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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현대불교 2024. 9,10월호] 북가주 틱투룩 스님의 삶과 불사의 여정 소개(1부) - 제니김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4.11.01|조회수0 목록 댓글 0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Ⅱ

 

북가주 틱투룩 스님의 
삶과 불사의 여정 소개(1부)

 

 

베트남 전쟁 난민 이민 1세로 스님이 되어 
열 여섯명의 스님 배출, 열 한 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젊은 청소년들의 빛이 되다

 

글 제니 김 (본지 취재 기자)

 

 

 

틱투룩 스님

 

* 1부에서는 미국에서 출가와 제자양성, 불사중흥기, 2부에서는 불교청소년 단체결성과 불교스
카우트 활동을 조명한다.
Compassion Meditation Center (Chua Pho-Tu) is a Pureland/mindfulness center and a monastic training monastery founded by the Vietnamese Buddhist monk, Venerable Thích Từ-Lực

 

필자노트: 다문화 사회인 미국, 그중에서도 아시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살지만, 개인적으로 베트남인들과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자주 왕래하지 않았다. 베트남 사찰 취재 요청이 왔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연했다. 틱낫한 스님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듣고 녹야원의 명상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베트남에 불교가 오래전에 전래되어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지식 정도였다. 
2023년에 취재했던 자애캠프(Camp Metta)의 베트남 비구니, 포초 크리스틴 스님이 떠올랐다. 연락을 하니 산호세 지역의 베트남 사찰들은 여름안거 기간이라 아마도 바쁘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난감하던 차에 필자가 심리학 학부시절에 어느 불자가정에 초대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베트
남계 동문이었다. 연락을 하니 매우 반가워하며, 돌아오는 일요일에 본인이 출석하는 절에 나오지 않겠느냐고 초대한다. 만일 괜찮으면 주지 스님께 소개를 하겠다고 했다. 주소를 보니 헤이워드(Hayward)였다. 오클랜드에서 15마일, 교통이 잘 풀리면 25분 내외 거리다. 
다음날 법회시간 오전 10시 보다 일찍 30분전에 동문인 호아Hoa(花) 보살을 만났다. 6-7년여만이다.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파킹장은 널널했고, 길에서 보이는 사찰의 전면은 단층으로 매우 단아해 보였는데, 뒤로 이어지는 연이은 건물들은 마치 미술관의 회랑에 들어가며 그안에 진열된 작품들을 찾아 보는 듯했다. 

 

 

법회참석
법당안에 들어가기전에 호아보살이 법회중에 입는 법복을 준비해 두었다가 건네준다. 저고리와 치마가 연결된 연한 하늘색 긴 드레스인데, 양옆이 트여있어 좌선자세하기에 편했다. 법당안은 60여명 이상이 이미 좌복위에 앉아 있거나, 벽 양쪽과 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각자의 좌복앞에는 접이식 책거치대와 쟁반이 놓여 있었다. 나전칠기 문양의 쟁반안에는 작은 물컵과 유리받침안에 티 촛불(Tea Candle)이 켜져 있었다. 하나 하나 정성이 돋보인다. 
이어 법회가 시작되고 얼마 후에 ‘신묘장구대다라니’ 합송이 퍼져나갔다. 21회 반복이라고 나의 바로 앞에 앉은 호아보살의 쪽지 전갈이다. 회수가 반복 되어가며, 소리는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처음에 각각의 소리로 색깔을 나투던 것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하며 마지막에는 한소리로 울려퍼진다. 시작부분과 끝 부분은 끝에 긴 손잡이가 달린 작은 쇠종을 울려 알리고 , 음절 하나하나의 장단은 대형 목탁을 두드려 맞춘다. 마치 북소리처럼 울린다. 대중이 함께하는 다라니 진언의 위신력이 전해져 온다. 앞과 옆을 살피니, 다라니합송 후에 잠시 숨을 돌리며, 쟁반위에 놓인 조그만 컵의 물을 마신다. 법회 회향전에 스님은 신도들의 기도문을 불살라 올리고, 법문 설한 뒤에 법회를 마쳤다. 그리고 신도들은 점심공양을 위해 대중공양간으로 향했다. 공양은 주지스님이 착석한 후 다함께 공양게를 한후에 시작했다. 주지스님이 식당 한쪽 가운데 자리에 앉자, 그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신도들이 스님과 인사를 나누거나 면담요청을 한다. 필자도 줄을 서있다가 차례가 오자 인사를 했다. 호아보살이 먼저 소개를 하고, 면담요청 취지를 말했다. 다음날인
월요일 12시 30분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마침 좋은 시간이어서 약속을 하였다. 

