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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전쟁과 불교, 전쟁, 평화 그리고 역사적 불교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6.06.09|조회수12 목록 댓글 0

 

특집/전쟁과 불교

전쟁, 평화 그리고 역사적 불교

 

정희수(위스콘스대학 불교학 박사과정)

글의 잡지에 소개한 당시의 배경:

1991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걸프 전쟁(Gulf War) 있었.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후유증으로 발생한 막대한 경제적 빚을 해결하고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1990년 8월 2일 산유국인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이에 1991년 1월 17일부터 2월 28일까지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했다.

 

 

1. 시작하는 .

수많은 전쟁을 경험해온 인류는 더욱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최근 중동지역에서의 대이라크 전쟁은 입장에 따라서 인식의 차이는 있으나 초현실적인 테크놀로지의 무기화로, 핵전쟁 이후 우리 모두를 다시 놀라게 하였던 참혹한 현상을 가져왔다. 전쟁기술의 발달은 잔인한 파괴와 기술적인 살인을 현대판 카니발리즘으로 재현해 보였으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비윤리성을 통해 세계의 힘의 구조를 재편성하려는 몰지각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구체화된 전쟁의 현실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전쟁의 참상과 비애을 상상하게 되며 분단 현실 속에 있는 오늘이 담지하고 있는 전쟁 요인과 반평화적 시류들을 예사롭게 없게 된다. 분단 현실 속에서 이남과 이북의 불신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의 정치적 조작과 시녀화된 비정통성으로 갈등을 첨예화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담고 있는 역사성을 중심으로 물음을 시작하면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논쟁을 불교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글에서는 불교의 교리적 논리 전개를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으며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통하여 진술해 보고자 한다. 이런 의도에서 역사적 불교라는 제한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평화의 성취자로서의 불타의 교리는 명상의 전통 속에서 가지 일반적인 오해를 가져왔다고 있다.

하나는 열반의 성취 또는 높은 차원의 명상이라고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불교는 세계를 떠나는 출가의 종교라고 하는 인식이며 둘째는 인간의 개인적 구원 성취에 급급한 자기중심의 종교(a self-central religion)라는 이해이다.

 

물론 불교 전통의 다양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는 없으나 불교는 역시 사회적 진리 성취로 흐르는 세계 중심의 종교라는 차원을 격감할 없다. 근본 불교의 사성제나 많은 계율들은 항상 적극적인 사회성과의 관련 속에서 읽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연기의 가르침은 궁극적인 실제의 원리를 펴보여 주지만 깊은 의미에서 보면 철저하게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진리이다. 실제로 연기는 무엇 하나 독립되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사회 강령이기도 하다고 보아야 한다. 연기의 진리는 대승불교의 열린 개연성 속에서 신앙하는 모든 이들이 불타의 이상적인 평회를 성취할 있다는 강렬한 인간해방의 선언이다.

불교는 역사 속에서 정말 세계 평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는가? 다양한 법의 맛들이 구체적 역사 발전에 어떻게 기여해왔는가? 불교 수행인들이 실제로 사회, 정치적인 문제들에 깊숙이 책임있게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기에 마치 넘어서는 어떤 금지 구역이라도 있단 말인가? 수도 없이 거친 전쟁의 역사 속에서 평화의 종교로서의 불교가 어떻게 참여해왔으며 어떠한 입장이불교적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면서 해석학적 과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번민하고 있으며 아주방대한 자료로서 불교의 전통이 현실의 대안을 있는지를 모색하고 있다.

 

불타는 명상을 통하여 내적인 평화(inner peace) 성취하였으며 완전한 평화를 열반(nirvana) 경지라고 말한다. 불타의 깨달음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성취이며 이는 결코 당시의 민중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자각의 성취와 유리된 것이 아니다. 인간해방의 깨달음을 통하여 불평등과 차별의 역사에 대항하여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몸소 느끼시고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미래세계를 향한 비전을 체계화한 것이 근본불교의 가르침이다.

