해 들어가고 있지만, 양자역학이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서 이미 주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이젠 부트스트랩(bootstrap)이니 하는 반대 이론들이 나오고 있다. 주어가 무엇인지 모르니 그것을 X라고 할 때, X를 f라고 한다면 그‘X는 g다’ 이런 식으로 가언명제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주어가 X인데 그 X를 f라고 한다면[눈이 온다] 그 X는 g이다[눈온다] 이니, 주어 X가 f나 g가 되어 항상 술어로 내려간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하는 언어는 주어를 먼저 아무 가정없이 정언적으로 놓고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주어를 말하는 술어를 놓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술어논리를 전개하는 사고가 등장해 지금 많이 상용되고 있다.
4. 중국의 중관파
불교에서 공(空)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이것은 아니다’라는 술어이다. 중국어로 번역된 중론에서 모든 인연으로 생긴 것(제법) 이것을 바로 무(無)라고 설한다. 이들은 공(空) 대신 무(無)라고 했는데 후에 공이 된다. 인도불교에서 시작된 불교사상의 여러학파의 발전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부파(有部派): ‘나’라는 개체가 있고 대상의 존재도 따로따로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안경은 어떻다’라는 식의 주어+술어의 명제로 판단하는 학파이다.15)
2) 경량부파(經量部派): 대상은 없고 대상의 표상(idea)만 있다고 보는 견해 이다. 가령 분필을 예로 들면 분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필이라는 아이디어 즉 표상만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16)
3) 유식학파(唯識學派): 표상도 없다. 분필을 예로 들면 분필이라는 지각상도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있는 것은 단지 반짝이는 마음만이 있다.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와 관련된다.
4) 중관파(中觀派): 그러한 마음까지도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학파가 발전해 내려오는데 이런 경로를 보통 사람들도 반드시 거치게 된다. 처음엔 나도 대상도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보다가 살면서 경험을 쌓다 보면 또 공부를 좀 하다 보면 결국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지각상인 표상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표상도 사실은 마음의 작용에서일어나는 것이니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서 표상도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구나’ 하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중관파에게서는 그 마음도 없다고 하니, 대상도 없고 보는 마음(주관) 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관파에게서는 유와 무가 동시에 부정된다.이것이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1)붓다가 깨달은 후 처음으로 제자가 된 다섯 명의 비구, 즉 교진여(Koṇḍañña), 아설시(Assaji), 마하남(Mahānāma), 바제(Bhaddiya), 바파(Vappa)를 상대로 녹야원에서 최초로 법을 설한 고락(苦樂)중도는 빠알리 문헌에서 상윳따니까야의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SN 56:11)에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중도’(中道, majjhimā patipadā, Middlw Way)로, 즉 팔정도(ariyo atthangiko maggo, Noble Eightfold Path)를 추구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초기 불교의 중도로는 이른바 ‘고락(苦樂)중도’,‘유무(有無)중도’등이 알려져 있고, 고락 중도는 팔정도를, 유무 중도 등은 십이 연기를 가리킨다. 이어서 붓다는 사성제를 강조하였다. https://blog.naver.com/3sang4/40096947291
2) 유무(有無)중도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 곳따 경》에 제시된다:'모든 것은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나여, 이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中에 의해 법(Dhamma)을 가르친다’(SN12:15).
3) 열반경에서 중도(中道)는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불성 비유비무 역유역무 유무상통 시명중도’(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相通 名爲中道,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이름하여 중도라고 한다. 『涅槃宗要』(Vol. 38, No. 1769 元曉撰), 『大般涅槃經』(Vol. 12, No. 0374 曇無讖譯))
4) 삼법인(三法印,tilakkhaṇa, Three marks of existence)은 불교의 기본적 입장인 3가지 특징(ti는 3을, lakkhaṇa는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써, 붓다의 가르침의 진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초기 불교에서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Anicca), 일체개고(一切皆苦, Dukkha), 제법무아(諸法無我, Anatta)를 가리킨다. 후에 대승불교권에서 일체개고를 ‘열반만이 모든 고통이 사라진 고요하고 안온한 상태’라는 뜻인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대체하여 ‘삼법인’으로 삼거나 또는 초기 불교의 삼법인에 열반적정을 추가하여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하였다. 고따마 붓다는 이 현실 세계는 모두 고(苦)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여, 고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변화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는데 그것을 실체라고 집착하려 하는 데에 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설하였다.