 

법회
좌복과 예불문 거치대

 

 

기 자 바쁘신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법명과 주소를 확인해 보고 나서야, 미주현대불교에서 지난해 취재했던 캠프메타(CAMP
METTA)를 설립한 포초 크리스틴(Pho-Chau)스님의 은사스님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스 님 보내 주신 전자편지 보고, 질문이 흥미로운 것이 있어서 준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찾아와 주시어 고맙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스님의 답변과 출가과정, 미국에서의 적응과정, 불사의 과정을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함께 이야기형식으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사찰내 도서관에서 틱투룩스님과 필자

 

출가 이전의 베트남에서의 삶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가득했던 청소년시기를 보내야 했던 틱투룩 스님! 그는 1955년 중부베트남의 후이* 시에서 약 20Km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지키는 부모님을 두었다. *후이 시는 베트남 전왕조의 수도로 요충지였으며, 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북과 남, 미군 연합군의 ‘후이 전투’로 유명하다. 1968. 1.31-1968.3.2 한달동안 치뤄진 이 전투는 베트남 전쟁사에서 군인 뿐만 아니라 민간인 살상이 포함된 가장 참혹하고 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투로 기록되어있다 (위키피디아). 
고등학생이던 14살 무렵, 세상이 심상치 않고, 웬지 자신의 앞날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학교가는 것을 그만두고 가출을 했다. 그 때가 15살. 집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고, 부모님은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 같지 않아 떠날 결심을 하고 ‘나의 길’을 찾아 나선다. 집을 떠나 있던 2년 동안,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그 중 한 친구가 ‘불교청년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중에는 예수회신부가 되고 싶어하는 카톨릭친구도 있었다. 그러다가 18살이 되던 해에 군대에 징집되었다. 전쟁중에 약 2년간 군대간호병으로 근무를 한다. 1975년 4월 30일 미군 철수가 시작되고, 그 때 전쟁난민으로 미국 캘리포니아로 들어 오게 된다. 그의 나이 20살.

 

 

난민 수용소 그리고 틱틴투 스님
“난민 수용소에 있는 동안 틱틴투 스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틱틴투스님을 만나 샌프란시스코에 가게 됐는데 그 때 샌프란시스코에 눈이 내렸습니다. 1975년 12.25일, 크리스마스 날이었어요., 나중에 은사스님 (베트남 전통에서는 근본스승, Original Teacher라 부릅니다) 이 되신 틱틴투스님은 상서로운 환영의 뜻이라며, 매우 즐거워 하셨습니다. 정작 저는 날씨에 적응이 안되어 갑작스런 눈을 보고, 그져 춥다고만 느꼈습니다.” 
“또한 잊지 못할 것은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이듬해 1976년에 선화선사(Master Hsuan Hua 宣化)를 만난것입니다. 은사스님이 저를 그 분께 인사를 시키신 것이지요.” 선화선사는 중국 위앙종 9대 조사로 중국불교를 북가주에 정착시킨 분인데 1974년에는 유키아시에 주립병원 부지를 매입하고, 1976년 이곳을 만불성성 (City of Ten Thousand Buddha)이라 명명한 후에 사찰, 승가교육원인 초등고등학교, 대학교를 설립한 분이다. *틱틴투 스님은 산타크루즈 카운티, 길로이 인근 왓슨빌(Watsonville)에 있는 킴손사 명상센터(Kim Son Monastery -Meditation Center)의 주지이며, 창건주이다.