 

불타는 스스로 당시 세계의 구조화된 악과 대항하셨고 당시 지배자였던 국왕과 바라문들을 향하여 철저한 비판의 화살을 던지셨다. 이것은 평등과 평화를 마땅히 누리고 살아가야할 이유에 대한 무한한자비와 포용에서 기인했다고 있다.

 

편견과 무지에서 유발된 모순 구조가 사회화되고 역사화 했을 인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며 불타는 모순적 망상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해방됨을 자각하여 모든 중생들이 화목하는 평화의 세계를 실현하도록 가르쳤다.

 

승가는 진리를 실천하고 추구하는 구도적 공동체로서 당시 사회의 평화를 주도해온 이상적 사회 모델로서 실제적 대안을 보여줬다. 불교적 수행은 인간이 고통의 바다를 넘어서 해방되고 망상적 환상에 종속적이고 비주체적인 인간이 스스로 주체적 인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칭한 것이라고 불교는 시종 전쟁과 반평화적 요인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구체적으로 제거할 있는 구조적인 실천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보겠다.

 

2. 불교는 단지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하는가?

수행의 종교로서의 불교는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안심(安心)’ 추구한다. 불교적인 안심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가르치며 현실 세계의 격동이나 변혁과는 상관없이 어떤 위협과 불안에서도 도도하게 체득되어지는 실존적 지혜인 것이다. 어떠한 사태 속에서도 내적인 세계에서 체험되어지는 신비한 평정을 인생의 지혜로 설명해온 전통을 우리는 깊이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시대의 증인으로서 정직한 물음을 갖게 된다. 과연 불교는 단지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종교란 말인가? ‘모든 일이 마음에서 생기며 마음에 허물이 생기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보아온 입장에서라면 내적인 차원의 우선성을 부인할 길이 없음을 본다.

 

그러나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이런 근본적인 입장의 선언과 불교적인 삶은 수없이 도출되는 인간 소외와 모순 구조의 쇄도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갈등을 인류에게 선물하였다. 그것은 탈세계적인 종교요 무쟁의 종교라는 적극성 아닌 적극성으로 대다수의 민중적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왔던 것이다. 싸워야 악과 대적해야 적과 대면하지 않고 내적인 수행의 완성은 성취될 없다는 하나의 평범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현실 세계의 환상을 끊임없이 부정하지 않고 내면적인 긍정은 불가능하다는 실제적 지혜를 깨달은 것이다.

 

선불교의 구경성(究境性) 목적하는 일이 주체적 인간해방을 통하여 반가치와 부정을 깨뜨리지 않고 성취되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대립의 현실을 딛고 서는 대응적 불타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한 애정은 불교적 수행의 시발점이다. 불타의 출가 동기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이타(利他)행위는 자신의 전도망상으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자리(自利) 행위로 통할 있는 것이다. 보살행은 이타행과 자리행의 깃점이 실천적 삶의 자리에서 상호긴장을 갖고 아름다운 성불을 이루는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다.

 

분단된 조국의 문제와 상관없이 시대에 내심 평정을 이룩해가는 많은 불제자들이 있지만 또한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역사 현장에 뛰어들어서 마치 온갖 비절대적인 대립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같으나 그곳에서 성불하는 많은 불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없다. 내적인 수행은 연기로 이루어진 관계의 경험과 실천속에서 환상과 () 멸하는 아주 역사적인 것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무상과 무아의 도리를 깨닫는 일은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테에마와 탈세속적인 명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현실적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연유속에서 실천적 걸음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진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리를 객관적인 현실 분석과 함께 역사적인 현실과 유리하지 않고 풀어갈 있다는 수행적인 결과라는 말이다.