5) ‘조작하다’는 지어서 만드는 造作을 의미한다(지을 조(造), 만들 작(作), fabricate). 행(行)은 범어 삼스카라(saṃskāra)의 역어로, '만
드는 것'(造作)과 '이변(異變)하는 것'의 뜻이 있는데, 12연기(十二緣起)의 제2행(行)은 전자, 즉 업(業)의 뜻이고, 제행무상이라고 할 때는 후자, 즉 모든 현상을 말한다. 유위(有爲, 산스끄리트어: saṃskrta, 빠알리어: savkhata, 영어: created, formed, conditioned)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조작된,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조작되는 모든 현상,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6) 티마이오스는 기원전 360년경에 쓴 플라톤의 대화체로 쓰인 저작으로, 우주, 인간, 혼과 몸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7) 플라톤은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 세계의 형상(Form)이며 현상 세계의 객체(Object)는 Idea의 모상(模相 Copy)이라고 하고 이분법으
로 갈라놓은 상이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코라(Chora)라고 했다.
8)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란 말은 1924년 독일 이론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이 처음 제시했다. 보른은 "
양자역학, 특히 파동 함수의 통계적 해석에 대한 기초 연구"로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확실성이 아니라 확률이 전자 측정을 지배한다고 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양자역학의 양자는 물리량에 기본 단위가 있으며, 그 기본 단위의 정수배만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매우 작은 전자나 원자 같은 입자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기본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양자역학이란‘힘과 운동’의 이론으로, 떨어진 양으로 있는 기본입자가 미시규모에서 어떠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다.
9) 삼론종(三論宗)은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용수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그리고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 · Aryadeva: 170-270)의 『백론(百論)』을 소의 경전으로 삼는 중국 불교의 논종(論宗)으로 반야공(般若空)의 사상을 교리의 근간으로,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계(中觀系)에서 시작되어 중국에서 크게 번성한 종파이다.
10)『삼론현의』는 삼론종(三論宗)을 대성한 수나라(隋: 581~618)의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吉藏: 549~623)의 저서로 삼론의 요점
을 모아 597년경에 저술된 이 책은 팔부중도(八不中道)를 강조하는 파사(破邪)와 현정(顯正)이라는 이문(二門)의 구조로 되어 있다.
‘파사현정’이란 개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이후 ‘그릇됨을 버리고 올바름을 행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11)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은 용수가 만든 449구의 간결한 게송인 『중송(中頌)』(Madhyamaka-kārikā)에 청목(靑目: 4세기)이 주석을 달아 27장으로 구성된 인도 불교의 논서이다. 불교사상에 남긴 업적은 공가중( 空假中)의 논리이며 이것은 대승공관(大乘空觀)의 입장에서 초기 불교 이래의 연기설(緣起說)에 새로운 해석을 내려, 모든 것이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의 변증법적인 논리의 구현과 동시에 통일의 논리를 보인다.
12)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 법(法: 존재)을 공하다(空)’고 나는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
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中論 T1564_.30.0029c04-06: 龍樹菩薩造, 三藏鳩摩羅什譯, 觀如來品第二十二T1564_.30.0033b11-18: 是物屬衆因縁故無自性。無自性故空。空亦復空。但爲引導衆生故。
13) 화엄경에서 이르는 10가지 걸림 없는 무애(無碍)의 표현으로 상즉무애와 상입무애를 간추려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표현한다.
상즉상입(相卽相入): 相卽은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 相入은 일중일체 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본질은 같다는 평등을 의미한다.
14) 용수의 『중론』은 언어가 갖는 필연적 허구성을 ‘공(空)사상’으로 정밀하게 풀어내어 날카로운 논리로 언어의 모순을 지적하여 ‘있음
(有)과 없음(無)’ 등의 양극단을 부정하는 논법 형식으로 인도,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 서양 철학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불교 논서 중 하나이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삼단논법인 정반합(正反合)의 시원은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에서 전개된 논리이며, 제바의 『백론』에서 추론된 불교의 통합 논리로 알려져 있다. (『중론(中論) ·백론(百論)』, 동국역경원, 1993, p. 7)
15) 불교의 여러 부파(佛敎諸部派) 중에서 가장 유력했던 것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일체의 법, 즉 5온(蘊)·12처(處)·18계(界)라 하
는 것과 같이 각자의 법의 체계를 의미하며 줄여서 유부(有部)라고 불린다. 유부에서는 자연 세계가 원자(原子, 極微)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16) 경량부(經量部)는 경전(經典)만을 전거(典據)로 하여 유부에서 말한 것을 비판적으로 개정하였고 색법(色法) 중의 4대(四大)와 마음
의 실유(實有)를 인정하면서 기타의 것의 실유(實有)는 부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