 

 

ESL, 미국 대학생활 그리고 출가
-두 마리 토끼

그후 스님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존아담스 컴뮤니티 칼리지(John Adams Community College)에 서 제2외국어 영어반(ESL)을 시작하게 됩니다. 
“혼자 사는 동안이 저에게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전쟁으로 망가진 비참한 삶을 뒤로하고 , 새로맞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저의 삶을 재설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며 수행도 게을리 하지 않아 1977년에 은사스님의 제자로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점을 모아가며 4년제 대학으로 편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틱투룩스님은 1983년에 로스엔젤레스의 한 베트남 사원에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85년에 김광사(Kim Quang Pagoda, 북가주 새크라멘토의 최초 베
트남 사원, 1978)에서 비구계를 수지합니다. 같은 해 1985년에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도서관 경영학과 창조예술분야의 학사학위를 받아 졸업합니다. 
틱투룩스님은 1975년 미국땅에 도착하던 해에** 은사스님을 만나 1977년에 출가하여 비구계를 수지한 1985년까지, 출가수행자로서 수행과 불교교학 수련 뿐만 아니라, 제2외국어 영어반(ESL) 부터 시작하여 4년제 대학에 편입하고, 학생으로서 학문을 통해 사회제도속에서 필요한 지식을 연마하는 두 바퀴를 굴리며 매진했던 10년의 세월을 되돌아 봅니다. 
또한 “1985년이 매우 특별했던 것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것과 틱낫한 스님이 계신 자두마을( Plum village)을 방문하여 틱낫한 선사님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좋은 일도 한꺼번에 오나 봅니다. 1985년 그해에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여권으로 첫 외국여행을 나가게 되어 꿈도 이루고 대선사님도 뵙게 된것이지요.” 부전공으로 창작에술을 공부하며 미술과 조각품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루브르박물관 방문은 꿈을 이룬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헤이워드 불교센터 (Hayward Buddhist Center)
-전법의 시작
“틱낫한 스님의 자두마을을 방문하고 돌아와보니, 젊은 불자들은 늘어나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집은 너무 협소했어요. 그래서 넓은 장소를 찾던 중, 헤이워드에 첫 사원을 열어 전법을 시작하게 됩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처음에는 조그만 가정집을 세들어 하다가 그 집을 사고, 다음에 그 옆에 있는 집을 구입하여 늘려갔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불자가정,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관리할 인적자원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비구와 비구니 교육을 시작하였고, 1993년에 제1차 안거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2번째 제자가 된 비구니 포초 크리스틴(PhoChau)스님도 진행을 했지요.” 또한 스님은 1994년에 젠마스터 틱낫한 스님으로 부터 전법게(Lamp Transmission)를 받았으며, 자애명상센터(Compassion Meditation Center-CMC)에서는 틱낫한스님의 자두마을 수행전통을 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스탁톤(Stockton, CA)에 있는 퍼시픽 대학교(University of the Pacific)에서 교회운영인증 프로그램을 수료하였다. 
또한 2012년에 샌디에고 인근의 녹야원 (틱낫한 스님이 세우신 수행센터)에서 미주에서 처음으로 틱닛한 스님 대신 전법강사로 전강법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틱푸오틴(Thich Phuoc Tinh)스님과 공동으로 거행된 전강법회에서 14명의 새로운 법사들이 탄생하였다.
**필자노트:1975년과 1980년대 중반은 베트남전쟁사에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한 시대이며, 미국이민사에서도 중요한 시기로 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위해 잠깐 설명을 하고자 한다:.1) 1 차 대탈출- 1975.4월말경, 사이공(현재 호찌민 시)이 봉쇄되고 남베트남을 장악한 북베트남군은 미국인에게 당장 떠나라고 경고한다. 4월29일부터 30일 아침까지 수천명의 미군과 남베트남인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해상구축함으로 탈출. 열흘동안 약 20여만명을 헬기로 , 바다로 실어냈다. 난민들은 먼저 미국 4개주의 임시 캠프에 수용되고 나중에 의회를 거쳐, 구호에이전시를 통해 여러 도시로 흩어지게 된다. 그중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선호지역으로 많은 베트남인이 모여살며 나중에 공동체를 형성한다. 산호세와 가든그로브의 ‘리틀 사이공’이 그 예다. 2) 2 차 대탈출-1978년에서 시작 1980년대 중반까지. 통일베트남정부(1976년 유엔가입)에 의해 과거 남베트남 정부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재교육명목으로 집단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과정에서 “보트피플(the real boat people)이 발생한다. 대부분 저소득층, 농부, 어부,소규모상인, 과거군인장교로 이들은 어떤 보호장비도 갖추지 않은 조그만 낚시배에 생명을 걸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생존자는 외국인의 배에 구조되고, 동남아 여러 국가의 난민촌으로 유입된다. 이 기간동안 미국에 정치적 난민으로 약 53만명이 신청을 한다. 1차는 대부분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면, 2차는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다 (위키피디아). 