 

마음의 평화 연기적 이론 뿐만 아니라 불타의 진리적 요체를 터득한 이들이 공동체적 실천과 수행을 통하여 서고 돕고 후원하므로 이룩할 있는 개인적인 것이며 동시에 승가적인 ,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불타는 사회적 삶에 함께 참여된 상태에서의 평화를 말하고 있다. 세속에 있으면서 시대의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정진하면서 세속의 악을 선으로 변전시키는 힘을 창조적으로 가르쳐왔다.

 

물론 세속의 악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사회로부터 도피해서 온자로서 출가자의 삶을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전은 세속과 어울리면서 세속의 악에 더렵혀지지 않는 경지를 가르쳐 왔다. 진흙 가운데서 자라나서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청정한 연꽃에 비유한 법화경의 종지용출품 예이기도 하다.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불도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세계를 구제할 있는 구체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가는 세속에서의 계속적인 자기 각성으로 새롭게 되는 불염세간법(不染世間法)이지 은둔적인 순수성만을 말하는 공간적인 용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출가자일수 있다. 왜냐하면 불타로부터 기인한 법의 자명성에로 우리는 매일 귀의하고 있지 않은가? 이기적인 자기 욕망을 끊고 철두철미 인간의 사회성을 인정하고 있는 승가로 우리는 날마다 귀의하고 있지 않은가? 귀의는 불교 수행의 지평에서 보면 하나의 출가이며 출가의 구체적인 실증인 것이다. 불교적 평화는 거짓의 세계에 대한 종식을 선언하므로 이루어지는 정도(正道) 현현됨이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3. 역사 속의 불교와 전쟁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이들과 그들의 삶의 중심이 많은 경우에 있어 불교도였으며 승가였다는 사실은 불교문화권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승가가 단순한 수행단체라고 하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경제적 활동과 정치적 활동의 중요 무대로 등장한 것은 불타재세시 부터 사실이었다. 승가는 소외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많이 찾았던 요양처였으며 수행처였다.

 

사실상 불교는 지나치다 정도로 정치에 깊숙이 참여한 공동체적 종교였으며 세기를 거듭해오면서 수없이 전쟁과 군사적인 일에도 참여된 것을 부인할 없다. 보다 가깝게 역사를 뒤적여본다면 경전 중심적 불교 역사적 불교 상당히 거리를 가지고 전승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불교는 승가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 왕을 세우기도 했고 폐하기도 했다. 때로는 승려에 의하여 왕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불타는 모든 생명체를 향하여 외경을 표하고,  수많은 불교의 제왕들은 인도나 스리랑카의 예로 보면 힌두교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던 거대한 정복자이기도 했다.

 

트레볼 (Trevor Ling) 버어마와 타일랜드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여 기술하면서 비참한 전쟁들이 상당수가 승가의 공적인 허락과 후원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1932년과 1957 번에 걸쳐 타일랜드의 정부 실추는 승가의 대항과 후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예로 있다. 중국의 제왕들 중에 전쟁의 승리는 부처님 앞에 향을 올리는 영광으로 포현되어졌고 전쟁으로 정복한 땅은 불국토와 동일시되었다.