 

건물들이 연결된 회랑

 

샨티데바 조감도

불사의 중흥기
스님의 끊임없는 학구열과 수행정진, 전법에 대한 열의는 계속되어, 2000년에 현재 본사로 운영하고 있는 연민명상센터(CMC)를 창건한다. 2012년에 바카빌에 명법사(Wisdom Dharma Center), 노바토에 대각사(Enlightenment Buddhist Center) 등 여러 사찰들을 직접 설립하거나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가장 최근에는 COVID-19 판데믹의 영향으로 중단되었다가 2023년에 구입이 완료되어 카스트로 밸리에 샨티데바 명상센터(Shantideva Meditation Center)를 설립하였다. 이곳은 백인과 영어권 베트남불자들을 위해 명상 및 묵언수행에 집중할수 있는 명상센터로 운영할 계획이다. 또한 이미 수년간 사부승가(Four-Fold Sangha)로 이름지은 영어권을 위한 승가를 조직하여 매주 모임을 갖고있다. 그동안 16명의 출가 제자스님들이 배출되었는데, 3분은 환속을 하였고, 2분은 입적을 하였다. 그동안 불사내역으로 11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9개의 사찰은 미국에 있으며, 2개의 사찰은 백인제자에 의해 세워졌는데, 한곳은 뉴질랜드, 또 한 곳은 멕시코에 설립되었다. 

 

신축에 관련된 이야기
스님께 불사의 비결을 묻자, “이름이나 건물 디자인을 제가 직접 했습니다. 건물을 구입한 후에 이 건물을 어떻게 사용할 지 미리 그림을 그려보고, 모델도 만들어 봅니다. 그리고 용도에 맞도록 설계를 해 갑니다.” 라고 설명한다. “ 이 CMC를 시작할 때는 학교 바로 옆 건물이어서 우선 파킹하는데, 문제가 없는 아주 좋은 곳이라 여겼지요. 이 부지에 허름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허물고 부지를 재 정비하여, 주위와 어울리는 사찰모습으로 건축설계를 하였습니다. 부지가 일자형이고 서쪽방향에 옆 국민학교 부지가 있어서 회랑처럼 짓되, 널리 터져있어 답답하지 않도록 건물들을 한 쪽으로 지었지요. 먼저 법당이 들어서고, 다음 사무실(종무소), 대중식당과 화장실, 공양간, 스님들 숙소, 도서관, 청소년관 그리고 나머지 부속건물등으로요.” 
처음부터 스님은 청소년관(Youth Center)을 염두에 두었다. 그것은 재행무상, 모든 것은 변하고, 나이든 세대가 가고 나면 젊은이가 그 자리를 이어가야 하는데, 그것을 대나무와 죽순에 비교 하였다. “대나무가 성년이 되면 베어서 쓰이고 사라지는데, 그 자리에 죽순이 자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나무를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이 오지 않으면, 나이든 세대가 간후에는 이 사찰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옆에 학교가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도심속의 명당자리라고 해야할까? 주말을 주로 사용하는 사찰의 특성과 주말에는 학교 클라스가 없는 이점을 서로 공유하게 된것이다. 학교교실 이용과 파킹장 사용을 99년간 임대계약을 하게 된것인데, 건축관리를 하는 시에서 그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어성사가 된 것이라고 한다. 