불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인정되고 숭배되었을 양천(541-604) 수나라를 세웠고 그의 군사적 승리는 전쟁의 무기를 불전에 봉헌하는 파격적인 선까지 발전하였던 예를 남겼다. 당나라 때는 많은 승려들이 군사적 지휘관이 되는 것을 영예로 여기기도 하였다. 619년에 있었던 승려들의 혁명은 단순히 다른 이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고탄쳉(Kao Tan-Cheng)이란 승려는 자신을 황제로 선언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승려들은 몽고인들에 대항하여 싸웠고 악마들과 결전하라 구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쳉포(T초두-Pao) 승려로서 송나라의 안전을 위하여 송나라의 왕을 위하여 죽겠다고 서약하기도 한다. 물론 명나라에 와서는 일본군사들을 대적하여 아주 능률적으로 싸웠던 것이 기록되어 있고 명나라는 실제 승려였던 이에 의하여 창건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불교는 때때로 농민혁명의 중심이 되어서 13세기 후부터 적극적으로 정치적 사건들에 참여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몽고족, 왜족, 만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에서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승전을 이룬 서산대사(1520-1604) 소위 승군(僧軍) 지휘한 분이었다. 그는 원광대사의 세속오계에 기초하여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필연적이며 선택적인 싸움을 부르짖었으니 이러한 기반 속에서 법화경, 금강경, 그리고 인왕경 등은 국가를 호하는 호국삼경으로 추앙되고 해석된 사례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일본의 예도 일반 사원이 그들 자체의 군사를 소유한 것으로 10세기 16세기까지 숱하게 나타나 있으며 선불교의 융성은 사무라이의 무사도와 공인되어 절대적인 충성, 그리고 죽음과 고통에 대면하여 살신을 자처하는 윤리도 확립해갈 정도였다. 때로는 종교적으로  열심인 선승은 가장 살인적인 사람으로서 지칭되기도 했다. 불교는 대중적인 운동에 깊이 파고 들었고 사원에는 평화의 때보다 무질서와 전쟁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 일본 역사의 현실이었다. 불타는 전생에서 사교도(邪敎徒)들을 죽였다고 대열반경을 쓰기도 하며 그러한 살인은 불법의 보호를 위하여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자기 방어를 위한 살인은 정당화되었고 다른 일들이 희생되는 위기에서 당연히 죽이는 일이 허용되기도 한다.

 

오늘날 불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로 천명되어지고 이를 통한 평화운동은 처처에서 발아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우리들의 자성을 위하여 비판적으로 보아야 것은 평화의 주체적 종교로서의 불교가 역사 속에 어떤 형태로 발전되어 왔으며 간단히 묘사들이긴 하지만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부면의 불교적 참여를 옳게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영국에 있는 스리랑카 학생들이 트레볼 링의 저서를 읽고 나서 대꾸하기를 불교의 비폭력과 비혁명적인 형태들에 만족할 젊은 불교도들은 이상 많지 않다고 하였다고 한다. 모택동 당시 중국 불교도들은 대혁명에 반대하는 이들을 살해하는 일은 다른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영웅적인 행위하고 정당화하였다. 최근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싸웠던 중국 승려들은 세계 인민의 평화를 저해하는 악마적인 미제국주의자들은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는 지탄받을 일이 아닐 뿐더러 열반을 향한 하나의 공덕이 있었다.

데이비드 스넬그로브(David Snellgrove) 티베트 불교를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부인하는 일종의 온유한 종교라고 말하면서도 티베트 승려들과 재가신도들은 항상 강인한 전투원들이었다고 말하였다. 일본의 선불교는 이미 언급하였지만 선불교 전통은 군사문화에 대한 강한 후원을 하고 있고 적들은 악이며 당연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가르쳐져 왔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다양한 전통과 계속되는 다양성을 살아있는 역사성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비폭력과 반전쟁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경험 속에서 보면 단순히 하나의 차원만 고집한 그런 종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불교는 평화를 사랑하며 사해동포주의적인 인류애를 자세로 선포하는 고귀한 진리의 요체이다. 그것은 불교도들은 전쟁에 나서서는 안된다는 철칙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소요나 혁명이나 항쟁에 참여해서도 안된다는 논리일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의 전통에서 평화의 실천은 자명한 불교도의 생활 원칙일 수도 있다는 해석일 것이다.

 

아자타사타(Ajatasatta)왕은 인근에 있는 바지(Vajji)족을 침공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불타를 찾아가 그의 자문을 구했다. 고타마 불타는 왕에게 침공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후로 바지족은 회중을 중심으로 의견 수렴에 의한 정치를 하였고 나이든 이들을 공경하였고 그들의 전통을 지켰다. 예는 승가를 위해 실제적으로 응용되었고 우주적인 형제애를 통하여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것이 진리처럼 숭상되었다.