 

 

코비드-19 판데믹: 어려움을 극복하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법당안에서 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작은 사찰들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이곳 CMC에서도 질병관리센터(CDC) 지침에 따라 6피트 거리두기를 모든 건물에서 시행해야 했습니다. 필요한 안내문을 곳곳에 설치하였지요. 법당안에서는 좌측 가로 열에 2명, 우측 가로 열에 2명의 줄에 맞추어 띄엄띄엄 앉을 수밖에 없었지요. 과정의 극복은 부처님법에 집중하여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자애, 인내, 지혜를 모으며 질병관리센터의 안내에 따라 백신도 맞으며 과학적 지침에 따르는 일이었지요.” 라며 지난 3-4년간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북가주의 베트남 사찰 현황
틱투룩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북가주에 새크라멘토에서 프레스노에 걸쳐 약 80여개의 베트남 사찰이 있다. 이 단체들은 북가주베트남사원 공동체(Vietnamese Buddhist Community of Northern California)에 등록되어 있으며, 스님은 이 단체의 집행 위원중 한분이다. 또한 전 캘리포니아에는 약 250개의 베트남사찰이 있으며,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전 미국에 펼쳐져있는 사찰 수는 400여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모든 사찰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많은 일들을 서로 협력해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안거기간인데, 베트남 사찰에서는 매주 토요일 돌아가며 각 사찰에서 참여하여 하안거 수행을 돕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120여명의 비구/비구니와 100여명의 재가자들이 산호세지역 로스가토스의 한 베트남사원 (Duc Vien Tinh uYen Monastery)에서 진행하였습니다.” 
틱투룩스님의 겸허한 말씀이다. “모두가 부처님의 가피로 저에게 다만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또한 저는 오전중에는 묵언수행을 합니다. 먼저 자신이 평화롭고 행복해야 타인을 도울 수 있습니다”

 

 

안거기간중의 공동법회

 

법회 스케쥴과 수행프로그램
자애와 공동체 평화를 위한 기도에 중점을 맞춘 프로그램
대중 : 6:00 시 아침기도 
월, 수, 금 : 경전합송 / 7:00시 저녁기도
화, 목, 토 : 7:00시 저녁 명상

 

주말 : 토요일 - 10시 대승경전 합송 (화엄경)
일요일 - 한달에 한번 정진의 날
 마음챙김 수행과 재가자 5계,  10계 합송(9시-11시)
일요법회 : 10시 - 11시 

 

청소년 프로그램
미국에 있는 사찰 중에서 한 사원안에 3단계의 불자청소년 그룹을 운영하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다음호 (2)부에는 어떻게 청소년 그룹이 형성되고, 발달되어 갔으며 북가주를 넘어 전국적인 보이스카웃과 걸 스카우트과 연대하며, 정기적 캠프를 열어 가게 되었는지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인터뷰날짜 : 2024.7.22. 12:30pm 
장소 : 사찰내 도서관
사찰주소: 17327 Meekland Ave. Hayward, CA 94541
(510)481-1577 / Website : http://www.chuaphot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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