 

여기서 흑자는 고타마 불타는 백성들이 그들의 통치자를 스스로 선택하므로 구성되는 민주적 형태의 정치 형태를 주창한 분이라고 해석한다. 후에 왕은 바지족을 정벌하기 위해 전쟁을 하였다. 그는 불타의 가르침은 충고를 무시하였지만 지속해가야 한다고 믿었고 후의 통치자들에게 사실을 부분적으로 불타의 가르침처럼 남아있게 되었다.

아쇼카왕은 중의 대표적 인물이며 그는 불법을 수호하고 가르침을 흥법한 위대한 왕이었으며 동시에 아프카니스탄과 인도의 부속적 인접 국가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한 왕이었다. 그가 특별히 칼링카스의 유혈적인 정복 후에 그가 야기시킨 고통과 살인들을 참회하였고 불교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무엇으로 표현할 있을지 분명치는 않으나 불교의 전통은 구체적으로 평화의 전달자로서 인식되었고 현대에 와서 동양적 지혜를 대표하여 세계 평화를 구축해가는 새로운 인식을 불교가 주고 있다. 불교는 전쟁의 비극에 참여한 것이 전통의 일부이기도 하며 평화의 이상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의 보다 전통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

불교평화친우회나 여러 평화운동단체들은 불교의 평화적 가르침과 자비의 수행을 평화운동의 핵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현대가 접한 환경의 문제나 반전운동 그리고 인권수호 운동에 적극적인 공헌을 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보게 된다.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된 불교의 모습은 사회 변혁에 계속적인 동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불교의 가르침이 아주 신선한 대안을 세계에 보여주고 있다는 자명한 증거이며 세계평화의 정착을 위한 대안이 된다는 것이기도 한다.

 

4. 맺는

위에서 서술한 사실들은 불교 전통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한계된 진술이라서 역사성을 보다 무게있게 읽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경전적 논쟁들을 동원하여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면의 한계에 다소 변명을 부치고자 한다.

 

다만 이런 불교의 전통 속에서 현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 실제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것이냐는 질문을 가져야 것이다.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종교로서의 불교, 수없이 역사적 현장에서 전쟁을 치루고 경험하고 때로는 전쟁의 장본인이 되었던 불교, 그리고 폭주하는 변혁기인 현대에 새롭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서로 중첩되는 모습을 보고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해결하지 못한 불교에 요구되는 절박한 문제는 소용돌이의 역사 속에서 전망과 입장을 가져야 하는 현실성이다. 철저하게 자기비판을 하면서 자비로서 현실의 전쟁의 문제를 보아야 하겠는데 이런 운동이 불교의 거대한 뿌리 속에서 어떻게 소용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비역사화되고 비세속으로 지배자의 언어가 되기 일쑤였던, 민중과 유리된 불교의 허상을 우리는 이상 용납할 없으며 이런 형태로 정당화된 전쟁은 이상 파괴적인 힘이 되지 않도록 맞서야 하겠다는 것이다. 관념적 유희는 비역사적인 이원성과 모순된 실천방식에 의하여 불교 속에 주인으로 독점되었다면 불교의 진솔된 언어들을 회복함으로써 창조적 비판의 도구로서의 가르침, 창조적 비판을 통한 성불, 역사적인 보살행을 통한 불교적 인식의 지향, 그리고 사회구조적인 모순 변혁에 자기 주체적인 해방을 이루어가는 안심(安心) 이루어갈 있을 것이다.

평화의 정착을 위하여 특히 우리 조국의 평화를 위하여 탈역사적인 출가나 선지상주의나, 단순한 긍정과 타협의 선호는 멈추어져야 한다고 행각한다. 불교는 우리 민족의 반평화적 모순 현실을 타개하고 통일에 기여하는 실천적 종교라고 생각한다.

 

199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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